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제멋대로인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2022.02.06.
“알헨크?”
“어, 발음 잘하네.”
알헨크는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로구안은 다른 두 나라와 발음이 살짝 달랐다. 알헨크는 이름만 들어도 빼도 박도 못할 로구안 사람이었다. 그걸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로구안 사람인가?”
“그렇지. 로구안 출신인 것이 문제가 되려나?”
“어, 아니, 그건 아니긴 한데…….”
하지만 적잖이 당황하기는 했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실력만 보겠다 했다. 그 말은 진짜였다. 성별이 남성인 건 괜찮았다. 앞선 지원자 중 남성도 몇 있었다. 그러나 국적은 리시스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더구나 로구안 사람이라니.
“로구안 사람이 어떻게 쉬란까지 와서 일을 하려고 하지?”
“아 여행 중인데 경비가 떨어져서.”
“여행?”
대외적으로 전쟁 중이었던 것은 에드린과 쉬란이다. 로구안은 견제만 했을 뿐이지 대대적으로 전쟁을 벌이지는 않았다. 교역도 이루어지고 있고, 여행도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 다만 로구안은 물리적으로 멀었다. 최근 쉬란과 국경을 맞댄 나라들을 정복하며 가까워졌지만 원래라면 로구안은 한참 멀었다. 알헨크같이 전형적인 로구안 혈통을 가진 사람을 쉬란이나 에드린에서 보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응, 온 세상 떠돌아다니며 이것저것 배우기도 하고, 거기서 일해서 여행비를 때우기도 하고.”
“그럼 쉬란에서도 곧 떠나겠네?”
“오, 아니. 쉬란이 꽤 마음에 들어서. 만약에 되면 쫓아내실 때까지 일할 건데요?”
“아, 그래…….”
조건은 다 맞았다. 하지만 로구안 사람이라는 것이 치명적이었다. 얼마 전, 리시스의 목숨을 노린 암살자를 보낸 것 역시 로구안이었다. 현재 상황에서 가장 경계가 되는 대상이었다.
“그럼 지금은 어디서 지내?”
“렌데일 공작가에서 신세를 지고 있긴 한데, 일단은.”
“렌데일 공작가?”
리시스가 멈칫 놀랐다. 혹시 몰라 신원 확인이라도 분명히 하려 했을 뿐인데, 의외의 이름이 들려왔다. 알헨크는 과장되게 어깨를 들썩였다.
“어쩌다 보니. 아. 세니아라고 아나? 그 집 딸.”
천연덕스럽게 세니아의 이름까지 입에 올렸다. ‘세니아’라고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꽤 친한 느낌이었다. 리시스는 다시 한번 놀랐다. 귀족들도 세니아와 친분을 트기 위해 오만 아부를 다 떤다. 그런데 여행 다니는 외국인이 무슨 수를 써서 그 집에 신세를 지며 세니아와 친구처럼 지내는 것인가.
“어떻게 외국인이 그럴 수 있었지?”
“아아, 말을 하자면 길어지는데.”
“짧게.”
“로구안에서 찻잎을 좀 들고 와서 팔았는데 렌데일 공작이 흥미를 보여서.”
중간에 굉장히 많은 생략이 들어간 모양이다. 문장을 끝까지 말하지 않고 미묘하게 반말처럼 잘라 말하는 알헨크의 말버릇처럼 묘사도 과감하게 짧았다. 그래도 이해는 됐다. 찻잎 사업을 하는 세니아, 저 먼 로구안에서 들고 온 찻잎. 사업적으로 흥미를 가질 만한 요소가 있다면 잡아 둘 만도 했다. 길에 널리고 깔린 것이 로구안 사람은 아니니까.
“그럼 그 집에서 편하게 있지 뭐 하러 딴 집에서 일을 하려고?”
“그 집 사람 알면 분위기도 알 텐데? 손님도 지들처럼 빡빡하게 살라고 자꾸 눈치를 줘서.”
“아.”
황후조차 자기 식대로 조리하려는 세니아의 집안이다. 손님이라도 예외가 아닌 것이 매우 이해가 됐다. 리시스는 깊게 동조하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하지만 나는 쉬란이 너무 마음에 든단 말이지요. 여기서 오래 살고 싶은데, 그러려면 일이 있어야 하니까.”
“들어보니 이런저런 일을 닥치는 대로 다 하는 것 같은데, 나는 잡일 할 사람이 아니라 전문가를 원해.”
“그건 일단 시켜봐야 아는 것 아닌가?”
