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밥상인지 미끼인지2022.01.09.
“왜, 왜요?”
키에르트의 격렬한 저항에 리시스는 영문을 몰라 눈만 동그랗게 떴다.
“한 침대에서 자……, 는 거 아니에요? 안 되나?”
“아니, 안 되는 게 아니라……. 내가 몸이 좀.”
“어머. 아까 그 상처 때문에 그러세요?”
키에르트의 말에 상처가 떠올랐다.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다. 상처 때문에 좀 편히 자고 싶은 거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괜찮으세요? 혹시 그 상처, 진짜 암기에 당하신 거 아니에요? 독?”
진심어린 리시스의 걱정에 키에르트는 더욱 필사적으로 잡념을 떨쳐냈다. 저렇게 순수한 사람에게 음습한 속내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지금 정체불명의 암살자에게 습격을 받아 안전한 방에 숨은 것이다. 제롬이 뭔가 착각을 해 방이 이 모양이 되었지만, 안전하게 밤을 보내는 것이 목표다. 집중해.’
키에르트는 차근차근 상황을 정리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걱정스럽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리시스의 눈망울에 자꾸 망할 생각이 솟구쳤다.
“어디 봐요.”
“아니, 이제 괜찮아.”
“피가 났는데 어떻게 괜찮아요! 얼른요.”
아무리 독이 아니어도 상처를 그냥 넘길 수는 없다.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등에 달라붙어 제 손으로 셔츠를 끌어내렸다. 키에르트는 어어 하는 동안 당했다. 순식간에 셔츠가 끌려 내려가 반라가 되었다. 등에 달라붙는 리시스의 기척에 입이 바싹 말랐다. 키에르트는 마른침을 삼켜 말라붙는 입을 축였다.
“피 때문에 잘 안 보여요. 일단 좀 닦아야겠어요. 닦을 거 뭐 없나……, 아 있다.”
테이블 위에는 간단히 몸을 닦을 수 있게 마련해 놓은 물과 수건이 마련되어 있었다. 제롬은 젊은 나이에 시종장이 된 만큼 눈치가 백 단이었다. 암살 시도를 당한 뒤 마차 안에서 두 분이 불타올랐다? 그 정도면 시중을 받아 씻고 준비하고 할 여유도 없을 것이란 계산까지 갔다. 따로 사람을 들일 필요 없이 모든 것을 방 안에 갖춰놓았다. 그중에는 혹시 긁히거나 한 상처에 대비한 비상약품도 포함되었다.
“일단 피부터 닦아볼게요.”
리시스는 수건에 물을 적셔 상처 위를 살살 문질렀다. 그새 굳은 피가 부스러기와 함께 수건에 묻어났다.
“아프세요?”
“별로.”
“그래도 피가 났는데…….”
실제로 크게 아픈 느낌도 없었다. 오히려 리시스의 손길이 살짝살짝 닿는 느낌이 더 컸다.
“크, 흠.”
간질간질한 느낌을 참느라 헛기침이 나왔다. 그 소리에 리시스는 깜짝 놀라 손을 뗐다.
“죄송해요, 아프셨어요?”
“아니…….”
“더 조심히 할게요.”
“아니, 그냥 빨리 해.”
키에르트는 조바심이 나 재촉했다. 지금은 참을 만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찌될지 몰랐다. 신방 분위기로 꾸며놓은 데다 잠옷 바람인 리시스. 거기에 자신은 맨몸이지, 예민한 등에 닿는 손길까지. 키에르트는 사람이자 남성이고, 인내심의 한계가 있었다.
“아, 네!”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말대로 서둘렀다. 급해진 손이 과격하게 상처를 꽉 뭉개버렸다.
“!”
아무리 대수롭지 않은 상처여도 누르면 아프다. 키에르트는 순간 놀라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아파서 정신이 확 들었다. 아무리 묘한 분위기가 주변을 둘러싸고 있어도 아픈 데는 장사 없다. 고맙게도 리시스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과격한 치료를 이어갔다.
“다행히 찢어지지는 않았어요. 피는 멎은 것 같고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약 바를게요.”
리시스는 투덕투덕 약을 상처 위에 올렸다. 약을 더 많이 바른다고 빨리 낫는 것도 아닌데 마음이 그랬다. 약통의 바닥까지 싹싹 긁어서 올리다보니 손길에 닿는 감각이 둔해졌다. 키에르트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적어도 침대에서 옷 같지도 않은 옷을 ‘붙이고’ 굴러다니던 리시스가 떠오르는 손길은 아니었다.
