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사실은 연약한 황후랍니다2022.01.23.
“로구안이네?”
“!”
암살자의 목숨이 끊어지기 직전, 정말 짧은 순간이었다. 리시스의 한 마디에 방 안의 움직임이 쨍하니 얼었다. 헐떡대며 숨이 넘어가던 암살자마저도 멈췄다. 그 멈춤은 결정적인 긍정의 의미였다.
“암기에 남은 손자국이.”
리시스는 넘겨짚은 것이 아니었다. 암기에 남은 흔적을 보고 정확하게 짚어냈다. 대충 찔러보기 식이 아니라서, 미하엘의 눈빛도 순식간에 바뀌었다.
“……로구안이었나?”
“아, 으아! 아아!”
들켰다는 것을 깨달은 암살자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죽을 때까지 흔들리지 않게 온갖 교육을 받았어도 죽기 직전의 순간, 허점을 찔린 순간까지 완벽하게 숨길 수는 없었다. 가장 중요한 정보를 확인했으니 심문은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거, 곱게 죽여드릴 수 없겠군. 폐하, 시간이 좀 걸리겠습니다.”
미하엘이 목과 손목을 풀며 흘러내린 앞머리를 걷어올렸다. 목숨을 이어붙여서라도 끝까지 알아내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보였다. 암살자는 차라리 죽여달라며 발악했다. 어림없었다. 이전보다 한 차원 높아진 폭력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지켜보고 있기 어려울 정도였다. 메슥거리는 속을 참아 삼키는데, 키에르트가 리시스의 어깨를 안았다.
“한참 걸릴 것 같으니 우리는 이만 나가지.”
“……네.”
살았다. 리시스는 끝까지 꼿꼿한 자세로 방을 나섰다. 키에르트는 리시스가 혼자 잘 걷자 바로 손을 떼고 뒤따랐다. 방문을 지나자마자 방 안의 피에 절어든 공기가 확연히 비교되어 느껴졌다. 바로 전까지 들이마셨던 숨에 피와 꿉꿉함이 섞여 있었다고 생각하니 속이 참을 수 없이 울렁거렸다.
“……웁.”
등 뒤로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거의 동시에 리시스는 벽을 짚으며 비틀거렸다. 입을 틀어막는데 신물이 올라왔다.
“황후?”
벽이라 생각한 것은 키에르트의 몸이었다. 그러나 손을 뗄 수도, 사과를 할 수도 없었다. 그럴 짬도 없이 눈앞이 핑 돌았다.
‘나 사실 연약했나 봐.’
리시스는 평생 몰랐던 자신의 일면을 하필 이럴 때 발견했다. 조금 더 스스로의 몸과 정신을 소중히 해야겠다 마음먹었을 때는 세상이 기울어지고 있었다. 겨우 토하지는 않았지만 한계까지 참았던 정신은 아예 세상을 차단시키는 쪽으로 해결법을 찾아버렸다.
“리시스!”
당황한 키에르트의 외침이 귀에 울렸다. 하지만 대답은 할 수 없었다. 까만 침묵이 눈과 귀를 덮었다. ***
“으…….”
리시스는 눈꺼풀을 움찔거렸다. 눈을 뜨기 전, 등과 몸에 닿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먼저 다가왔다. 곧이어 와작, 하고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정신이 들어?”
눈을 뜨자 키에르트의 얼굴이 가장 먼저 보였다. 리시스는 부스스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왜 이러고 있어요? 폐하는?”
키에르트는 리시스에게 팔베개를 내어준 채 다른 한 팔로는 다리에 올라탄 티티에게 호두를 으깨 먹이고 있었다. 리시스는 그런 키에르트의 가슴에 코를 폭 파묻은 자세였다.
“많이 놀랐는지 몸을 떨어서.”
스스로는 대범하게 잘 견뎠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역시 혼자만의 생각이었나 보다. 정신이 든 지금도 오한이 든 것처럼 간헐적으로 몸이 떨렸다. 키에르트는 그걸 보고 리시스의 몸에 두른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몸에 안전끈이 채워진 것처럼 안정감이 찾아왔다. 리시스는 쪼그라붙었던 숨을 내쉬며 몸을 늘어뜨렸다.
“죄송해요…….”
“그대가 뭐가 죄송하지?”
“괜히 제가 가서 폐하만 번거로워지셨잖아요.”
