58. 성인만 출입가능2022.02.20.
하얀 머릿속은 저절로 채워지지 않았다. 아무도 리시스에게 성교육이라는 것을 시켜주지 않았다. 그도 그런 것이, 성교육이 필요할 기회도 없었다. 생리가 시작할 무렵엔 전장이었다. 그때 도와줬던 동네 아낙들은 정말 중요한 말이라며 두 손 모아 외쳤다.
‘이제부터는 남자와 손끝도 마주대시면 안 됩니다! 그러면 아가가 생겨서 그 남자랑 결혼하고 평생 살아야 해요!’
사실 그들도 자신의 몸에 대해 잘 모르니 그 정도가 공주에게 알려줄 수 있는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 짧고 굵은 성교육은 전장에서는 아주 유용했다. 동네 아낙들의 경고에, ‘공주님께 스치기만 해도 죽이겠다!’는 렉싱턴 장군의 보호 덕분에, 리시스는 큰 사고 없이 자라날 수 있었다. 신방에 들기 전에도 ‘에드린에서 충분히 교육해주셨을 거라 믿습니다.’는 엄포만 들었다. 그때 당시에는 완벽한 적국이었으니 약한 모습, 부족한 점을 들키지 않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당연하지!’라고 대답해버린 덕분에 성교육을 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는 날아갔다. 에라 모르겠지, 어떻게든 되겠지 단순하게 생각했다. 정말 어떻게든 되기는 했다. 하지만 이제부터도 어떻게든 될까?
“어떡하지!”
“기대하시면 된다고 생각해요!”
“뭘 기대해?”
앨린은 리시스와 완전히 태도가 달랐다. 리시스는 키에르트가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겁이 나는데, 앨린은 기대와 흥분이 최고조였다.
“제가 듣기로는, 밤에 정말 좋으면 정신이 아득해지고 몸에서 힘이 빠지고 몸이 닿을 때마다 번개를 맞는 듯 찌릿거린대요!”
“남자 몸에서 마약 성분이라도 나와?”
“비슷한 것 아닐까요?”
“남자는 무슨 광합성으로 먹고 산다는 말 같아.”
“에에에이, 그만큼 둘이 잘 맞으면 좋을 수도 있다는 말이겠죠!”
물론 앨린도 경험이 없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그저 그럴 것이다, 또는 누가 그렇다더라, 하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전부였다.
“번개가 쉼 없이 눈앞에서 번쩍번쩍거리고 귀가 멍해지고, 급기야 팡파르 소리가 들리기도 한대요! 몸속에 해일이 밀려와 온몸의 감각이 쓸려나가는 통쾌함까지 온다던데요? 진짜 환상적일 것 같아요!”
“……뭔소리야.”
리시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눌렀다. 앨린이 잔뜩 주워 온 이상한 이야기들은 아무리 들어도 현실성이 없었다. 아무리 들어도 이해가 안 되는 이야기였다. 만약 그게 실제한다 해도 그게 어떻게 즐거울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를 놓아버리는 것 아닌가. 앞으로 키에르트가 자신의 몸을 그런 식으로 다룰 수 있다 생각하니 더한 공포가 몰려왔다.
“황후 폐하는 그런 느낌이 없으셨어요?”
리시스는 입이 붙어버렸다. 아니라고 하면 둘 사이가 안 좋다고 공언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렇다고 맞다고 하면 지금 이 고민을 왜 하고 앉았냐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안 알려줘.”
리시스는 결국 이번에도 앨린의 기대를 저버리고 도망쳤다. 앨린은 오늘도 황제 부부의 은밀하고 따끈한 비밀에 특별히 접근하는 것에 실패했다. ***
“후. 그래, 공포란 막연함에서 오는 것이니까.”
리시스는 도서관을 찾았다.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정보를 찾아서였다. 앨린의 정보는 너무 허황되고 뜬구름 잡는 소리였다. 본인도 모르니 환상에 환상을 입힌 결과였다.
“책은 제대로 알려줄 거야.”
리시스는 책을 믿었다. 책은 뭐든지 알려주었다. 백지처럼 무지한 리시스의 머릿속은 우선 지식을 채워야 했다.
“황후 폐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제 황후궁으로 돌아가신 겁니까?”
“아니.”
“그럼 아직 위험하신 것 아닙니까?”
“위험하지는 않대.”
