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황제의 비밀에 접근2022.01.20.
돌아온 답은 엄청나게 길었다.
“……이게 대체 몇 문장이야?”
리시스는 손가락 하나 크기의 쪽지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깨알같은 글씨를 손톱 끝으로 겨우겨우 헤아렸다. 이 정도로 할 말이 많으면 그냥 와서 말하는 쪽이 더 빠르겠다. 『조찬회의 시간이 변동되어 간단한 차만 마시며 회의를 하고, 바로 점심회의를 가진 뒤 산책 겸 이동을 하여 회의를 한 뒤 친위대와 훈련 겸 병력 보고를 받음. 지금은 암살자 심문 중.』
“이런 것까지 나한테 말해줘도 되는 거긴 한가……?”
물어보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상세한 황제 폐하의 일상을 알고 싶지는 않았다. 궁금하지 않은 것도 있고, 보안 문제도 있고. 리시스는 장문의 쪽지를 바라보며 답장을 대체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몰라 고민했다. 그래도 문장 길이는 비슷하게 맞춰야 할 것 같은데……. 『저는 아침 먹고 허멀 후작이랑 앨린 만났어요. 심』 심심해요를 쓰려다 말았다. 하루 종일 바삐 일하는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심심해요를 빼니 문장이 더 짧아졌다. 이대로 보내는 건 너무 성의가 없어 보여서 리시스는 신중히 문장을 추가했다. 『저는 아침 먹고 허멀 후작이랑 앨린 만났어요. 궁에는 아무 이상 없습니다. 잘 계신가 해서 여쭤봤어요.』
“이 정도면……?”
제법 공적인 문서 같았다. 심심한 티도 나지 않았다. 문장도 길어졌다. 키에르트의 긴 성의에 그럭저럭 답한 모양도 되었다. 스스로 합격점을 준 리시스는 자신 있게 쪽지를 입에 물렸다.
“삡!”
호두 생각밖에 없는 새앙다람쥐는 냉큼 달음질쳤다. 원래 주인으로서는 꽤나 씁쓸한 장면이었다. 이번 답장은 전의 답장보다 조금 더 빨리 왔다. 분명히 암살자 심문중이라고 방금 전 쪽지에서 말했는데, 이렇게 딴 데 신경을 써도 괜찮은 건가 모르겠다. 『아침은 뭘 먹었지? 제롬이 제대로 챙겼나? 점심은? 허멀 후작과는 무슨 얘기를 했나? 지금은 뭘 하고 있어?』
“…….”
쪽지에서 물음표가 쏟아졌다.
리시스는 물음표에 압도당해 숨을 삼켰다. 답장의 문장을 시작할 수 없었다. 차근차근 답변을 쓰자니 티티의 볼이 터질 만큼 긴 편지가 될 것 같았다.
“이럴 거면 그냥 보자고 하지? ……아?”
자신이 먼저 보자고 할 수도 있었다. 암살자 심문 중이라는 말은 키에르트가 먼저 했다. 숨길 만한 일이었으면 아예 말하지도 않았겠지.
“괜찮으려나……?”
리시스는 긴가민가하면서도 일단 쪽지를 썼다. ‘얘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그냥 계신 곳으로 가면 안 되냐.’ 정도로 짧게. 심문에 동석하면 정세에 관련된 중한 단서를 얻을 수도 있다. 키에르트를 한 번 건너 전해듣는 정보보다는 현장에서 있는 그대로 접하는 쪽이 훨씬 생생하다. 과연 키에르트가 허락을 할까. 심문법도 노하우가 있다. 그것 또한 정보인데 리시스에게 허락을 해 줄지가 관건이었다. 『당장.』 생각보다 빨리 호탕한 허락이 돌아왔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리시스는 티티를 향해 소매를 벌렸다.
“가자, 호두 먹으러.”
“삐아악!”
티티는 오늘 본 것 중 가장 우렁차게 울며 달려들었다. 부리나케 문을 나서기 직전, 리시스는 거울에 자신을 한 번 더 비춰보았다.
“으, 음…….”
