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한 이불, 팔베개2022.01.27.
세니아를 뒤집어 놓은 리시스의 계획은 황후답지 않았다. 태어나 보니 공주, 살다 보니 황후가 되지 않아서 더 그럴 수도 있었다. 리시스의 계획은 키에르트에게는 신선했다. 그러나 귀족으로 태어나고 자란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함시켰다.
“저, 저, 저희 집 말씀이세요?”
앨린은 청천벽력이 떨어진 것처럼 떨었다. 당분간 황제궁에 출입할 일은 없을 줄 알았다. 갑작스러운 소환에 일단 입궁하고 보니,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가 나란히 자신을 맞았다. 황후 폐하는 이제 좀 편해져서 적당히 개길 수도 있지만 황제 폐하는 아니다. 그런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 지엄하고 지고하신 황제 폐하의 옆에 앉은 황후 폐하께서 명하셨다.
“응, 황후궁의 하녀를 싹 다 다시 뽑는 것도 힘들어서. 당분간 황제궁에서 지내면서 몸단장 도울 하녀만 뽑기로 했어.”
“하녀의 선발은 보통…….”
하녀장과 시종장이 추리고, 최종 결정은 시녀가 한다. 하지만 지금은 하녀장이 공석이다. 리시스의 유일한 시녀인 앨린은 자기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가 화들짝 놀랐다.
“제, 제가 해야 하는 건가요?!”
“할 수 있겠어?”
“아니요!”
앨린은 자신의 한계를 잘 알았다. 못 하는 걸 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은 암살 사건까지 얽혀서 하녀들의 보안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할 때다. 그만큼 책임감 있게 하녀를 뽑아 하는데 앨린은 자신이 없었다. 하녀들의 뒷조사를 하고 평판을 듣는 것도 다 사교계의 권력과 재력이 있어야 한다. 리시스도 거기까지는 제롬에게 들어서 알았다.
“응, 쉽지는 않다고 들었어. 역시 쉬운 일이 없더라.”
“네에, 지금까지 일했던 하녀들도 엄청 선발해서 뽑아 들어온 사람들이긴 한데요…….”
황후가 없는 기간 동안 시녀도 부재했다. 그동안 일을 그만둔 하녀를 대신 뽑을 사람은 필요했고. 그걸 맡은 건 선대 황후의 시녀였던 사람들이었다. 질책할 윗사람이 없으니 책임감 없이 일하게 되는 건 사람의 당연한 마음이었다.
“아예 시녀를 더 뽑을까 생각도 했지만, 그것도 일이잖아.”
귀족들 중에서 사람을 뽑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앨린만 해도 황제궁에 출입하는 것이 힘들어 휴직 중인데, 매일 아침마다 출퇴근할 사람을 찾는 것은 더 힘들 것이다. 지금의 리시스라면 할 사람을 구하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 사람이 곁에서 무슨 짓을 할지, 얼마나 충성할지는 미지수다. 안 그래도 암살 시도로 인해 불안정한 상태다. 더 이상 불안한 요소와 신경 쓰일 일을 늘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딱 일만 할 사람을 뽑기로 했어.”
“어떻게요?”
“아예 신분과 관계없이 능력만 보며 뽑는 거야. 그리고 내가 누군지도 숨겨서 일에 대한 의욕만 보는 거지.”
앨린은 한 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귀족 세계에서 인력 선발이란 능력도 중요하지만 추천이 가장 중요하다. 부엌에서 설거지만 하는 하녀를 뽑아도 어느 가문에서 얼마만큼 일했는지, 전 주인의 추천서가 있는지가 크게 작용했다. 하다못해 가문에서 지금 일하고 있는 하녀 친구라도 있어야 발이라도 디밀어 볼 수 있었다. 리시스의 제안이 너무 파격적이라 사고가 따라갈 수가 없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그냥 뽑으시겠다고요? 그 사람을 궁에 들이고요?”
“능력이 있으면 이미 사람들에게 유명하겠지. 그보다 확실한 신원보증이 어디 있어.”
“그게 그렇게 생각하면 그런 것 같긴 한데요…….”
여태 생각도 안 해본 일이라 현실감이 없다. 여전히 이해가 잘 안 되긴 하지만 잘 생각해보니 결론은 하나로 났다.
