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정략결혼도 결혼이야2022.02.13.
“기다렸어.”
“아직도 안 나갔어?”
알헨크의 인사에 세니아는 차게 답했다. 저놈의 인간을 처음에 들인 것부터가 문제였다. 세니아는 꿈쩍도 안 했지만 렌데일 공작은 꿈뻑 넘어갔다.
“왜 이렇게 늦었어? 한참 기다렸잖아.”
“왜.”
“아, 꼭 그렇게 차갑게 말해야 해? 상처받겠다.”
“받든가.”
아무리 심한 말로 쳐내도 모래처럼 흡수해 버린다. 반사적으로 받아치는 것보다 강했다. 무슨 말을 해도 웃으며 슬렁슬렁 넘어가는 데에는 상대할 도리가 없었다. 세니아는 질색을 했지만 렌데일 공작은 그런 유들거림을 즐거워했다. 그래서 렌데일 가문의 저택에 눌러앉게 된 것이었다. 지배욕이 강한 사람은 아부에도 약하다. 그러나 세니아는 아니었다. 그래서 내내 알헨크가 불쾌했다. 그래서 말을 들은 체도 안하고 지나치려 했다. 휘둘리는 것은 딱 질색이다.
“부탁 하나만 하려고.”
알헨크가 세니아의 발목을 잡았다. 세니아는 못 들은 척 무시하고 지나치려 했다. 알헨크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툭 던졌다.
“황실에서 열리는 다음 행사에 나를 파트너로 좀 데려가 줘야겠어.”
“뭐?”
그 말에는 걸음이 절로 멈췄다. 웬만해서는 무시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는 과한 요구였다. 뜻이 맞아 행동을 함께 했을 뿐이지 세니아는 알헨크의 수하가 아니다. 그러나 알헨크는 맡겨 놓은 사람처럼 당당하게 요구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황후를 끌어내려야지. 세니아 아가씨 하는 짓을 봐서는 어느 세월에 될지 모르겠거든.”
“내가 알아서 해.”
세니아는 고운 눈썹을 찌푸리며 경고했다. 알헨크는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지금까지 알아서 못 하는 것 같으니 내가 직접 나서겠다는 거잖아.”
하지만 세니아도 이번에는 강경했다. 알헨크가 단지 뜻만 통해서 렌데일 저택에 머무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제시한 막대한 조건들이 렌데일 공작의 마음에 들었던 것도 있다. 돈이라면 렌데일 공작가에도 차고 넘친다. 하지만 로구안과 관련된 물품들의 독점권, 개발권 등은 돈 넘치는 렌데일 공작도 눈이 뒤집혔다. 일개 암살자가 임의로 운용할 수 있는 조건은 절대 아니었다. 그래서 알헨크의 얼토당토않는 요구들을 어느 정도는 받아들여줬다. 하지만 이 이상 상황의 주도권을 알헨크에게 넘겨줄 수는 없었다.
“속도와 방식이 다른 거겠지.”
“못 하는 게 아니고?”
알헨크는 빈정거리며 도발했다. 세니아는 험악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생각보다 리시스가 선전하기는 했다. 세니아도 예상하지 못한 반격이 날아오고는 했으니까. 그렇지만 아무리 리시스가 용맹해도 결국 혼자다. 버틸 수 있는 한계가 분명 올 것이다. 세니아는 ‘쉬란은 적국의 공주임에도 최선을 다해 모셨으나 본인이 견디지 못했다.’는 명분을 원했다. 언젠가 자신이 황후 자리를 되찾았을 때 쓸데없는 잡음을 듣고 싶지 않았다. 황후 자리만 차지한다고 끝이 아니다. 쉬란은 세니아의 나라이기도 했다. 황후 자리만 얻고 국력을 로구안의 손에 쥐여 주는 멍청한 짓을 할 이유가 없었다.
“네 움직임이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데, 내가 협조할 필요는 없지.”
“이번 건 될 걸?”
“어림없어.”
세니아는 코웃음을 쳤다. 렌데일 공작이면 모를까 세니아는 처음부터 알헨크를 믿지 않았다. 로구안의 수뇌부와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만 아니었으면 끝까지 반대했을 것이다. 세니아는 더 이상 말을 섞을 생각도 들지 않아 쌩하니 몸을 돌렸다.
“황후의 스캔들 어때.”
우뚝. 세니아는 걸음을 멈췄다.
“뭐?”
“오늘 안면 텄거든.”
“뭐라고?”