알헨크는 자신만만했다. 가넷처럼 챙겨 온 도구도 없이 맨손이었다. 그래도 자신감은 가넷 못지않았다. 알헨크는 걸음을 내딛는가 싶더니 어느샌가 슥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리시스는 갑작스럽게 너무 가까워진 거리에 흠칫 놀랐다.
“온 세상 다 돌아다닌 덕분에 어느 동네 유행이든 다 맞춰 줄 수 있는데. 어느 식대로 해 드릴까요? 타기온? 멧살? 에드린?”
귓가를 스쳐 머리카락으로 뻗는 손길도 빨랐다. 기척조차 느낄 수 없었다. 한 박자 느리게 리시스는 흠칫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알헨크의 손가락이 아슬아슬하게 머리카락을 스쳐 허공에서 멈췄다.
“왜 그러시지?”
알헨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그러나 리시스는 웃을 여유를 잃었다.
본능적으로 이 남자는 위험하다, 경고등이 반짝였다. 말은 여행자라 하지만 전혀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위험한 사람이었다.
“오늘은 이만…….”
“실력도 안 보고?”
알헨크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지만 더욱 밀착해 오는 기분이 들었다. 온몸이 꽁꽁 묶인 것처럼 숨이 조여왔다. 어디로든 도망갈 수 있는데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리시스의 심장이 콩당콩당 뛰었다. 쾅! 그때 창문에서 큰 소리가 났다. 조여들던 공기가 와장창 깨져내렸다. 알헨크도 리시스를 향하던 시선을 창문 쪽으로 돌렸다. 소리가 난 곳은 키에르트가 숨어 있는 커튼 뒤쪽의 창문이었다. 리시스의 심장은 다른 쪽을 향한 걱정으로 다시 덜컹거렸다. 키에르트가 거기 있는 걸 들키면 어떡하지? 알헨크가 혹시 키에르트에게 이상한 짓이라도 하면?
“아하, 호위가 저기 숨어 있었구나?”
다행히 알헨크는 빙긋 웃으며 한 걸음 물러섰다. 거리가 멀어지자 숨통이 트였다. 리시스는 숨을 몰아쉬면서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길로 키에르트가 있는 쪽의 창문과 알헨크를 번갈아보았다. 혹시 알헨크가 돌발행동이라도 할까 염려가 되었다.
“내가 뭘 어쨌다고. 그냥 일 하려고 했던 건데요.”
알헨크는 두 손을 들어보이며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제야 리시스는 왜 자신이 위기감을 느꼈는지 깨달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부터 이질감이 있었다. 다른 면접자들은 아무리 자신감이 있어도 긴장을 했다. 적어도 진심으로 일자리를 잡으려는 절실함이 있어서였다. 알헨크는 그런 것이 없었다. 지나치게 여유 있었다. 면접관은 리시스인데 본인이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었다. 그게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말투도 애매하게 끝을 줄이는 반존대였다. 거의 대부분은 반말이었다. 그것도 자연스러워 느끼지 못했다. 적어도 리시스가 채용을 하는 사람이고, 아무리 가난한 귀족인 척을 해도 평민보다는 높았다. 알헨크는 그런 것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람에게 하대를 하는 것이 익숙한 사람이었다.
“……당신, 뭐 하는 사람이야.”
“말했잖아요? 여행자라니까?”
“아닌 것 같은데.”
리시스가 끝까지 의심을 거두지 않자 알헨크는 픽 웃었다. 의심을 하거나 말거나, 별 상관없다는 투였다. 다시 한번 확신이 들었다.
“진짜로 취업할 생각도 없었던 것 같은데.”
“아, 뭐 꼭 모든 사람이 그렇게 심각하고 진지하게 살아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나? 아니면 ‘사람 머리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기분을 즐기는 분이라?”
알헨크는 불쾌할 정도로 ‘사람 머리 꼭대기’를 힘주어 말했다. 빙글빙글 웃음이 얼굴을 맴돌았다. 놀림과 비웃음 사이의 미소였다.
“하도 궁금해서 구경차 와 본 것이 맞긴 하지.”
“……궁금해?”
“다 쓰러져 가는 반데스 남작 가문에서 보수 상관없이 꾸며줄 사람을 구한다니. 그것도 남작 가문 직계도 아닌, 저 시골에서 살다 올라온 먼 친척 언니가?”
