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소년이 첫사랑에 빠지는 순간처럼2022.02.03.
“다음, 들어오세요.”
“네!”
뜻밖에 면접 희망자가 많았다. 약속된 시간이 되자 몰려든 면접 희망자는 로비에 가득 찰 정도가 되었다. 리시스가 내건 공고는 다음과 같았다. ※ 머리단장, 화장 도와주실 분 ※ 어여쁜 귀족 아가씨의 단장을 도와주실 분을 모집합니다! -저택에서 숙식 가능하신 분 -급여 잘 쳐드림 -실력에 따라 연봉협상 가능 -남녀노소 가리지 않음 리시스의 작전이 파격적이었던 이유는 마지막, 남녀노소 가리지 않음에 있었다. 원래 황후의 몸단장 시중은 적어도 귀족이어야 했다. 지금까지 하녀들이 도왔지만 그들도 어지간히 궁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라 그럴 수 있었다. 갑자기 황후가 남녀노소, 신분 가리지 않고 사람을 뽑는다 하면 온 세상 사람이 다 모일 터다. 그중에는 암살자도 있을 테고, 귀족 가문의 첩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남루한 가문의 아가씨의 구인공고에 주목할 사람은 없다.
‘그 중에 진짜 실력자 한둘쯤은 있겠지!’
리시스의 계산은 그랬다. 그리고 의외로 그 계산은 잘 맞아떨어져가고 있었다. 이미 귀족들과 거래를 트고 있는 사람을 제외하면 이제 막 일을 시작한 사람이거나 연줄을 타지 못한 사람일 가능성이 있었다. 실제로 오늘 모인 사람들은 귀족가에 선을 대겠다는 야망으로 이글이글 불타는 사람들이었다.
“저는 제 두 손만으로 자식 세 명을 키워냈습니다!”
“아……, 자식들은 다 성인이고?”
“7살, 5살, 3살인데요.”
“그……, 그럼 숙식하기 어렵지 않아?”
“애들이랑 같이 하면 안 돼요?”
야망이 끓기는 하는데 현실적인 문제도 꽤 많이 부딪쳤다. 남편은 어디서 뭘하고! 리시스는 불을 한 번 뿜은 뒤, 도망갔다는 말에 면접비를 톡톡히 쳐서 돌려보냈다. 이런 경우가 몇 번 반복되던 중, 진짜가 나타났다.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기 죄송한 말입니다만, 미리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계속 함께 일할 사람을 구하시는 것 같아서.”
“음? 뭔데?”
“저는 귀족입니다.”
오. 이건 진짜 놀라웠다. 리시스는 얼른 지원서류를 들여다보았다. 이름은 가넷, 외곽의 저택가에서 살롱 ‘민들레처럼’을 운영하고 있음. 본인의 가게까지 운영하고 있으니 신분은 확실한 사람이었다.
“가게도 운영하네?”
“예, 가문이 망해서 제가 일해야 합니다.”
가넷은 망했다는 말도 당당하게 했다. 가문이 망했을지언정 자신의 인생은 망하지 않았다는 포부가 느껴졌다.
“그렇구나. 귀족이라는 건 알아 두고.”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이건 부탁드리고 싶은 겁니다만.”
“음?”
“저는 언제고 황후궁에 들어갈 겁니다.”
리시스는 사레가 들릴 뻔했다.
“화, 황후궁?”
“예, 저는 실력 하나로 황후궁까지 올라갈 겁니다.”
“……아.”
허멀 후작이나 세니아의 예가 있듯, 쉬란에서는 귀족들도 직업을 가진 경우가 왕왕 있었다. 미용업에 종사하는 사람도 물론 있었다. 귀족이니 생계를 위해 일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명성을 위한 것 반, 취미가 반이다. 그러다 보니 서로가 서로를 소개해주는 방식으로 취업시장이 돌아갔다. 그 연줄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황후궁에 들어가는 것도 귀족 가문을 거쳐야 가능한 일. 귀족 가문조차 들어가지 못한 상태에선 그저 먼 꿈에 불과했다. 열정이 가득 담긴 대답에 리시스는 비로소 가넷의 뜬금없는 선언을 이해했다.
“그런데 지금은 황후궁에 들어가도 명성에 크게 도움이 되진 않을 수도 있는데……?”
리시스는 귀족들에게서 소외당하는 황후였다. 그게 진짜 명성으로 이어질까 의문이 들었다.
“일단 들어가서 생각하겠습니다.”
황후궁을 향한 지원자의 의지는 단호했다.
“어, 으응…….”
