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나도 남자야2022.02.10.
“허락, 받는 걸 잊었군.”
알헨크도 허락을 구하지 않았다. 리시스가 피하지 않았다면 닿았을 것이다. 그 순간은 오금이 저릴 정도로 불쾌감이 솟았다. 지금까지 다른 사람이 머리손질을 해 줄 때는 별 느낌 자체가 없었다. 그냥 머리를 하나보다, 뭘 붙이나보다, 그 정도가 최대의 감상이었다. 그런데 키에르트 이후로 특별한 느낌을 일으키는 사람을 또 만났다.
“……허락……, 할게요.”
키에르트의 손길을 가만히 느끼고 있으면 차분해졌다. 캄캄한 방 안에 홀로 켜진 촛불 같은 느낌이었다. 세상 다른 것은 아무래도 좋지만, 손길이 닿자 작은 콩닥거림이 촛불의 흔들림처럼 생겨났다. 이걸 정적이라 해야 할지 역동적이라 해야 할지 모를, 상반된 두 느낌이었다. 그러나 리시스는 두려웠다. 키에르트의 손을 잡는 것이 마냥 부끄러웠다면, 알헨크는 습격을 당할 때의 위기감이 몰려들었다. 그는 사람을 압도했다. 눈빛, 행동, 말투, 모두 친근하고 가벼웠지만 위압감이 느껴졌다.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불쾌감이 소름처럼 솟았다. 리시스가 진저리를 치며 어깨를 떨자 키에르트의 손이 멈췄다.
“싫은가?”
“아, 아뇨. 그게 아니라.”
“그럼?”
리시스는 눈앞에 멈춰 있는 키에르트의 커다란 손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이 손이 두렵지 않다. 기분 좋은 느낌, 따뜻한 온기만을 준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폐하가 머리를 만져주시는 게 기분 좋아서요.”
키에르트는 보이지 않게 뜨끔했다. 순수한 감상이었다. 그러나 키에르트는 그렇게까지 순수하지 않았다. 그 시커먼 속을 까맣게 모르는 리시스는 두 눈 가득 신뢰를 담았다.
“……내 손길에 기분이 좋다니 다행이군.”
“그래서 말인데요. 앞으로도 머리카락은 아무 때나 만지셔도 돼요.”
“응?”
리시스가 볼을 슬쩍 붉혔다. 키에르트도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싶어하고, 자신도 키에르트가 만져주는 것이 좋다면 허락이라는 과정 하나 정도는 생략해도 좋을 것 같았다.
“……아무 때나?”
키에르트는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이 믿기지 않아 되물었다. 리시스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온 확답에 키에르트의 두 눈이 커졌다.
“머리카락 정도는……, 지금까지도 매일 만져 왔고, 저도 익숙해졌고, 그러니까…….”
말 그대로다. 키에르트의 손길을 받는 것이 익숙해져서다. 전문가의 손길에 비하면 어설프고 허둥지둥했지만 그의 손끝은 언제나 따스했다. 온 정신을 리시스에게만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고는 했다. 이제는 아주 단편적인 순간순간의 기억만 남아 있지만 엄마가 머리를 빗겨줄 때 그랬다. 다정하고 따뜻한 손길. 잊고 살아 몰랐는데 그런 것에 목말라 있었나 보다. 이제 다시 받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욕심이 났다.
“……계속, 만져주세요.”
그래, 욕심이었다. 리시스는 처음 알게 된 마음의 정체를 떠올리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가 사람에게 욕심을 낼 줄도 알았구나. 언제나 필요에 의해 다가오거나, 의지하면 도망가는 사람뿐이었다. 사람은 언제나 멀리 있었다. 서로에게 욕심 낼 구석이 없을 만큼만 멀리. 그런데 어느 샌가 키에르트는 훌쩍 그 거리를 뛰어넘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언제든 돌아설 준비를 하고. 다가온 온기에 이미 갈증을 느껴버렸다.
“머리카락은 언제든 만져도 된다는 거지?”