“다 됐어요.”
“수고했어.”
키에르트는 자연스럽게 들고 왔던 셔츠를 걸치려 했다.
“아, 약.”
“……아.”
두툼하게 바른 약 위에 셔츠를 입으면 말짱 소용이 없어진다. 리시스의 만류에 키에르트는 셔츠의 팔만 꿴 채 어정쩡하게 굳었다.
“그, 그냥 벗고 엎드려 주무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아.”
벗고 자라고 말한 사람이나, 벗고 자야 하는 사람이나 기분이 찝찌름하니 이상했다. 리시스도 눈이 있었다. 치료를 마치니 키에르트의 몸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매끈하면서 탄력 있는 근육으로 감싸인 커다란 ‘남자의’ 몸. 전장에 있었으니 그런 거야 종종 보았다. 하지만 황제라 그런가, 같은 몸인데 풍기는 분위기가 달랐다. 냄새도 달랐다. 병사들은 더럽고 냄새가 났다. 거스러미가 잔뜩 일어나고 때까지 낀 등은 스치기도 싫었다. 전쟁터니 씻고 관리하기 어려운 건 이해했다. 그래서 그냥 원래 사람의 몸은 건드리기 싫은 것이다 생각하고 말았다. 키에르트의 몸은 만져도 아무렇지 않았다. 아니, 자신의 몸과는 너무나도 다른 탄탄한 느낌이 신비로워 더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머, 내가 미쳤나 봐!’
만지고 싶다니? 리시스는 스스로의 사고변화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럼 잘까?”
“예? 자, 잔다고요?”
사람 다 똑같았다. 한쪽으로 생각이 꽂히면 내내 한쪽으로 흐른다. ‘잔다’라는 단어는 하필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했다. 수면을 취한다, 죽었다, 성관계를 맺다. 원래의 의미는 첫 번째인데 세 번째 의미가 같이 떠올랐다.
“……안 자고 버틸 생각인가?”
“아! 아아. 그 잔다. 예, 자야죠.”
리시스의 어색하고 뻣뻣한 반응에 키에르트도 덩달아 굳었다.
“침……대로 갈까.”
“네, 에.”
두 사람은 병정놀이하는 아이들처럼 뻣뻣하게 침대로 갔다. 리시스와 키에르트는 각각 반대 방향에서 이불을 들치고 누웠다. 침대는 열 사람이 누워도 될 만큼 넓었다. 하지만 둘은 굴러 떨어지기 직전까지 아슬아슬하게 모서리에 기대 누웠다. 두 사람 사이에는 한 사람이 가로로 누워도 될 만큼의 넓은 공간이 있었다. 그래도 혹시나 털끝 하나라도 닿을까 긴장하며 몸을 움츠렸다. 눕자마자 시체처럼 입을 다물고 천장만 바라보던 리시스는 어느 순간 자신이 숨도 안 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푸하……!”
“휴…….”
기다렸다는 듯 키에르트의 숨소리도 길게 늘어졌다. 리시스는 엥, 하며 키에르트를 돌아보았다. 키에르트도 리시스를 돌아보고 있었다.
“……어……. 잠 안 오세요?”
눈이 마주쳤는데 모른 척하기도 그래서 리시스가 먼저 말을 걸었다.
“음. 이것저것 생각하다 보니. 그대는?”
“저도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르네요.”
둘 다 바로 잠들 상태가 아니었다. 암살 시도로 놀란 마음이 완전히 가라앉지도 않았다. 거기에 정신 사나운 방의 꾸밈새가 한몫했다. 눈을 어디에 두어도 알록달록, 휘황찬란. 그 짧은 새에 많이도 갖다 붙였다. 신방의 상징, 팔랑거리는 천 쪼가리와 알록달록한 조명도 이제 질렸다.
“이렇게 산만하게 꾸며놓으면 오히려 암살자가 숨기 더 좋을 텐데…….”
“그렇지. 여기저기 물건을 숨기기도 용이하고. 동선 파악도 어려워지니까.”
“암살보다 동침이 크고 중요한 일이었나 봐요.”
이건 전적으로 제롬의 책임이었다.
“오해를 제대로 잘 산 모양이야.”
“다행이긴 한데요…….”