실력만 괜찮다면 당신은 황후궁으로 직진을 하게 될 거야. 본인이 원한다 했으니 나중에 딴소리도 없겠지.
“좋아, 언제든 들어갈 기회가 되면 허락할게.”
“……정말이십니까?”
“응, 그만큼 실력만 있다면.”
지금까지는 조건이 맞지 않는다든가 영 수상쩍어서 면접에서 돌려보냈던 사람투성이였다. 조건은 딱 맞았다. 남은 건 실기뿐이다.
“그럼 실력을 보여줄 수 있을까?”
“물론입니다.”
가넷은 미리 준비해 온 재료상자를 촤라락 펼쳤다. 면접만 보러 왔지만 실기까지 완벽하게 준비해 온 준비성에 가산점이 들어갔다. 리시스는 기대감을 한가득 품고 몸을 맡겼다. 키에르트에게 부탁했을 때는 가끔 삐그덕, 덜커덕 거리는 느낌이 있었다. 앨린도 마찬가지였다. 가넷은 손이 닿았나 안 닿았나 헷갈릴 만큼 부드러운 손길로 리시스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오늘은 어차피 면접 때 실기 테스트를 보려고 편한 행색으로 왔다. 늘 곱게 단장하는 귀족 아가씨들에 비하면 힘들 수 있었다. 그러나 가넷의 손길은 거침없었다.
“이 정도면 어떠십니까.”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리시스는 헉 놀랐다. 자신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황후궁의 하녀들이 모조리 달라붙어 만들어 줬던 것과 차원이 달랐다.
“이게……, 나?”
리시스는 거울을 보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눌렀다. 까마귀가 실수로 물어갈 정도로 반짝거리는 키에르트라면 모를까, 자신이 이렇게 반짝거리게 될 줄은 몰랐다. 리시스의 반응에 가넷은 의기양양하게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급해서 최소한으로만 했습니다.”
여유만 있으면 몇 배는 더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확신까지 완벽했다. 리시스는 당장 고용!을 외치고 싶었지만 일단 참았다. 자신의 안목은 썩 훌륭한 편이 아니었다.
“실력은 잘 보았고, 연락은……, 이 쪽으로 하면 되나?”
“예, 기다리겠습니다.”
“응, 고생했으니 면접비에 조금 더 얹어 줄게.”
리시스는 이번에도 면접비에 시술비까지 두둑하게 얹었다. 돈주머니를 받은 가넷은 그 무게에 순간 움찔했다. 어림짐작해도 엄청 많았다.
“……혹시 주머니를 잘못 주셨습니까?”
양심적으로 꿀꺽하기에는 너무 많은 금액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거지가 아니다. 가난해도 능력만으로 인정받고 싶다는 자존심이 있었다.
“응? 아니? 모자라?”
“……아니, 좀 많은 것 같아서요.”
“그게 많아?”
리시스도 꽤 배짱이 두둑해졌다. 쉬란에 온 후 돈의 단위가 달라졌다. 공주였을 때는 엄두도 못 냈을 액수도 이제는 적은가? 한 번 더 고민하게 되었다. 반면 가넷은 혼란스러워졌다. 저택도 그렇고, 행색도 그렇고, 여유로워 보이지는 않았는데. 이런 식으로 공고를 내 사람을 구하는 귀족 아가씨는 돈 많은 집안의 사람일 리가 없었다. 당연히 리시스도 그런 줄 알았다.
“가넷 양의 능력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지.”
리시스는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
그 모습에 가넷의 심장이 움직였다. 실력에는 언제나 자신이 있었다. 단지 실력을 펼칠 기회를 얻지 못했을 뿐이다. 자존심은 현실이 따라가지 못하니 더욱 단단하게 똘똘 뭉쳤다. 리시스의 한마디는 상처로 얼룩덜룩한 자존심을 한 번에 치유해 주었다. 어디든 귀족가에 들어가기만 하면 발판 삼아 최고의 위치인 황후궁까지 들어가고야 말리라, 생각했던 독한 마음 한 귀퉁이가 녹기 시작했다. 만약에 황후궁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겨도, 자신만큼 능력 있는 사람을 찾아다 줄 때까지는 조금 더 일해줘도 괜찮겠다. 아직 채용이 결정된 것도 아닌데 상상은 혼자 저 멀리 날아갔다.
“그럼, 조심히 가고.”