이어지는 말은 더더욱 믿기지가 않았다.
“리시스 공주와 만났다고?”
“음, 조그만 것이 귀엽더라. 왜 황후가 귀엽다는 말을 안 했어?”
세니아가 미끼를 물자 알헨크는 말을 빙빙 돌렸다. 세니아는 하마터면 한 대 칠 뻔했다. 사람 속 긁는 데 아주 천부적이었다.
“내가 건드리려고 하니 아기 새처럼 포르릉 쪼그라드는데, 재밌더라고.”
“어디서, 대체.”
황후가 그렇게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이었나? 세니아조차 기회를 따로 만들어야 볼 수 있었다. 지금은 알헨크가 벌인 암살 사건 때문에 소식조차 들을 수 없었다. 황후궁의 소식을 나르는 정보원들이 모조리 막혔다. 지금 리시스가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황궁 밖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몸단장 도울 사람을 아예 평민 중에서 뽑을 생각인가 보던데. 신분도 감추고 면접을 보길래, 가 봤지.”
“……평민?”
“음, 시녀네 집을 빌려서 공고를 냈더라고. 사촌 언니인 척. 그걸 보고도 몰랐어?”
세니아도 보기는 봤다. 앨린은 이름도 모를 만큼 존재감 없는 귀족이었다. 시녀가 된 이후 주목하고는 있었지만 사촌 언니까지는 관심 두지 않고 넘겨버렸다. 시녀가 됐다는 소리에 덕 좀 보려고 시골에서 기어올라왔나 보지, 이렇게 생각했다. 눈앞에 널어져 있던 정답을 보고도 놓쳤다. 세니아는 구겨지는 자존심에 입술을 물었다.
“……그게 그거였어? 아니, 이 중요한 일을 그딴 식으로 한다고?”
“그런 식으로 해야 당신이 훼방을 못 놓으니까 그랬겠지.”
알헨크의 말도 크게 틀리지는 않았다.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한 작전으로는 괜찮았다. 사방에 눈과 귀가 있는 세니아조차 멀쩡히 두 눈 뜨고 놓쳐버렸으니까. 그러나 다른 것도 아니고 황후의 단장을 도와줄 사람을 뽑는 일이다. 세니아는 눈앞이 아찔했다.
“황후의 시중을 평민에게 들게 한다고?”
“괜찮은 생각 같던데.”
“괜찮다니! 어중이떠중이를 데려다 황실에 들이겠다는 생각이 괜찮아? 황실의 위엄이 바닥으로 떨어질 일인데?”
“적어도 목은 안 떨어질 테니까.”
세니아의 심각한 반응에 알헨크는 낄낄 웃기만 했다. 황실의 위엄보다 먼저 세니아의 기분이 곤두박질쳤다.
“누구를 데려다 쓰든 세니아 아가씨의 사람보단 나을 거 아냐.”
“면접을 봤으면 붙기라도 하든가.”
“하하. 그러게. 황후님께서 조금만 덜 순진해빠졌어도 내가 됐을지도 모르는데.”
세니아는 험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번 정보를 눈 뜨고도 놓친 것은 세니아의 실수였다. 놀려먹는 알헨크에게 날려줄 한 방이 없었다.
“그런데 말이야……, 지금 하는 식대로 망신 좀 준다고 황후가 울며 도망가기라도 할 것 같아?”
“도망가라고 하는 게 아니라, 나중에 언제고 결혼이 깨질 때 잡음이 없게 하려는 거야.”
“깨질까?”
알헨크가 툭 물었다. 증명해야 하는 난제도 아닌데 세니아는 말문이 막혔다. 세니아는 이 결혼이 반드시 깨질 것이라는 걸 믿었다. 정황상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에드린과의 영원한 평화? 그런 게 있을 리가. 그러나 불안감은 이제 외면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져버렸다.
“둘이 꽤 잘 지내지 않아? 남녀 눈 맞는 거, 한순간이야.”
“네가 그렇게 봤다면 성공한 정략결혼이네.”
“정략결혼도 결혼이야.”
