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부끄러움은 왜 내 몫2022.01.16.
“설명하자면 긴데…….”
지금 리시스의 차림은 외람되지만 ‘꼬락서니’라는 말이 딱 들어맞았다. 이건 꾸민 것도 아니요, 꾸미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뭔가 한껏 노력한 티가 나기는 했다. 평소보다 화려한 드레스에, 머리에 달린 장신구도 많았다. 하지만 엉성했다. 드레스의 매듭은 저거 나중에 잘라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단단하게 동여매 놨다. 야무지긴 한데 드레스 매듭은 꼭 풍성한 나비 모양으로 묶어야 한다. 저건 매듭이라고 할 수도 없다. 레이스도 주렁주렁 달기는 했는데 끝이 말리거나 접히고, 제대로 몸에 붙이지도 않았다. 너저분했다. 머리의 장신구도 마찬가지였다. 화려한 보석이 잔뜩 꽂혀 있기는 한데 머리카락의 반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장식만 화려하면 뭘 하나. 머리카락이 산발인데.
허멀 후작은 대체 무슨 짓을 하면 황후가 저런 꼬락서니를 하고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한 고뇌에 빠져들었다.
“그게 말이지…….”
리시스도 스스로의 ‘꼬락서니’에 멋쩍은 표정으로 변명을 시작했다.
“황제 폐하가 여자 머리를 처음 만져보셨대…….”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어제 황후궁에 암살자가 들었거든. 아, 이거 아직 비밀이다?”
“예?”
리시스는 굉장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재주도 있었다. 허멀 후작은 겨우 정신을 붙잡고 리시스의 말에 집중했다. 여차저차해서 이렇게 되었다는 일련의 과정을 쭉 들은 허멀 후작은 간단히 정리했다.
“그러니까, 황제 폐하께서 직접 시중을 들어 주신 결과가 이 모양이다, 이거지요?”
“응. 아무래도 익숙하지 않아서 좀 어설프시긴 하지.”
리시스도 자신의 차림이 어설프다는 건 알았다. 어린아이가 입술연지를 발라준 것처럼 우스꽝스러울 것이다. 일을 저지른 건 키에르트인데 부끄러운 건 자신이다. 그래도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리시스의 앞에 허리를 잔뜩 구부리고 리본과 씨름하던 덩치 큰 남자의 등을 보며 웃음을 참은 값이다. 하지만 그건 본인의 사정이고, 허멀 후작을 이런 꼴로 맞이한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무례한 차림이라고 비난하진 말아 줘.”
“비난이라니요! 아주 멋집니다! 브라보!”
허멀 후작은 비난 대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박수를 쳤다.
“……아까 무슨 일이 있었냐며 싸늘한 눈 했었잖아.”
“그건 황후 폐하의 외견이 아니라 황제궁에서 황후 폐하를 뵙게 된 것에 놀라 그랬던 겁니다.”
“……그래서 이 꼴이 괜찮다고?”
“제 눈에는 최고입니다!”
리시스는 이미 허멀 후작의 사람이었다. 내 사람이 황제 폐하가 총애한다는 증거를 온몸에 두르고 있는데, 그게 거적데기든 오물이든 뭐가 중요한가. 무조건 예쁘고 훌륭해 보였다.
“의상은 허멀 후작한테 못 맡기겠다…….”
리시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키에르트도 이 꼴을 보며 흡족하게 웃고 나갔다. 허멀 후작까지 그럴 줄은 몰랐다. 리시스의 박한 평가에도 기분이 좋아진 허멀 후작은 유쾌하게 웃었다.
“당분간 어디 나가실 일도 없으니, 의상이 뭐 중요하겠습니까.”
“왜 없어? 세니아의 티파티가 다가오잖아.”
오늘 허멀 후작을 황제궁으로 부른 이유도 그것이었다. 그러나 허멀 후작은 리시스의 생각과 달리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제 예상에는 취소될 것 같습니다만.”
“왜?”
“황후 폐하께서 암살을 당할 뻔했습니다. 감히 세니아가 황궁 밖으로 황후 폐하를 불러내가면서까지 위험을 감수할까요?”
“……아.”
허멀 후작의 말에 리시스는 짧게 감탄했다. 그게 그렇게 연결될 수도 있구나. 리시스의 자존심 싸움과 별개로 진짜 안전을 위해 황궁을 벗어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았다.