리시스는 울컥해서 표정이 이상해진 가넷을 돌려보내고 커튼 뒤의 키에르트를 찾았다. 처음으로 조건이 맞는 사람을 찾았으니 이제 다른 사람의 심사를 들을 때였다. 키에르트에게 보여주기 전, 한쪽 의자에 인형처럼 앉아 있던 앨린이 먼저 호들갑을 떨었다.
“저 사람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폐하의 의견도 여쭤봐야지.”
리시스는 두꺼운 커튼을 열어젖혔다. 창문 한쪽을 가리던 커튼이 밀리며 밝은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벽에 기대서 있던 키에르트는 잠시 눈이 부셔 눈을 깜빡였다. 점점 밝아지는 시야에 리시스의 얼굴이 한가득 들어왔다. 처음에는 부옇다가 점점 선명해졌다. 그리고 선명해질수록 키에르트의 가슴이 부풀었다.
“……!”
이윽고 또렷이 리시스의 얼굴이 보인 순간. 키에르트는 숨을 삼켰다. 숨을 쉬어야 한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렸다. 리시스는 원래도 예뻤다. 귀엽기도 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황후로서 필요한 미적 할당량은 충족했다. 그런데 그 이상이 있었다. 사람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었나?
“왜요, 이상해요?”
넋을 놓은 키에르트의 반응에 리시스는 초조하게 물었다. 이제는 대충 보아도 표정이 구분되지만 아주 가끔 무슨 뜻인지 모를 때가 있었다. 지금이 딱 그랬다.
“아니, 이상하……, 아, 이상한가.”
“이상해요?!”
키에르트는 횡설수설했다. 소년이 첫사랑에 빠지는 순간처럼.
“이상할 정도로 눈이 부셔.”
“어머.”
곁에서 듣고 있던 앨린이 먼저 반응했다.
“어머, 어머, 어머머. 저는 다음 면접자 확인하러 갈게요.”
그리고 눈치 빠르게 자리를 비워주기까지 했다. 리시스는 한 박자 느리게 끼긱끼긱 어색하게 눈을 돌렸다. 키에르트가 너무 빤히 쳐다보고 있어서 민망했다.
“……예뻐.”
자신의 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을까 봐 걱정이라도 된 걸까. 키에르트는 재차, 다른 말로 자신의 의견을 표현했다.
“아, 알겠어요.”
“원래도 예쁘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그 이상 예뻐질 수도 있는 걸 지금 처음 알았어.”
“그만, 그만!”
키에르트의 의견은 충분했다. 리시스는 얼굴이 빨개지다 못해 귀에서 빨간 물이 뚝뚝 떨어질 지경이 되었다.
“의견을 묻던 것 아닌가?”
“충분해요!”
리시스는 키에르트를 다시 커튼 뒤로 밀어넣고 손부채로 얼굴을 부쳤다. 키에르트 때문에 뭔가 간지럼증이라도 생긴 것 같다. 키에르트랑 있으면 때때로 몸이 간질간질했다. 어떤 때는 코 밑이, 어떤 때는 발바닥이 간지러웠다. 얼굴이 빨개지고 입술이 들썩일 정도였다. 막상 긁고 싶은 곳은 없는데, 몸 안에서 간지러움이 솟구치듯 견딜 수 없었다. 지금도 그랬다. 간질간질. 봄바람에 흩날린 홀씨가 콧잔등에 앉은 것 같았다.
“다음!”
빨리 다음 사람이 들어오면 최소한 환기라도 될 것 같아 서둘렀다.
“다음 사람 들여요?”
면접자 보러 간다더니,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앨린이 문틈으로 고개를 쏙 내밀며 물었다. 예의상 자리를 피해 줬지만 달큰한 연애의 맛을 실시간으로 구경하고 싶은 마음은 억누를 수 없었다.
“빨리, 다음.”
리시스의 성화에 앨린이 시종에게 다음 면접자를 들이라고 말했다. 잠시 후, 방문을 노크하고 다음 면접자가 들어왔다.
“……!”
리시스는 예상하지 못한 지원자의 등장에 살짝 놀랐다. 지원자는 이전에 들어왔던 사람들과 많이 달랐다. 지원자들은 대체로 비슷했다. 주눅이 들어 눈치를 보거나, 필요 이상으로 당당하고 뻔뻔하게 굴거나. 어쨌든 긴장이 되니까 그런 모습을 보였다. 이 지원자는 달랐다. 낡고 좁은 반데스 남작가의 방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외모를 가졌다. 까마귀 같은 검은 머리카락, 검은 눈동자. 살짝 어두운 피부색. 로구안 사람 특유의 외모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알헨크라고 합니다.”
그는 이 자리의 왕인 것처럼 여유롭게 인사를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