“이제 위험하지도 않은데 계속 황제궁에 계신 겁니까?”
허멀 후작이 어리둥절해 했다. 리시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암살자의 조사는 마무리되었다. 어찌나 배후를 꽁꽁 숨겼는지 암살자조차 제대로 알지 못해 답은 미궁으로 사라졌다. 그래도 공격이 단발성이었다는 것은 알아냈다. 암살의 위협에서는 벗어났다. 다만 하녀를 추가로 뽑는 것이 번거로워 아직 황제궁에 신세를 지고 있었다.
“궁 옮기는 것도 번거로워서. 아, 대신 늘 보는 사람들의 통과 절차는 간소화하기로 했어. 허멀 후작한테도 말해준다는 걸 깜박했네.”
가넷이나 앨린은 이미 그러고 있었다.
“허멀 후작도 이제 귀찮은 절차 없이 편하게 들어와. 수업 다시 시작해야지.”
“흐음……, 사실 이제 와서 굳이?란 생각이 들긴 합니다만……. 이미 배우실 만큼 배우셨다는 생각도 들고요…….”
“아니야! 나는 아직 모자라! 다가올 행사 준비도 있단 말이야.”
“다가올 행사요? 아……, 황후 폐하도 참가하십니까?”
큰 행사는 아니었지만 궁을 자주 들락거리는 인물인 이상 허멀 후작도 웬만한 행사의 소식은 다 들었다. 행사의 특성상 황후는 참가하지 않는다고 정해져 있었는데, 그새 변경이 된 모양이다.
“그래도 황제 부부의 참석이 주가 되는 행사는 아니니 크게 신경 쓰실 건 없을 겁니다. 그 자리엔 황후 폐하의 예의범절로 트집 잡을 사람도 없을 테고요.”
고운 귀족 아가씨들이 부채 나부끼며 눈 흘기는 자리는 아니었다. 대신 칼을 꼬나든 병사들의 살벌한 눈길이 있을 수는 있다. 그래도 황제 폐하께서 곁에 계시니 뭐가 걱정일까. 허멀 후작은 느긋하게 마음을 놓았다. 결론은 수업 끝!이었다.
“그 외에는 정확하게 모든 걸 책대로 하는 사람도 별로 없으니 그냥 필요한 만큼 책에서 도움을 받으셔도 될 겁니다.”
“그럴까.”
리시스만큼이나 허멀 후작도 지식에 대한 신뢰가 두툼했다. 오늘만큼은 그 신뢰에게 배신당하고 싶지 않았다. 리시스는 도서관을 찾은 본론을 되새기며 가슴을 폈다.
“오늘은 뭘 찾으러 오셨습니까?”
“아……, 그냥, 좀.”
이걸 어느 쪽이라 해야 하나. 남성성의 정의? 이성에게 남성성을 표현하는 방법? 뭘 해도 그럴싸한 책 제목이 떠오르지 않았다. 리시스는 허멀 후작의 도움을 받는 것은 포기했다.
“그냥, 심심풀이 하러 왔어.”
“아, 그러시군요.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찾아 주십시오.”
“그럴게.”
다행히 허멀 후작은 큰 관심 보이지 않고 물러나 주었다. 다시 혼자 남은 리시스는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광활한 도서관의 탐험을 시작할 때였다. 그래도 리시스는 의기소침해지는 대신 씩씩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생물학’ 우선 생물학적으로 접근해 보기로 했다. 아주 틀린 접근은 아니었다. 생물학 책에는 적나라하고 건조한 설명이 동반되어 있었다.
“으악!”
어느 곳 하나 생략되지 않은 남성의 신체구조도를 편 순간 리시스는 비명을 지르며 책을 닫았다. 불경한 것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책을 멀찍이 떨어뜨려 놓았으나 눈은 떨어지지 않았다.
다소……, 많이……, 충격적이었다. 태어나서 제대로 처음 본 남성의 신체. 솔직히 아름답다거나 멋지지는 않았다. 그냥 이상하고 징그러웠다. 키에르트는 자신의 ‘남성성’을 보여주겠다 했다.
“설마 저걸 보여주시겠다는 소리야……?”
리시스는 울먹였다. 삽화로만 봐도 기겁하는 판에 저걸 실제로 눈앞에서 보아야 한다고? 그건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감당하지는 못해도 도망은 가지 말아야지……, 사람의 성의가 있는데.”