정신 잃은 자신을 그 자리에서 처치하고, 옮기고, 직접 안아 재우기까지.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다. 자신이 가겠다고 기세등등하게 외치고 달려가 놓고 이게 뭐람. 들 낯이 없어 쭈그러들었다.
“그대 덕분에 중요한 걸 알아냈잖아.”
“아, 맞다. 어떻게 됐어요?”
그 후에 혹시 뭔가 더 알아낸 정보가 있을 수도 있다.
“그게 끝이었어.”
“아…….”
더 버티고 지켜봤어야 했다. 왜 그 정도밖에 못했어. 리시스는 스스로에게 실망했다.
“하지만 그대 덕분에 알게 된 분명한 사실부터 거꾸로 조사해 나가는 건 어렵지 않겠지. 그대 덕분이야.”
키에르트의 칭찬에 리시스는 수그리던 고개를 들었다. 맞다. 아쉬운 점에만 집중하다보니 잘한 걸 잊어버렸다. 리시스가 아니었으면 조사는 완전히 헛다리를 짚었을 것이다. 그제야 마음이 편해진 리시스의 안색이 폈다.
“그럼 이제 다시 황후궁으로 돌아가도 되려나요?”
“아니, 그건 아니지.”
키에르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암살자도 잡았고, 배후도 알아냈다. 이제 추가 조사를 통해 침입경로나 내부 정보원을 찾아내는 건 시간문제다.
“황후궁에는 아무도 없잖아.”
“암살자와 내통한 사람만 골라내고 복직시키면 되지 않을까요?”
“그걸로 되겠어?”
리시스가 그리 하겠다면 키에르트는 동의할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감옥까지 넣었다가 얌전히 빼준다? 그건 너무 무른 행동이지 않나?
“……그렇긴 하지만…….”
리시스도 키에르트의 생각에는 동의했다. 기왕 이렇게 된 것, 눈물콧물 뽑을 때까지 굴리든가 다 잘라버리는 편이 맞았다.
“황제궁에 너무 오래 있게 되니까…….”
“많이 불편한가?”
키에르트가 심각하게 물어왔다. 리시스는 깜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 때문에 폐하께서 불편하실까 봐.”
“전혀. 오히려 그대가 눈에 보이는 곳에 있어야 편해.”
“아……. 하긴, 경비도 다 비용이 들긴 하죠.”
하녀, 시종, 호위 비용도 대폭 삭감 가능. 리시스의 행동을 직접 감시할 수도 있다. 따지고 보면 꽤 장점이 많았다. 키에르트도 분명히 같이 지내는 동안 불편한 것이 있을 텐데, 장점들이 더 큰가 보다.
“그런 게 아니라…….”
“아니라?”
“……맞지, 그것도.”
“싱거우시긴.”
리시스는 픽 웃었다. 키에르트는 뭔가 마뜩찮은 표정이었지만 더 이상 부정에 부정을 붙이지는 않았다.
“당분간은 외출할 일이 없다고 해도……, 아니지! 있지!”
“음?”
리시스는 벌떡 일어나 베개를 팡팡 두드리며 격분했다.
“군 행사! 에드린 왕 욕하는 행사! 그거 왜 저한테는 말 안 해 주셨어요? 어떻게 거기서 절 빼요?”
“……아. ……그대를 부르는, 게 맞나?”
리시스가 에드린 왕에게 가진 악감정은 이전에 들어 알았다. 그래도 사적인 감정과 공적인 행사는 다르다 여겨 일부러 알리지 않았다. 키에르트 나름대로의 배려였다.
“양국의 입장이 있으니 이번에는 대폭 축소해서 진행할 예정이었어. 굳이 황후가 참석하지 않아도 될 만큼.”
거의 장병들을 데리고 만찬 한 번 여는 수준으로 규모를 축소시켰다. 감히 이런 초라한 자리에 황후를 부르냐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형식적이나마 행사를 열었으니 쉬란의 자존심은 지키고, 굳이 올 만한 행사가 아니니 황후의 핑계도 만들어 줄 수 있는 계책이었다. 그런데 그걸 리시스가 걷어찼다.
“제게서 에드린 왕 욕할 기회를 빼앗지 말아주세요!”
“하지만 화평을 도모하는 중인데 그런 도발행위는.”
“그러니까 더 제가 해야죠! 에드린의 공주가 직접 나서서 욕할 만큼 쉬란이랑 친하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잖아요!”
리시스는 어떻게든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끌어온 변명도 듣고 보면 그럴싸했다. 키에르트는 살짝 흔들렸다. 무엇보다 리시스가 원한다지 않은가.