“아, 그럼 예법 수업도 좀 여유 있게 할 수 있겠네. 하지만 언제까지 황후궁을 비워두게 될지 몰라서. 허멀 후작이 황제궁으로 와서 수업을 하면 안 되나?”
오늘 허멀 후작을 황제궁으로 부른 진짜 목적은 이것이었다. 수업장소 변경 요청. 어렵지 않은 부탁이라 생각했다.
“그건 곤란합니다.”
그런데 뜻밖에 허멀 후작은 난색을 표했다.
“우선 이 궁이 너무 멉니다. 제 관절에도 한계가 있거든요.”
“……아.”
“출입할 때 보안절차도 복잡합니다. 귀찮습니다.”
“으음.”
리시스가 어찌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황제궁을 번쩍 들어 다른 곳으로 옮길 방법은 없다. 보안도, 지금은 안전이 최우선이라 허멀 후작만 예외를 주긴 어려울 것이다.
“그럼 당분간 수업은 중단해야 하려나?”
“황제 폐하께 직접 교육을 받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응?”
허멀 후작의 제안은 뜻밖이었다. 실습을 위해 키에르트에게 도움을 청하고는 있었지만 아예 모든 매너 교육을 키에르트에게 부탁한다고?
“남은 건 남녀간에 합을 맞춰야 하는 것들뿐이었습니다. 어차피 황제 폐하와의 합이 가장 중요하니, 그냥 본인과 맞추시지요.”
“그게 그렇게 되나?”
“다른 남자와 합이 잘 맞아 뭐하겠습니까. 황제 폐하와 잘 맞는 것을 보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기왕 만들어진 아름다운 상황이다. 그렇다면 과감히 등을 떠밀어 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허멀 후작은 한 궁에서 지내기로 결심까지 한 신혼 부부를 적극 응원했다.
“그렇긴 한데……, 폐하가 바쁘실 텐데.”
“안 바쁘실 겁니다.”
“?”
바쁘셨으면 리시스의 머리카락과 저렇게 씨름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없는 시간도 만들어서 한가하다고 말하실 거다. 허멀 후작은 자신의 선견지명을 믿었다.
“가까운 행사도 아마 취소되지 않을까 싶고요.”
“행사? 뭐가 있었나?”
리시스는 아예 일 년치 행사 목록을 받아 두었다. 뭐가 언제 있는지 미리 알아두고 마음의 준비라도 하겠다는 차원에서였다. 반드시 황후가 참가해야 하는 행사로 표시된 것은 당분간 없었다.
“아, 황후 폐하께서 반드시 참가하실 행사는 아니었을 겁니다. 아군의 사기 진작을 위한 군 행사라서.”
리시스는 고개를 기울였다. 허멀 후작은 군까지 연관되어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도서관에 상주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듯, 학문과 교육 쪽에 연이 깊었다. 그런 사람이 군 관련 행사를 어떻게 알지?
“허멀 후작이 군 행사까지 어떻게 알아?”
“아……, 그게. 군 행사지만 꽤 유명하고 큽니다.”
허멀 후작이 알 만한 큰 행사에 황후는 반드시 참가할 필요가 없다? 군 행사라는 것에서부터 냄새가 솔솔 났다.
“에드린 군을 저주라도 해?”
“헛. 어떻게 아셨습니까!”
뭘 그 정도를 가지고. 쉬란 사람들이 리시스의 출신 때문에 신경을 많이 써 주는 건 고마운 일이었다. 하지만 리시스는 정말로 아무렇지 않았다.
“나도 쉬란 군을 저주 많이 했으니까.”
어차피 주고받는 관계여서 화나고 어쩌고 할 것도 없다. 리시스는 웃으며 여유를 보여주었다.
“정확하게는 에드린 군보다는 에드린 왕을 모욕하는 행사입니다.”
“뭐?! 그런 중요한 행사를 왜 취소해?!”
그러나 사적인 감정 앞에 여유는 싹 사라졌다.
“예? 아 역시, 화가 나실 만하지요. 그래서 올해는 두 나라의 관계를 보아 취소……, 어?”
허멀 후작은 핀트가 엇나간 리시스의 분노 포인트에 얼빠진 눈이 되었다. 리시스는 탁자를 탕탕 내리치며 강력하게 항의했다.
“에드린 왕을 저주하는 행사엔 누구보다 내가 참석해야지! 아니, 그보다 취소라니! 그건 있을 수 없어!”
“……그렇습니까……?”