“그럼 저는 할 일이 없겠네요?”
“아니? 중요한 일이라고 해야 하나……, 부탁할 것이 있는데.”
“뭔데요?”
“집 좀 빌려줘.”
“……네?”
“황후라고 이름 걸고 모집하면 너무 부담스러울 거 아냐. 그러니 평범한 귀족인 척하고 뽑으려고.”
“그런 사람을 결국 황실에 들이시겠다고요?”
리시스의 부탁은 갈수록 말이 안 되었다. 앨린은 한 사람이라도 제발 이성을 차려주길 바라는 마음에 키에르트를 돌아보았다. 적어도 귀족 사교계에 훤한 황제 폐하라면 지금 리시스가 하는 말이 얼마나 황당한지 알 것이다. 그러나 키에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창의적인 작전엔 협조가 필수지.”
“예?”
“그대가 리시스를 잘 보필한다 들었다.”
“그렇긴 한데요.”
“잘 해주길 바란다.”
앨린은 혼자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것 같은 고독감에 휩싸였다. 왜 같은 말을 쓰는데 도무지 알아먹을 수가 없단 말인가. *** 키에르트는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긴 머리카락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빗으로 슥 빗어내리면 빗의 모양대로 갈라졌다가 물결처럼 모여드는 모습이 봐도 봐도 질리지 않았다.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리시스의 단장을 돕는 것이 익숙해졌다.
리시스는 이제껏 없었던 새로운 방식으로 황후의 시중을 들 사람을 물색하겠다 선언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앨린의 협조와 여러 준비가 필요했다. 새로운 하녀를 뽑는 작전 날짜는 내일로 다가왔다.
“오늘로 이것도 끝인가.”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감사했고요.”
황제를 단장 하녀로 써먹은 황후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리시스는 깍듯하게 감사를 표했다.
“고생은 무슨.”
키에르트는 아쉬운 마음을 숨기며 빗을 내려놓았다. 저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마음껏 만질 수 있는 권리를 빼앗기는 기분이었다. 키에르트의 단장 실력은 대외적으로 선보일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하녀는 반드시 뽑아야 했다.
“아쉬운 실력을 참아주느라 그대가 고생했지.”
“폐하는 손길이 부드러우셔서 좋았어요.”
“……좋…….”
키에르트의 어깨가 움찔했다. 좋았다고? 더 해줬으면 좋겠다는 말인가? 그저 예의상 하는 칭찬에 가까운 말이었는데 키에르트는 크게 오해했다.
“더 빗겨줄까?”
“예? 아뇨, 자야죠. 지금까지 해 주신 걸로도 충분해요.”
“……아.”
“……? 아.”
키에르트의 아쉬움을 리시스도 알아차렸다. 더 만지고 싶다. 키에르트의 마음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리시스의 귓가에 생생히 들렸다. 리시스도 순간적으로 갈등했다. 키에르트의 손길은 기분이 좋았다. 모르는 척 조금 더 부탁해 볼까? 하지만 만지고 싶어하는 남자의 욕망은 두렵기도 했다. 같은 침대를 쓰고 있는 것이 벌써 며칠 째다. 그동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평소처럼 평화로운 밤이 찾아왔다. 신방의 계약은 아직 이어지고 있었다. 키에르트가 쌓아 놓은 믿음은 꽤 단단해졌다. 리시스는 큰마음 먹고 마음의 빗장을 하나 내려놓았다.
“저, 그럼 조금…….”
“이제 눕지.”
그러나 그것도 시간 문제였다. 리시스가 말을 겨우 꺼낸 순간, 키에르트가 취침을 명했다.
“음? 뭐라고?”
동시에 말이 튀어나와 제대로 듣지 못한 키에르트가 되물었다.
“아뇨. 아뇨. 아아뇨.”
“조금 뭐라고 했잖아.”
“아, 조금 졸리다고…….”
빗겨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혼자 멀리 가버렸다. 넘어진 사람에게 손 내밀었는데 청혼받은 양 팔짝거린 것이나 뭐가 다른가. 이미 결혼은 했지만. 리시스는 붉어지려는 얼굴을 들키기 싫어 얼른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키에르트도 이제는 익숙하게 리시스의 곁에 몸을 눕혔다. 그리고 평소처럼 팔을 내밀었다.