키에르트가 다시 한번 확답을 요구했다. 그도 그럴 것이, 리시스의 첫 허락이었다. 팔베개는 베고 잘지언정 키에르트가 먼저 손을 대는 것에 대한 허락은 아직 떨어지지 않았다. 키에르트의 피가 조금 더 뜨끈해졌다. 손가락 하나 대지 않겠다던 계약이 변경되려 하고 있다. 앞으로는 과연 어디까지 허락받을 수 있을까. 키에르트는 모처럼 조바심이 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리시스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손길만큼은 지금까지와 다를 바 없이 신중했다.
“남녀노소에서 ‘남’은 뺄 걸 그랬어요.”
“음?”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손에 스스로 머리를 갖다대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마음이 편해지니 내심 솟고 있던 생각이 술술 말로 튀어나왔다. 평소엔 하지도 않는 투정을 다 부렸다.
“폐하의 손길이 편해져서 이제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겠다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막상 남자가 제 머리카락을 만지려고 하니까 거부감이 확 들었어요.”
“음……?”
“이렇게 부담스러울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여성만 모집한다고 써 놓을 걸. 괜히 면접비만 날리고, 지원한 사람들은 시간과 걸음만 날리고.”
“잠깐.”
쫑알쫑알 이어지는 리시스의 말을 키에르트가 막았다. 다른 건 다 그러려니 들어줄 수 있어도 이건 아니다.
“나도 남자야.”
“네? ……아, 하하. 폐하는 물론 ‘그 남자’에 포함이 안 되죠.”
리시스는 아직까지도 해맑게 웃었다. 키에르트는 남자지만 특별하게 분류되었다. 어떻게 알헨크와 똑같이 취급하겠는가.
“폐하는 쉬란에서는 그 누구보다 제게 안전한 사람이신 걸요. 그러니까 머리카락 정도는.”
“그 소리가 아닌데.”
키에르트가 다시 말을 가로막았다. 이번에는 리시스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키에르트가 이렇게 심상치 않게 말을 막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러니까 보통 남자가 아니라…….”
“남편이지. 아주 특별한 남자.”
“어…….”
그 말이 그 말이 아닌가? 리시스는 아직도 뜬구름을 잡았다. 남자가 함부로 자신을 만지려 하니 불편했지만, 키에르트는 특별한 존재라 괜찮다. 이 얘기가 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키에르트의 표정은 점점 더 음험하게 가라앉았다.
“황후가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나도 남자야.”
“네……, 성별이 남자는, 남자……, 시죠.”
그제야 리시스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뒤늦게 긍정했지만 이미 늦은 것 같았다. 키에르트의 얼굴에 깔린 어둑한 그림자는 가시지 않았다. 거기에 스산한 미소까지 얹혔다. 이상하다, 평소의 폐하답지 않은 얼굴이다. 낯설었다. 리시스는 지금까지 완전히 내려놓고 있던 마음을 슬그머니 하나씩 주워담았다.
“편하게 생각해주는 건 좋지만, 너무 무방비한 건 곤란해.”
“고, 곤란하시구나아…….”
“나는 그대의 ‘남편’이지 ‘친구’는 아니니까.”
“그, 그건 그렇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친구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어떻게 감히 키에르트를 친구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같이 음료수를 나눠먹고, 수학문제를 풀며 놀기도 했지만, 결코 친구였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남편이라고 의식했냐 물어보면 당당하지도 못했다.
“그, 그래도 친구처럼 군 적은 없다고 생각하는데요오…….”
괜히 죄를 지은 기분이라 리시스는 쪼그라들었다. 지금까지는 보통 이만하면 봐 주지 않았었나? 그러나 오늘의 키에르트는 왠지 모르게 끈덕졌다. 실제로 몸도 조금씩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 친구는 아니라니 다행이기는 한데.”
“도, 동맹이죠. 동맹!”
“그건 공적인 관계고.”
“부부관계도 공적인 관곈데요?!”
“그럼 사적인 관계는?”