합궁을 소박맞은 황후보다는 오해 쪽이 나았다. 황제가 직접 들쳐업고 황제궁에 들인 황후. 바깥의 눈으로 보면 사랑 이야기 한 편 뚝딱이다.
“앞으로도 이 방에서 계속 지내야 하는 걸까요?”
이번에는 합궁이라는 특별한 날을 지정한 것이 아니었다. 키에르트가 아예 리시스를 황제궁으로 들여버렸으니, 내내 이렇게 지내야 앞뒤가 맞아 보이지 않을까?
“그편이 낫지 않겠나?”
키에르트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 투였다. 아니, 아니야. 다시 잘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리시스는 몸을 굴려 키에르트처럼 엎드렸다. 눈높이를 똑같이 맞추자 키에르트와 눈높이가 딱 맞았다. 리시스는 거짓말할 생각하지 말라며 눈을 딱 마주친 채로 물었다.
“매일 밤 이러고 자야 하는데, 폐하는 괜찮으시겠어요?”
“……아…….”
키에르트는 뒤늦게 한탄했다. 이 너저분한 방은 괜찮다. 한 침대에서 자는 것도……, 이 정도 넓이면 괜찮다. 조금 불편하게 자면 되니까. 하지만 매일 밤 리시스와 이렇게 침대에서 눈을 마주치는 것? 안 괜찮다.
“……방을 따로 쓰면 좋겠지만…….”
“만?”
“그러려면 보안 동선을 다시 짜야 해.”
“……아아아아.”
웬만하면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고 편함을 선택하겠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보안이 최우선이었다. 방을 따로 쓰게 되면 보안 동선이 뒤틀리고, 그러면 안전을 위해 리시스가 황제궁에 와서 생활하는 의미가 없게 된다. 어쩔 수 없이 당분간은 같은 방 신세였다.
“약속은 지킬 테니 불안해하지는 말고.”
“이제 그러실 거란 건 믿어요.”
“그럼 편하게 자.”
키에르트도 신경이 곤두서긴 했지만 리시스가 더 놀랐을 것이다. 우선은 잠이라도 편하게 자게 해 주고 싶었다. 키에르트의 고난은 그 다음부터다.
“네. 잘게요.”
리시스는 다시 똑바로 천장을 보고 누웠다. 두 손을 가슴 위에 가지런히 올리는 걸 보며 키에르트는 생각했다.
‘저러고 안 자던데.’
리시스가 진짜 자려면 더 자유분방한 자세를 취해야 했다. 그래도 꽤 한참 리시스는 그러고 있었다.
“……근데 있잖아요.”
그냥 눈 감고 버틴 것이었다. 결국 자는 척하다 좀이 쑤셔 견딜 수 없었는지 리시스는 눈과 입을 다시 열었다. 그럼 그렇지. 문제 하나 맞춘 기분으로 키에르트는 픽 웃었다. 리시스가 잠들 때까지 수다 상대가 되어주는 건 얼마든지 해 줄 용의가 있었다.
“응.”
“폐하 지금 편하세요?”
리시스의 정곡을 찌르는 질문은 익숙해질 만하면 다른 곳을 찔렀다. 정곡이라는 것이 사실 여기에도 있었단다, 알려주는 것처럼.
“타인과 침대를 공유한 적이 없으니 혼자 잘 때보다 아무래도 편하지는 않지.”
아니라고는 할 수 없으니 솔직히 불편하다고 인정은 했다. 하지만 그럴싸한 사유를 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음, 맞아요. 저희가 불편한 이유가 아무래도 닿을까 봐 걱정이 되어서인 것 같거든요.”
“으음.”
키에르트의 입장은 리시스가 ‘달라붙을까 봐’, 그래서 자신의 이성이 날아가서 무슨 짓이라도 ‘저질러 버릴까 봐’ 긴장이 되는 것이었다. 리시스가 걱정하는 ‘닿을까 봐’와는 조금 다를 것이다. 그래도 그걸 말했다가는 경계심만 배로 불리는 일이 될 테니, 키에르트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제가 해결방법을 생각해 봤는데요. 그냥 닿고 자면 어떨까요?”
“……?”
“언제 어떻게 닿을지 몰라서 긴장하는 것보다는 그냥 처음부터 닿은 채로 자는 게 마음 편할 것 같아요. 어때요?”
키에르트는 혼란에 빠졌다. 이걸 차려진 밥상으로 봐야 할지, 함정 앞의 미끼로 봐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