방 안에서 사람을 맞는 것과 달리 외출이다. 시종들도 다 볼 테고, 지나다니는 사람의 눈에 띌 수도 있다. 하지만 갈등은 짧았다. 이것도 키에르트의 성의니까. 부끄러움은 순간이고, 감동은 길다. 평소에 자신이 꾸미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면 모를까, 몸에 걸치기만 하면 옷이라 생각하고 살아왔다. 이제 와서 예민하게 굴 이유가 없었다. 리시스는 당당하게 방문을 나섰다. *** 리시스는 티티의 안내에 따라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멀리까지 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길이 문제였다.
“……티티, 이 길은 아닌 것 같은데.”
티티가 안내한 길은 저번에 리시스의 머리에 화살이 꽂힐 뻔한, 시종들이 단체로 병가를 낼 뻔한 사고가 났던 정원이었다. 리시스가 티티를 처음 발견하고 정신없이 달려갔던 곳이다. 황궁에는 아무리 황후라도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는 황제만의 공간이 있다며, 엄청 혼나기도 했던 장소니 기억을 못 할 수가 없다. 이번에는 담치기나 몰래 숨어드는 짓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그럴 생각도 없었다.
“삐이이, 삐!”
그러나 티티는 소매 안에서 리시스의 손을 물어 당기며 이 길이 맞다고 박박 우겼다. 어떻게 또 이런 길을 발견했는지, 주변에는 감시도 보이지 않았다. 아, 물론 숨어서 머리를 노리는 감시는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저번에 겪어 본 바에 의하면 리시스의 머리에 화살이 날아와 꽂힐 위험은 적었다.
“저번에도 안 죽였으니까.”
리시스는 용기를 내어 밀림 정원 안으로 들어섰다. 티티는 제대로 활약을 했다. 곳곳에 숨은 함정과 덫을 찾아내 안전한 길로만 리시스를 안내했다. 호두의 힘이 참 무서웠다.
“너 되게 위험한 새앙다람쥐가 되어간다?”
만약에 에드린과 다시 전쟁을 하게 된다면, 티티가 외운 이 길들은 쉬란에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도 있었다. 황궁에 맨 처음 들어왔을 때, 기왕 이렇게 쉬란의 황궁에 들어왔으니 나중에 혹여 전쟁이 나면 이용할 수 있게 구조라도 외워두자고 마음먹기도 했다. 하지만 요새 키에르트와의 관계를 보면 전쟁이 날까 싶었다.
“삣!”
“어? 왜?”
앞서가던 티티가 호다닥 돌아와 리시스의 소매 속으로 파고들었다. 무슨 일이지 앞을 보는데, 친위대원 몇이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친위대원도 마침 리시스를 발견했다. 그리고 보자마자 아주 솔직한 반응을 했다.
“어, 벌써 여기까지 오셨습니…… 떠흡!”
“떠흡은 좀 심하지 않아?”
“너무 아름다우셔서 놀랐습니다.”
전쟁터에서만 구르는 사람이라고 사회성이 없는 건 아니구나. 리시스는 순발력 넘치는 대답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폐하께서 길안내를 위해 보내셨습니다만……. 이미 다 오셨군요.”
“여기가 진짜 맞아?”
“예, 그렇습니다.”
설마설마했는데 진짜 여기였다. 친위대원이 마저 안내한 곳은 정원 안에서도 키에르트가 끝내 용도를 말해주지 않았던, 비밀 건물이었다. 리시스는 평생 접근하지 못 하게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공개해도 되나?
“내가 들어가도 되는 거지?”
“물론입니다. 드시지요.”
엄청난 비밀이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는 싱거운 정체였다. 하지만 시종들조차 모르게 비밀스럽게 처리할 일은 분명 많을 터다.
‘그럼 나는 시종보다 더 비밀을 터놓는 사람이 된 건가?’
리시스는 괜히 흠, 헛기침을 하며 어깨를 폈다. 전우애는 같은 군에 있다고 알아서 생기지 않는다. 전장에서 같이 몇 번 죽을 뻔하고, 서로 목숨을 구해주다 보면 생긴다. 쉬란의 황제와 전우애가 싹틀 줄이야. 하지만 이런 특별취급이 나쁘진 않았다. 리시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건물 쪽으로 다가갔다. 건물 벽에 붙은 두꺼운 문을 친위대원이 다가가 밀었다. 문틈 안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터졌다.
“으으, 으아아……!”
“…….”