리시스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손을 멀찍이 뻗어 다시 책을 집어들었다. 꿀꺽 목을 울리며 침 넘어가는 소리가 복도 끝까지 울렸다. 페이지를 넘겨 다시 보니 조금은 진정이 되었다. 그래, 이건 신체의 일부일 뿐이야. 여성과 다른 남성의 몸. 단순한 신체적 차이라고 의식하니 받아들일 수 있었다. 리시스는 그림의 다리 사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화살표와 함께 설명이 작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남성기. 배뇨행위와 함께 성교를 위해 달려 있는 신체부위. 개인마다 크기의 차이가 있다.』
“크기의 차이…….”
리시스는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남자는 뭐든 크다는 말을 아낙들의 깔깔거림 속에 들었던 것 같은데, 이것 역시 그 말에 포함되는 것일까. 그럼 키에르트는 얼마나 클까. 아무리 커도 놀라지 않기 위해 리시스는 머릿속으로 최대한 다양하게 상상해 보았다. 세상에 이미 존재하는 표현을 빌어. 하지만 어느 표현을 갖다 붙여도 이게 맞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음……, 너무 크진 않았으면 좋겠다…….”
리시스는 대충 좋은 크기겠지, 라고 머릿속에서 정리를 끝내버렸다. 키에르트는 적어도 신체적으로는 완벽했으니까. 뭐든지 완벽할 것이다. 상상을 마치자 대충 읽어 넘어갔던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성교』 두 사람이 초혼에 생략했던 행위였다. 정확하게 어떤 행위인지, 이제는 자세히 알아 둘 때가 되었다. 리시스는 생물학 책을 내려놓고 ‘성교’와 관련된 책을 찾아 헤맸다.
“음……, 여기도 아니고…….”
그러나 성교와 관련된 책은 좀처럼 찾기 어려웠다. 일단 몸을 움직이는 것이니 운동 쪽에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성교는 운동은 아니었다. 운동과 관련된 서가 다음으로 어딜 찾아야 할지 몰라 방황이 길었다. 지리학, 천문학, 토목학에 남녀의 교합에 대한 책이 있을 턱이 없다. 설렁설렁 성의 없이 서가를 지나치는데, 굉장한 존재감을 보이는 책 한 권이 있었다. 『별자리 설화에 얽힌 에로티시즘』
“!”
이거다! 리시스는 쾌재를 부르며 책을 꺼내들었다. 대충 별자리에 얽힌 설화와, 그 설화 속에 숨겨져 있는 에로티시즘적 장치에 관한 가벼운 이야기들이었다.
“에로…….”
리시스는 처음으로 ‘야한’ 분야에 관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곧 눈을 떴다. 책을 닫은 리시스의 목표는 분명해졌다. 리시스는 올곧게 빨간 딱지가 붙은 서가로 향했다. 『성인만 출입가능』 입구부터 의도가 분명히 느껴지는 서가였다. 리시스는 괜히 위축되는 어깨를 당당히 펼쳤다.
‘나는 유부녀다! 결혼까지 한 당당한 성인이다!’
당연하지만 서가에 접근하는 것을 막는 사람은 없었다. 애초에 지키는 사람도 없었지만. 혹시 누군가가 지키고 있다가 ‘잠시 성인인지 검사를 하겠습니다’ 하고 길을 막는 건 아닌가 하는 상상까지 하며 긴장하고 있었다. 도서관의 학구적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서가를 굳이 찾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덕분에 리시스는 한가하게 책장의 책들을 탐색할 수 있었다.
“아…….”
정신세계는 바빠졌다. 『당신도 할 수 있다! 침대 위의 즐거움』 『밤새 즐거운 놀이들』 『여자를 녹이는 뜨거운 기술』 리시스가 원하던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리시스가 원했던 것은 생물학 책같이 건조하게 있는 사실 그대로만을 전달해 주는 문장이었다. 그러나 대충 골라잡은 책의 중간을 대충 연 순간……, 리시스는 살색 가득한 삽화의 향연에 숨이 턱 막혀 책을 떨어뜨렸다. 후두둑. 충격받은 리시스의 정신세계가 무너지는 소리이기도 했다.
“아냐, 이 정도로 포기할 수는 없어.”
어차피 다가올 현실이다. 리시스는 다시 차갑게 마음을 먹고 책장으로 눈을 돌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