리시스의 가족관계에 대해 잘 모르는 허멀 후작은 다시 한번 얼이 빠졌다. 오늘 중에 빠진 얼이 돌아오기는 어려울 성싶었다. *** 리시스는 혼자 황제궁에 남았다. 앨린도 허멀 후작과 마찬가지로 황제궁 출근을 거절했다.
‘어머어머, 황제 폐하께서 머리 정리에도 재능이 있으셨을 줄이야!’
허멀 후작만큼 세속적인 반응과 함께. 리시스가 눈이 발바닥에 달렸어도 키에르트에게 머리 만지는 재주가 없는 건 알 수 있었다. 있는 가능성의 털끝까지 모아도 재능이 있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앨린은 밑바닥에 붙은 먼지까지도 끌어내서 재능이라 칭했다. 머리카락을 다 뽑아놓지 않은 게 어디냐며. 결론은, 황제 폐하께서 잘하시니 자신도 당분간 시중을 양보하겠다는 것이었다.
‘양보 맞아?’
‘제가 양보를 안 했으면 역사상 최초로 황제궁에 출입하는 황후의 시녀라는 이름을 노렸겠지요?’
자신이 모시는 황후가 황제와 돈독한 관계를 맺는 것이, 황제궁 출입 시녀라는 타이틀보다 더 좋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 약삭빠른 계산에 리시스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리시스가 전장에서 날아다녔다 하더라도 황궁의 전략에는 혀를 내둘렀다. 에드린에 있을 때에도 구박만 받았지 직접적으로 암투에 끼어든 적은 없었다. 끼어 들 짬도 되지 않았다. 이제 슬슬 진짜 암투에 휘말리려나 할 때에 뜻밖의 고요한 생활이 주어졌다.
“……조용하네.”
황후궁에 상시 방문하던 허멀 후작과 앨린마저 없는 황제궁은 정말 고요했다. 암살 시도 때문에 피신을 온 몸이니 사방을 쏘다니며 구경을 다니기도 뭐했다. 그렇다고 방에만 처박혀 있으니 답답했다. 어떤 사람은 이불 밖은 위험하다며 문 나서는 것이 가장 어렵다는데, 리시스는 정반대였다. 방에만 있으니 온몸이 뒤틀렸다.
“폐하는 언제 오신데…….”
결국 상대를 해 줄 키에르트만 기다리게 되었다. 제롬을 불러 물어볼까 하다가 일전에 딱 잘라 거절당했던 일이 생각났다. 황제 폐하의 행방은 황궁에서 제일가는 비밀이었다. 지금은 좀 달라졌을 것 같지만 또 시도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삡?”
“오. 너 있었구나?”
대신 시기적절하게 티티가 나섰다. 딱 보아하니 슬슬 키에르트의 수제 호두가 당기는 모양이었다. 티티는 저도 병사의 마음가짐이 옮았는지 꼭 움직여야 할 때가 아니면 게으름을 피웠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내내 배를 까고 도롱도롱 자더니, 배가 고파져서야 일어나서 삑삑거렸다.
“황제 폐하 어디 있는지 알겠어?”
“……삑?”
티티는 전혀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짤짤 흔들었다. 대신 배고프니 밥 달라고 리시스의 손에 매달렸다. 리시스는 땅콩 한 알을 물려주고 쪽지도 물렸다. 티티는 불만스럽게 쪽지가 담긴 구슬을 뱉으려 했다.
“일을 한 다람쥐만 호두를 얻는다. 가라, 티티!”
“……쁘륵.”
호두는 키에르트에게 가야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티티는 불만스럽게 리시스의 손을 떠났다. 티티는 밍기적밍기적 작고 하찮은 기적을 일으켜 창문을 넘었다.
“삥.”
티티는 꽤 시간이 흐른 뒤 돌아왔다. 어디 가서 게으름 피우다 왔나 싶었지만 그런 것 같진 않았다. 티티는 리시스의 앞에 구슬을 퉤 뱉고 펜까지 손앞에 물어다 놨다. 빨리 다음 쪽지를 내놓으라는 협박이었다. 호두의 위력이 강하기는 했다. 이 와중에 키에르트가 아침에 호두를 챙겨갔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이렇게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면서 왜 이렇게 답장 가지고 오는 건 시간이 오래 걸렸지? 리시스가 보낸 쪽지는 짧았다. ‘뭐 하세요?’ 한 마디였다. 고뇌를 하고 답장을 해야 하는 물음도 아니었다.
“멀리 가 계신가?”
혼자 이런저런 추측을 하며 쪽지를 열어 본 리시스는,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