“오늘은 그냥 잘 건가?”
“……아.”
부끄러운 나머지 늘 자는 자세도 잊었다. 첫날 이후 두 사람의 취침자세는 고정되었다. 추가 암살시도가 없어 슬슬 제롬이 방에 시중을 위해 들어오기도 해서 팔베개를 한 채 자는 것이었다. 손을 잡는 것보다 부담도 적고, 무엇보다 편했다. 늘 키에르트가 팔을 내밀면 기다렸다는 듯 답싹 베고는 했던 리시스다. 하지만 오늘은 좀 미적미적 몸을 굴렸다.
“어디 불편해?”
“아뇨, 불편한 건 아니고…….”
“불편한 곳이 있으면 말해.”
키에르트는 쉽게 넘어가주지 않았다. 결국 리시스는 없는 고민도 만들어 생각해 내야 했다. 마침 떠오르는 생각이 있기는 했다.
“암살자는 어떻게 됐어요?”
“더 얻어낼 정보가 없어 처분했지.”
“처분…….”
서늘한 단어였다.
“보통 암살자를 잡으면 어떻게 처리하세요?”
“결국은 죽이지.”
키에르트는 건조하게 대답했다.
“암살자는 인질로서의 가치도 없으니까. 보통은 죽이지 않나?”
“아……, 안 죽이기도 했어요.”
“안 죽였어?”
키에르트는 놀랐다. 암살자는 모기 같은 존재였다. 살려둬 봤자 쓸모도 없고, 귀찮기만 한.
“살려둔 채 계속 가둬 둔 건가?”
“일 시켰어요.”
“……응?”
“그러다 투항하면 받아주고.”
전혀 상식적이지 않은 처리법이었다. 자신을 죽이려 든 암살자를 굳이 살려서 일까지 줬다고? 솟구치는 호기심에 키에르트는 자려고 감았던 눈까지 다시 뜨고 리시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어릴 때 기억에 엄마가 그랬던 것 같아요.”
“엄마? 에드린 왕비를 말하는 건 아니지?”
“네, 친엄마. 엄마랑 열 살 때까진 같이 살았었거든요. 숲속 오두막에 살았는데……, 그때도 암살자가 찾아왔었어요.”
암살자는 비싸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함부로 암살자를 보낼 수 없을 정도로. 경제적인 이유 외에도 실패했을 때의 역효과도 크다. 암살자가 자기 살자고 정보를 술술 불어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무슨 수를 써서든 죽여버리고 싶은 상대이거나, 전략적으로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경우에만 암살자를 보냈다. 리시스의 엄마는 에드린 왕이 한 번 건드렸을 뿐인 시골 처녀였다. 목표가 되기에는 미약한 상대였다.
“누구를 노린 거였지?”
“엄마였던 것 같은데요. 제가 숲에서 놀 때 암살자가 저한테 길 물어본 적도 있었거든요.”
목표물이었다면 인상착의를 모를 수가 없다. 가는 김에 애 하나 더 죽여달라, 이런 식의 의뢰도 불가능하다. 사람 죽이는 것이 장난인가. 아무리 애라도 쉽지 않다. 한 명분의 의뢰비가 추가된다. 그러니 리시스의 엄마만 노렸던 것은 분명했다.
“정확하게 어떻게 됐었는지는 모르는데, 분명히 엄마를 공격했던 아저씨가 저녁엔 장작 패고 있더라고요.”
“그 중간에 너무 많은 것이 생략된 것 같지 않아?”
“저 다섯 살 때 일인데…….”
“아…….”
다섯 살이었으면 그때에도 충격적인 일이라 그나마 기억하는 것일 테다. 더 이상 물어볼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만 모아보아도 리시스의 엄마는 예사 사람이 아니었다. 리시스의 말도 안 되게 창의적인 작전의 탄생 과정이 얼핏 보이기도 했다. 과연 암살자를 구워삶아 머슴으로 써먹는 사람의 딸이었다.
“그럼 그대에게 암살자가 보내진 건?”
“전쟁터에서였어요. 그 전에 궁이나 여기저기 돌아다닐 때는 그냥 맞기만 했는데.”
“……맞아?”
키에르트는 귀를 의심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