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봐도봐도 질리지 않는2022.01.13.
“……닿은 채 자자고?”
“네, 손끝이든 어깨든?”
리시스가 먼저 스킨십을 제안했는데 어찌 거절하겠는가. 당연히, 물론, 기꺼이 그리 해야 했다. 그러나 키에르트에게도 마음의 준비라는 것이 필요했다. 짐승이 되지 않고 이 밤을 보내려면.
“강요하는 건 아니에요. 싫으시면 거절하세요.”
“아니, 아니. 싫은 건 아니야.”
“망설이실 만큼 내키지 않으면 안 하셔도 돼요.”
“그것도 아니고. 뜻밖이라 놀라서 그래.”
그러나 키에르트의 아주 작은 망설임도 큰 용기 낸 리시스에게는 거절처럼 느껴졌다. 키에르트는 아니라지만 괜한 소리를 했다는 후회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에요, 제가 이상한 말을 했어요.”
리시스는 부끄러움을 숨기며 등을 돌려누웠다.
“잠깐.”
키에르트는 리시스가 완전히 돌아눕기 전에 어깨를 잡았다. 가벼운 리시스의 몸은 키에르트가 살짝 건드렸음에도 불구하고 뱅그르 돌아버렸다.
“어머!”
“!”
어깨를 잡은 팔 위로 리시스의 몸이 굴렀다. 자연히 키에르트의 팔베개를 하게 되었다. 키에르트도 의도하지 못한 움직임이었다. 팔베개를 베고 마주보며 누운 채 리시스는 눈을 왕방울만하게 떴다.
“……!”
가깝다. 하마터면 얼굴이 붙을 뻔했다. 키에르트도 턱밑에 놓인 리시스의 앙증맞은 코끝을 내려다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미안.”
키에르트는 일단 사과했다. 리시스를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다. 자신의 앞에서 등을 돌리는 것이 싫어 엉겁결에 잡아챘을 뿐이다.
“아, 아뇨…….”
사과를 받을 정도의 행동은 아니었다. 리시스는 우물우물 사과를 받고 또 우물쭈물했다. 사과까지 받아놓고 다시 몸을 팽 돌려버리는 것도 너무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안긴 자세로 있을 수도 없는데. 어쩌지. 어쩌지? 머리는 팽팽 돌아가는데 몸은 꼼짝하지 못했다. 숨이 입으로 나왔다. 쌕쌕 소리가 났다. 달리기를 한 사람처럼 가쁜 숨을 입으로 내보내며 키에르트를 올려다보는데, 공기가 더웠다.
“그대가 손을 잡는 건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아서 괜찮을지 염려가 됐을 뿐이야.”
“아…….”
“그런데, 이것도 괜찮지 않나?”
손을 잡지는 않았다. 하지만 손을 잡은 것보다 남들 눈에는 더 친밀해 보일 수 있는 자세였다. 팔베개. 이것이야말로 한 침대를 쓰는 남녀의 전유물 아니던가. 키에르트의 팔을 베고 누우라고 했으면 못 한다고 도망쳤을 수도 있겠지만, 막상 누워보니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조금, 너무 가까운 것 같아요…….”
“눈을 감아보면 어떨까?”
“해볼게요.”
팔을 베고 누운 것 까지는 괜찮았다. 숨결이 섞이는 것이 간지러워서 힘들었던 것이다.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말에 따라 얌전히 눈꺼풀을 닫았다. 가지런히 내려앉는 눈꺼풀, 거기에 달린 긴 속눈썹. 그것을 지켜보던 키에르트의 입술 끝이 휘어졌다. 이전 합궁의 날, 리시스의 자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이 그렇게 즐거웠다. 다시 봐도 즐거운 건 여전했다. 만족스러웠다. 귀엽고 예쁜 건 기본이고,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이 고요한 파도로 가득찬 듯 평화로워진다.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폐하?”
한참 들여다보고 있는 도중, 리시스가 눈을 반짝 떴다. 키에르트는 도둑질하다 들킨 것처럼 흠칫 놀라 얼른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하지만 팔베개를 해 주느라 몸을 옆으로 돌린 채라 아예 시선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팔 때문에 잠이 안 오세요? 무거우시면 제가…….”
그런 순진한 이유는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할 수도 없었다.
“암살자에 대해 생각 좀 하느라.”
“아아. 맞네요. 어디였을까요?”
키에르트는 대충 둘러대느라 꺼낸 말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리시스는 요점을 집어냈다. 반드시 짚어보아야 할 부분이었다. 키에르트도 팔랑거리던 마음을 가라앉히며 집중했다. 말 나온 김에 얘기하는 게 나았다.