혹시나 귀족과 관련된 사람이 올 수도 있어서 짜 놓은 설정이었다. 간혹 귀족 가문에서 일을 했던 면접자들도 있기는 했다. 그들 중에서 이 설정에 이의나 의문을 제기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럭저럭 괜찮은 설정이었다. 누가 남작가의 사촌 사정까지 외우고 살겠는가.
“그럴 수도 있지. 중요한 일이 있어서.”
“집 입구부터 숨어 있는 호위에, 사방에 호위들이 주렁주렁. 방 안에까지 비밀 호위가 대치하고 있는 시골 아가씨라.”
그걸 눈치 챈 면접자는 알헨크가 처음이었다. 리시스의 표정이 다시 굳었다. 호위의 배치는 제롬과 미하엘이 머리를 맞대고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다. 공간이 작은 만큼 보다 완벽하게 숨길 수 있었다. 그런데 그걸 다 간파당했다.
“남작 가문의 여식은 분명히 황후의 시녀로 들어갔다 들었는데. 굳이 시골의 사촌 언니가 수도의 집을 빌려 사람을 뽑는다.”
“…….”
“뭐, 그럴 수 있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포된 의미가 아플 정도로 저리게 들려왔다.
‘다 들켰어.’
리시스는 알헨크가 어떤 사람인지 아무것도 몰랐다. 이쪽은 눈을 가리고 상대는 알몸을 바라보고 있는 형국이었다.
“운 좋으면 취업이 돼서 다른 집 구경도 좀 해 볼 수 있을까 해서 왔는데, 이런 분위기면 탈락인가?”
“응.”
“결과 참 빨리 나오네.”
미련 없는 대답이었다. 역시 취업에는 미련이 없던, 본래의 목적이 다른 곳에 있던 면접자였다.
“그러다 내가 합격시켰으면?”
오히려 그것이 알헨크에게는 허점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알헨크는 이번에도 쉽게 대답했다.
“일 좀 해 주는 거지 뭐. 아주 쉬란의 사교계를 싹 엎어버릴 스타일의 개척자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아까운 기회 놓친 거야.”
끝까지 허세인지 진실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자기소개는 포기하지 않았다. 알헨크는 친구 집에라도 들렀던 것처럼 가볍게 퇴장했다.
“그럼, 또 기회가 있을때 뵙지.”
리시스의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알헨크는 문을 나서버렸다. 얼이 빠져서 멍해졌다. 함께 있는 동안 내내 신경이 알헨크에게만 매달려 있었다. 이제야 툭 끊기듯 떨어져내린 신경줄이 얼얼했다. 이제야 방을 가득 채웠던 알헨크의 영향력이 사라졌다.
“또 기회라니, 그게 뭐야.”
리시스는 맞은 듯 머릿속이 얼얼했다. 정말 정신없이 휘몰아쳤던 면접이었다. 더 이상 면접자를 받아들일 집중력도 없었다. 나머지 면접자는 돌려보내라고 지시한 뒤, 리시스는 키에르트가 숨은 커튼을 열었다.
“폐하?”
“괜찮나.”
키에르트는 얼굴에 먹구름이 잔뜩 낀 상태였다. 리시스의 얼굴을 마주보는 눈빛이 날카롭고 무거웠다. 커튼 뒤였지만 알헨크의 위협적인 분위기는 키에르트에게까지 닿았다.
“예사 놈이 아니었어.”
“그렇죠?”
“어쩌면 본인이 암살자일 수도 있고.”
리시스도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 예사롭지 않은 움직임. 적어도 단장을 도와주는 사람이 보일 움직임은 아니었다. 만약 알헨크가 그 순간 리시스의 목을 노렸다면? 이미 아래에서 하인으로 꾸민 시종과 친위대들이 신체검사를 마치기는 했다. 하지만 꼭 무기가 있어야만 사람을 해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아찔할 정도로 위험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반대로 이쪽에서 그 뒤를 따라가면 뭐가 나올 수도 있겠네요.”
리시스는 위기에서도 재빨리 다음을 떠올렸다.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 후회보다는 거기에서 뭘 뒤집어야 이익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를 계산하는 것이 낫다.
“아까 따라 나가도록 창문 밖으로 지시해 놨어.”
역시 키에르트도 척척 알아서 하는 똑똑이였다. 리시스는 처음으로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그러자 키에르트가 손을 뻗었다.
“폐하?”
키에르트의 손끝이 리시스의 옆머리에 닿았다. 알헨크의 손이 닿을 뻔했던 곳이었다. 리시스가 키에르트를 올려다보았다. 제멋대로인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허락도 받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