키에르트의 얼굴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까워졌다. 리시스는 이제 질색하며 몸을 뒤로 물렸다.
“예? 예……? 아…….”
키에르트와 자신이 사적으로 무슨 관계가 있지? 당황해서 머릿속이 하얘진 리시스는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했다. 분명히 원하는 답이 있어서 이러시는 것 같은데……. 당황을 하니 아무리 똑똑한 머리여도 작동하지 않았다. 키에르트는 리시스와 코가 닿을 정도로 바싹 얼굴을 가져갔다. 입술이 닿을락말락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흡!”
너무 가까웠다. 리시스가 놀라 숨을 참았다. 그 사이로 달큰한 숨결이 샜다. 키에르트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그것마저도 얄미웠다. 원래 내 아내이지 않은가. 원래 이것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는 관계다. 그런데 고작 한다는 말이, ‘남자에 포함이 안 돼서.’라고? 리시스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흥분한 상태가 되니 저절로 꼬아 들렸다.
“그대와 나의 사적인 관계는 ‘남자’와 ‘여자’지.”
“예, 에?”
“맞잖아. 남녀관계.”
“아, 어.”
어버버하는 리시스를 노려보던 키에르트는 손만 움직여 머리카락 끝에 입술을 눌렀다. 리시스는 기함했다.
“폐하! 그건!”
“머리카락은 언제든 내 맘대로 만져도 된다며?”
“아니, 그건 만지는 게 아니라…….”
“입술로 만지는 거야. 뭘로 만지는지 제한하지 않았잖아?”
키에르트의 억지에 리시스는 어이가 없어 입이 막혔다. 이렇게 마음껏 생떼를 쓰고, 멋대로 구는 키에르트는 적응이 되지 않았다. 황당한 탓일 것이다. 가슴이 전쟁 직전처럼 쾅쾅 요동을 쳤다. 왜 자신은 이런 키에르트를 편하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잠깐 뭐에 홀렸었나보다. 아니면 알헨크 때문에 놀라서 정신이 없었던 것일 수도 있고. 아니지, 매일 밤 팔베개를 베고 같은 침대에서 잠도 잤는데. 그렇다면 키에르트에게 홀렸던 것이 분명하다. 홀릴 만한 얼굴이지 않은가.
‘내가 지금 뭐라는 거야!’
키에르트가 남녀관계니 뭐니 말을 해서 그렇다. 또다. 겨우 손잡을 만하니까 왜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어서. 키에르트는 머리카락에 키스를 한 뒤 조금 물러나 주었다. 공간이 생기자 바로 억울함이 밀려왔다.
“이건 관계를 위한 협조가 아니잖아요! 손도 겨우 잡았는데 이러시면 어떡해요! 아니, 왜 이러세요?”
날카롭게 따지는 리시스의 말에도 키에르트는 뻔뻔하고 태연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수컷의 눈빛이었다.
“자존심 상해서.”
“자존심……요?”
“내 부인이 오늘 처음 보는 놈을 남자니 뭐니 의식하는데, 그걸 남편인 내가 참고 있어야 하나?”
“……어…….”
그걸 또 그렇게 말하면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논리가 약해져버린 리시스가 어물거리는 사이, 키에르트가 선전포고를 날렸다.
“기대해, 다음 번 합궁.”
“예?!”
잊고 있던 행사를 키에르트가 꺼내들었다. 리시스는 머릿속으로 급히 다음 번 합궁날짜를 헤아렸다.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던 날짜보다 훨씬 가까웠다. 한 달에 한 번이 이렇게 자주 돌아오는 것이었나? 리시스는 창백해져서 오돌오돌 떨었다. 키에르트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아직도 변함없지만 안전한 사람인지에 대한 의문이 새로 생겼다.
“뭐, 뭐, 뭘 어쩌시게요?”
“기대하라니까.”
키에르트는 아주 못돼 보이는 미소를 씩 지어보였다.
“내가 남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안 들 수 없게 해 줄 테니까 각오하고 기다려.”
진짜 치사하게도, 그 미소조차 사람을 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