“그대를 노릴 곳은 많지. 우선 렌데일이 있겠고.”
현재 가장 표면적으로 리시스를 경계하는 세력이다. 어이없게 황후 가문에서 밀려났고, 리시스만 없으면 다시 황후가 될 확률이 가장 높은 가문. 반대로 가장 렌데일이 용의선상에서 멀 수도 있었다. 렌데일은 다른 곳이 벌인 일도 뒤집어 쓸 수 있는 입장이다. 누가 보아도 자신들이 가장 의심받을 상황에 과연 일을 벌일까? 진짜 극도로 몰리지 않는 한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렌데일 다음 자리를 노리는 가문일 수도 있겠네요.”
리시스와의 혼인은 정략결혼이니 얼마나 오래 갈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 정략결혼이 깨진 다음의 이야기다. 세니아가 아무리 유력한 황후 후보라 하더라도 계약서를 쓴 것도 아니고 약혼을 해 둔 것도 아니다. 리시스 때문에 이미 한 번 황후 자리에서 밀리기도 했다. 키에르트에게 냉대를 당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두 번, 세 번 밀릴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할 가문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또는, 로구안일 수도 있겠고요.”
적이 꼭 쉬란 안에만 있으란 법은 없다. 이 동맹의 견고함에 위기를 느낀 로구안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을 수도 있다.
“무기도 남았고, 생포도 했으니 밝혀내는 건 어렵지 않겠지.”
이미 친위대가 조사를 시작했을 것이다. 이 시간쯤이면 마무리하고 보고서를 쓰고 있을 수도. 배후를 밝히는 건 급하지 않았다. 어차피 사방이 적이다. 배후가 밝혀지든 말든 방비를 철저히 보완해야 하는 건 똑같았다.
“그러니 오늘은 걱정 말고 편하게 자.”
“잠이 안 와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생각보다 몸은 빠르게 늘어졌다. 목 뒤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 때문일까. 리시스는 눈꺼풀을 무겁게 깜빡였다. 키에르트의 얼굴이 슬슬 흐려졌다.
“손잡는 건 부담스러운데 이건 좋네요…….”
몸을 감싼 체온이 좋았다. 보호받는 것 같았다. 따뜻하고 다정했다. 리시스는 히히, 미소 짓다가 그대로 코 잠이 들었다.
“……좋, 아?”
그러나 키에르트는 그 후로도 한참을 잠들지 못했다. 리시스의 가벼운 체온이 언제 굴러가버릴지 몰라 오히려 불안했다. ***
“음……. 몇 시야…….”
“열 시 좀 넘어가고 있군.”
“……네?”
리시스는 눈을 확 떴다. 눈을 감을 때와 똑같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차분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키에르트, 정신 사나운 알록달록 실내. 딱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엄청나게 푹 잔 것처럼 몸이 가볍다는 점?
“밤 열 시요?”
“아침 열 시.”
밤 열 시까지 이러고 잤으면 걱정이 되어서라도 깨웠다. 하지만 아침 열 시도 이른 시간은 아니었다. 슬슬 일어나야지 생각하던 차에 리시스가 눈을 떴다. 이전에 리시스를 깨우려다가 얻어먹었던 이 세상 모든 종류의 쌍욕은 키에르트라도 두려웠다. 알아서 일어나 주어 참 고마웠다.
“제, 제가 폐하의 팔을 베고 그렇게나 오래, 잘 잤다고요?”
“잘 자더군. 다행이야.”
리시스는 벌떡 일어나 앉아 멍하니 키에르트를 돌아보았다. 손도 못 잡아 삐죽거리던 자신이, 품안에서 천연덕스럽게 퍼질러 잤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손이랑 팔은 같은 몸통에 붙어 있는 신체인데, 왜 이렇게까지 다른 거야. 안겨 있는 것도 생각보다는 금방 익숙해졌었다. 혹시 문제는 손이지, 키에르트의 몸이 아니었던 건 아닐까. 아침부터 리시스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다행인 거죠……?”
“못 잔 것보다는 다행이지 않나? 체력도 챙기고, 소문도 챙기고.”
“그렇긴 해요…….”
대답도 멍했다. 얼빠진 리시스의 모습이 꼭 잠 덜 깬 짐승 같았다.
“삐…….”