알헨크가 불안감을 배가시켰다. 키에르트는 원래 정도를 지키는 사람이니까, 맡은 바 역할에 충실한 사람이니까. 세니아도 계획 수정의 필요성을 슬슬 느끼던 차였다. 원래는 리시스가 어떤 행사에서도 힘을 쓰지 못하게 하려 했다. 황후궁의 예산도 줄이고, 사람들의 눈에도 띄지 않게 하고. 그러다 보면 자연히 존재감도 사라지고, 있되 없는 황후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미 리시스의 존재감은 황궁 내에서 커져버렸다. 귀족들은 틈만 나면 ‘황후 폐하가……’로 말을 시작한다. 거기서 키에르트의 마음까지 진짜 리시스에게 붙들려 버린다면? 세니아로서는 상당히 성가신 상황이 될 것이다.
“무슨 짓을 어떻게 하게.”
세니아는 내키지 않는 질문을 던졌다. 알헨크는 기다렸다는 듯 씩 웃었다.
“간단하지. 내가 매일 하고 다니는 짓을 하면 되니까.”
“…….”
알헨크는 사람 속을 북북 긁는 것뿐 아니라 살살 건드리는 것도 잘했다. 사실 거기까지 알고 싶지는 않았다. 세니아의 하녀가 동태가 이상해져서 캐보다 알게 되었다. 더 가관인 건 하녀가 알헨크에게 쏙 빠져 있단 점이었다.
‘사랑해서였습니다!’
하녀는 모진 추궁 끝에 그렇게 절규했다. 알헨크는 하녀를 꼬시기 위해 돈을 쓴 것도 아니요, 협박을 한 건 더더욱 아니었다. 그래서 더욱 기가 찼다. 그냥 꼬셔서 넘어갔다고? 세니아로서는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렇게 하녀 하나를 날려먹은 알헨크 비장의 재주. 그 재주를 이제 황후에게 써 보시겠단다. 알헨크가 황후를 꼬신다. 그래서 그 하녀처럼 알헨크에게 죽고 못살게 만들어 대형 스캔들을 터뜨린다. 그렇게 된다면 아무리 정략결혼이어도 이혼각이 선다.
“일이 웃기게 돌아가네.”
세니아는 하하, 웃었다. 미남계라.
“만날 기회만 만들어 줘.”
“진짜 그거면 돼?”
“내 몸과 혀만 있으면 되는 작전이니까.”
“그런데 귀찮은 건 딱 질색이라며.”
유혹해서 스캔들을 만드는 작전은 시간과 노력이 든다. 알헨크는 뭐든 빨랐다. 손대는 것도 빠르고, 뒷수습도 빨랐다. 하녀가 밀정 노릇을 하다 들킨 사건에 대한 뒷수습도 그랬다. 그냥 밤에 죽여 묻는 걸로 끝내버렸다. 그런 인간이었다. 그런 알헨크가 웬일로 돌아가는 작전을 쓰겠다 하니 의심이 갔다.
“귀여우면 좀 귀찮아도 돼.”
“허.”
“아, 세니아 양은 예쁘지.”
“안 물어봤어.”
세니아는 이를 악물고 잇새로 중얼거렸다. 저놈의 헛소리를 듣고 있으면 정신이 이상해질 지경이다.
“듣든 말든 예쁜 건 변함이 없으니까.”
한 마디 한 마디 추가될 때마다 더욱 기분만 더러워졌다. 정말이지 볼 때마다 더 최악으로 가는 인간이다. 대체 저딴 새끼에게 홀리는 인간은 얼마나 제정신을 내려놓고 사는 거야?
“으.”
세니아는 몸서리를 치며 자리에서 벗어났다. ***
“황후 페하? 저기요?”
“어어…….”
“이 시안이 맞는지 확인을 좀 해 주셔야 한다는데요.”
“어어, 맞는 것 같아…….”
그러는 리시스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앨린이 들이민 시안을 뚫고 저 멀리 어딘가의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후 폐하? 혹시 앞이 보이긴 하세요?”
“어…….”
“손가락 몇 개일까요?”
“모르겠어…….”
리시스는 넋이 나갔다. 잡아보려 해도, 돌아오라 애원을 해도 나가버린 넋은 사춘기인지 돌아오지를 않았다. 앨린은 심각하게 자신의 손가락 세 개를 내려다보았다.
“……손가락이 몇 개인지 모르시겠다고요?”
“합방 날에 폐하가 뭘 하실지 모르겠어…….”
‘모르겠다’는 공통점 때문에 합방에 대한 고민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키에르트의 선전포고는 막강했다. 덕분에 당장 다가오는 행사준비는커녕 합방에 대한 고민만 머리를 가득 채웠다.
“……오, 합방…….”
앨린은 들고 있던 서류를 얌전히 내려놓았다. 행사가 뭐가 중요한가. 합방이 먼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