문을 향하던 걸음이 느려졌다. 심문이구나, 별 생각 없던 것과 달리 막상 비명을 들으니 섬뜩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괘, 괜찮아! 오랜만에 들어서 그래.”
리시스는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라앉히며 문 안으로 들어섰다. 이 정도는 예상했던 범위 내였다. 암살자를 심문하는데 곱게 대화로만 될 리가 없다. 에드린 군도 필요할 때에는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했다.
‘괜찮겠지? 괜찮을 거야!’
사실 리시스가 심문에 직접 참여한 적은 없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비명소리만 듣고 어림짐작했을 뿐이다. 그때는 폭력적인 심문 자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갔다. 전쟁터라 피냄새에 무신경해진 탓이었다. 전장을 떠난 지 얼마나 됐다고 비명과 피냄새가 낯설었다. 리시스는 뻣뻣해진 다리를 억지로 움직였다. 문 안으로 들어가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왔다. 비명소리는 거기서 울려퍼지고 있었다.
“끄아아아!”
계단을 내려가자 한층 더 가까워진 비명소리가 가장 먼저 리시스를 맞이했다. 리시스는 용기를 내어 지하의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피냄새가 훅 끼쳤다. 리시스는 흡, 숨을 참았다.
“왔나.”
키에르트의 목소리에 겨우 숨통이 트였다. 키에르트는 문 옆, 빛이 들지 않는 어두운 곳에 기대서서 팔짱을 낀 채였다. 리시스는 쭈뼛쭈뼛 키에르트의 곁으로 다가가 섰다.
“조금 더 가까이 와. 모처럼 잘 차려입었는데 피가 튀면 곤란하지.”
“아……, 네…….”
좋은 걸 걸치긴 했지만 잘 차려입었다는 말을 붙이는 건 좀 억지 아닐까요? 하지만 키에르트는 자신이 꾸며준 대로 등장한 리시스의 모습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래, 한 사람이라도 만족했으니 됐다……. 차림이 어떻든 피가 튀는 건 싫었다.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곁에 바싹 붙어섰다.
“곧 끝날 거야. 마침 다 털어놓은 참이거든.”
“네에…….”
키에르트는 극장에라도 온 것처럼 친절하게 전후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리시스는 익숙하지 않은 분위기에 쭈그러들었다. 방 안은 딱 상상만큼 잔인했다. 어두컴컴한 방, 위협적으로 타오르는 화롯불. 무엇인지 모를 검은 얼룩이 눌러붙은 바닥엔 한 사람이 넝마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리시스를 습격한 암살자였다. 온몸은 피와 멍으로 가득해 원래의 피부색을 알아볼 수조차 없었다.
‘으.’
막상 실제로 보니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리시스의 등장에도 심문은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그게 다는 아닐 텐데?”
“허으으…….”
“우리도 이제 시작이야. 네 고백도 이제 시작이지?”
암살자에게 손을 쓰고 있는 것은 미하엘이었다. 평소에 커다란 군견처럼 우직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껄렁껄렁한 말투에 사납고 거친 언행. 키에르트와 마찬가지로 낯설었다. 전쟁터에서는 저런 모습이었겠구나, 상상이 갔다. 퍽! 암살자를 향한 매질은 매서웠다. 주먹질 한 번에 피가 튀고 살점이 너덜거렸다. 리시스는 움찔 눈을 감았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괜한 오기였지만 긴장한 걸 들키기 싫었다.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아직은 에드린의 공주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떨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지켜보던 중 리시스의 눈에 한쪽에 모아 놓은 암기가 눈에 들어왔다.
“렌데일이라 이거지.”
“허으으으…….”
심문은 막바지를 향하고 있었다. 이 이상은 암살자의 몸이 버텨나지 못했다. 더 뽑아낼 정보도 없었다. 암살자는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는 상태에도 일관적인 정보를 내놓았다. 렌데일에서 보냈음, 최근 리시스가 황제의 총애를 받는 것이 확실시되어 조바심이 났음, 세니아는 관련되지 않음, 렌데일 공작의 독단. 당연하다 싶은 정보였다. 굳이 암살자의 입을 거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한. 미하엘이 슬슬 끝을 내도 되겠냐고 키에르트에게 눈으로 물었다. 키에르트의 턱이 보일 듯 말 듯하게 움직이려 했다. 그때 암기를 유심히 살피던 리시스가 한 마디를 툭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