하루의 시작이 늦은 건 티티도 마찬가지였다. 이불 속에서 키에르트의 발목을 베고 잠들었던 티티는 두 사람이 깨자 저도 깼다며 소리를 내며 꾸비적꾸비적 올라왔다.
“……너 거기서 잤어?”
“삐.”
짐승도 자다 깨면 붓는구나. 키에르트는 티티의 퍼석퍼석한 얼굴 털을 보며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리시스는 잠기운이 남은 손으로 티티의 털을 골라주었다. 그러는 리시스의 머리카락 한 올도 더듬이처럼 삐죽 솟아 있었다. 키에르트는 무심결에 팔을 뻗어 정리해 주려다 움찔 손을 내렸다. 리시스가 접촉에 편해졌다한들 자신이 먼저 무심하게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 퍼뜩 떠올랐다. 닿고 싶기는 했다. 하지만 더 이상 너무 스스럼없이 다가서는 건 규칙 위반이었다.
“왜요?”
“아니, 머리카락이 솟아 있어서.”
“어디요? 여기?”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조심스러운 마음도 모르고 천연덕스럽게 머리를 내밀었다. 이번에는 리시스의 허락을 받았다. 키에르트는 아침부터 사탕을 먹은 것 같이 기분이 급격히 좋아졌다.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리시스의 머리카락을 골라내 차분히 정돈해 주었다. 하지만 자는 사이 눌렸던 머리카락은 다시 띠용 튀어 올랐다.
“……다시 튀어 오르는데.”
“아, 꼭 그런 애가 있더라고요. 그냥 묶든가 물에 적셔서 빗어야 해요.”
“그럼 시중을…….”
자연스럽게 하녀를 부르려던 키에르트의 동작이 멈췄다. 시중 들 사람이 어디 있나. 지난 밤 몽땅 잡아 감옥에 처박아 버렸는데. 키에르트는 자신의 돌발행동이 불러 온 결과를 맞이하며 숙연해졌다. 황후궁의 위엄과 안전을 챙긴 거……, 맞지……? 리시스의 뿅 튀어나온 머리카락에는 전혀 위엄이 없었다.
“혹시 오늘 바쁜가? 사람 만날 일 있어?”
“네. 바빠요.”
오늘은 리시스도 바빴다. 이대로 방에만 처박혀 있으면 대충 잠옷 입은 채 뭉개도 된다. 하지만 어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 어떻게 방에만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황후궁의 뒷수습에, 황제궁의 시종들과도 앞으로의 생활에 대해 얼굴 한 번은 보고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이다. 거기에 허멀 후작도 한 번은 봐야 할 테고. 대대적으로 군중들 앞에 나서는 일정이 아니라지만 잠옷차림으로 머리도 정돈하지 않고 만날 수는 없었다. 앨린을 불러오자니 시간이 너무 지체될 것 같았다. 앨린도 치장을 돕는 것에 그렇게 실력이 좋지도 않았고.
“……폐하.”
리시스는 지금까지 없으면 없는 대로, 있는 자원을 활용하며 잘 살아왔다. 하녀들이 없으면 뭐 어떤가. 키에르트도 두 손, 열 손가락 다 잘 달려 있다.
“……노력하지.”
리시스의 비장한 기대에 키에르트도 각오를 다졌다. ***
“황제궁?”
허멀 후작은 갑작스러운 황제궁으로의 호출에 의아했다. 황제 폐하가 허멀 후작을 보려 할 때는 대개 호출보다는 스스로 도서관을 찾았다. 오늘 같이 허멀 후작을 부르는 일은 아주 이례적이었다. 거기에 부르는 장소가 접견실이나 정원이 아닌 황제궁이라니.
“황제궁이 분명한가?”
시종의 전달내용이 믿기지 않아 허멀 후작은 다시 한번 확인했다. 친위대를 제외하고 황제궁에서 접견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허멀 후작이 황제와 은밀한 회의를 할 만큼 중역도 아니었다. 은밀하게 불러서 죽일 만큼 위험인물도 아니었다. 시종은 다른 질문에 대해서는 무조건 기밀이라고만 답했다. 허멀 후작은 아리송한 채로 이동했다.
“어, 왔나?”
“황후 폐하?”
오늘은 허멀 후작에게 하루 종일 아리송한 날이었다. 갑작스러운 황제궁으로 소환당해 시종을 따라와 봤더니, 황제궁 중에서도 가장 비밀에 쌓여 있는 궁으로 안내를 받았다. 대체 무슨 일인가 긴장하며 안으로 들어서니 맞이하는 것은 리시스였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꼬락서니’를 한 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