“에드린 쪽의 대응은 괜찮겠나?”
“어쩔 거예요, 쉬란의 황후는 전데.”
리시스는 당당과 뻔뻔 중간쯤의 표정으로 턱을 치켜들었다. 에드린 왕의 친서를 읽지도 않고 박박 찢어버리기도 했다. 그 이후로 에드린에서 딱히 압박이나 연락이 온 건 없다. 즉시즉시 대처를 할 만큼 가깝지 않은 덕분이었다. 거리가 멀어진 만큼 느껴지는 영향력도 약해졌다. 그래서 전선에 있을 때보다 훨씬 자신 있게 개길 수 있었다. 키에르트가 일차적으로 보호해 줄 것이라는 믿음도 한몫 했다.
“그대가 하고 싶다면 해야지.”
키에르트는 당연히 리시스의 기대를 들어주었다. 원하는 사람이나 들어주는 사람이나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럼 하녀들은…….”
원래의 논점으로 돌아왔다. 키에르트의 말대로 하녀를 복직시키는 것은 기강을 잡을 기회를 날려버리는 일이다. 새로 하녀를 뽑자니 새로운 첩자를 들이는 꼴이 될까 염려된다. 그렇다고 키에르트에게 계속 몸단장을 부탁할 수도 없는 일.
“신분이 확실하고 일도 잘하는 사람……. 아?”
리시스의 눈이 반짝였다. 있었다. 생각의 틀을 바꾸면 찾을 수 있는 곳이. *** 렌데일 공작가는 아침부터 발칵 뒤집혔다.
“감히, 누가!”
세니아는 분을 삭이지 못해 방 안을 서성였다. 황후에게 암살 시도가 있었다. 그 결과 황후궁에 닿은 끈이 모조리 떨어져 나갔다. 리시스에게 제대로 한 방 먹여주려던 티파티도 무산되게 생겼다. 그뿐만이 아니다. 리시스가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기 시작했다. 첫 티파티에서도 어이없는 짓을 하긴 했는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리시스에 대한 암살 시도는 더 하라고 판을 깔아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차근차근 밟아가던 세니아의 계획이 무너질 것처럼 흔들렸다.
“내가 분명 나서면 가만 두지 않겠다 경고까지 했는데!”
범인은 뻔했다. 예민하고 신중한 귀족들이 이렇게 과감하게 움직일 리가 없었다. 범인은 알아볼 것도 없이 그 남자였다. 알헨크. 이 미친 로구안 놈이 제멋대로 손을 쓴 것이 분명했다.
“이놈이 제멋대로…….”
렌데일 공작은 딸이 직접 손을 쓰는 것보다 외부의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어영부영 일이 해결되는 것을 더 선호했다. 그건 본격적인 반역이 아닌가. 세니아는 그런 아슬아슬한 다리를 건너기 싫었다. 자존심 문제도 있었다. 쉬란의 일을 로구안의 손에 맡긴다는 것 자체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암살자라는 엄청난 수를 쓰면서 사전에 오갔던 얘기는 일절 없었다. 리시스를 끌어내려야 한다는 목적까지는 일치했다. 그러나 둘 다 리시스는 중간역에 불과했다. 목적지는 극과 극이었다. 렌데일 공작은 적과 적을 싸움붙이는 것만큼 효율적인 싸움법은 없다며 좋아했다. 그러나 로구안이 이쪽을 이용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암살자라는 강수를 제멋대로 썼다. 이미 통제는 벗어난 것이다. 그러나 이 이상은 안 된다. 세니아는 이번에야말로 자신이 직접 손을 쓸 때임을 직감했다.
“알헨크!”
세니아가 거세게 방문을 열어젖혀도 알헨크는 놀라지 않았다. 창밖을 바라보던 몸을 느리게 돌리며 여유롭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귀한 아가씨가 웬일로 행차를?”
“암살자, 당신이지?”
“왜 난리야? 뭐가 문제지?”
알헨크는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 리시스를 제거한다는 목적 하나에만 집중한다는 투였다. 그러나 과정이 중요할 때도 있다.
“나는 나만의 방식이 있어. 나대지 마.”
“아가씨는 아가씨대로 할 일을 해.”
통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니아라고 순순히 물러날 위인은 아니었다.
“어디 당신을 방해하는 일부터 시작해 볼까?”
제법 매서웠다. 알헨크의 여유로운 미소가 차츰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