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밀폐된 공간에서 부부가 할 일2022.01.06.
“꺄악!”
키에르트의 반라를 보고 비명을 지른 리시스.
“무슨 일이십니까!”
그 리시스의 비명에 즉각 마차 문을 연 친위대장 미하엘. 그리고 미하엘이 마주한 부부의 후끈한 장면.
“……!”
앞뒤 상황을 모른 채 보면 마차라는 밀폐된 장소에서 황제 부부가 부부로서 당연히 할 수 있는 육체적 접촉을 시도하려는 찰나였다.
“어억!”
외마디 비명을 지른 미하엘은 문을 열었던 속도 그대로 쾅 문을 닫았다.
“실례했습니다!”
두 사람 다 문이 열릴 때 그대로 얼어붙어서 아직 못 녹았다. 괜찮다, 아무 일 없다, 가던 길 계속 가도록 등등의 말 한 마디 정도는 해 주어야 하는데. 입까지 얼어붙었다. 마차 밖에서 침묵을 인내하던 미하엘이 주저주저하며 쓸데없는 배려를 얹었다.
“예, 그럼 최대한 천천히 이동하겠습니다.”
됐으니까 빨리 가 주기나 하지. 사람 속도 모르고 마차는 걷는 것보다 느리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다……각, 다아……각. 말굽소리가 이렇게나 은근한 분위기를 풍겼던가. 마차는 유난히 고요하게 굴러갔다. 부부의 좋은 시간을 마차의 진동으로도 방해해서는 안 된다 여긴 마부의 솜씨인가 싶었다. 정말 쓸데없는 배려였다. 그 배려 덕에 서로 얼굴도 못 볼 정도로 민망해졌다. 마차 바퀴가 돌부리에 채여 덜컹 튀어오를 때마다 리시스는 슬그머니 한 뼘씩 엉덩이를 옆으로 옮겼다. 조금씩 옆으로 옮기다 보니 문에 달라붙기 직전까지 갔다. 그러나 키에르트도 비슷했다. 슬그머니 셔츠를 챙겨 입더니 슬슬 반대쪽 문에 붙었다. 두 사람 다 보이지도 않는 창밖만 열심히 바라보았다.
“…….”
“…….”
수다라도 떨면 이 분위기가 날아가련만. 한 번 달라붙어 얼기 시작한 입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달빛 아래 은근히 굴러가던 마차가 멈출 때까지 두 사람은 한 마디도 나누지 못했다.
“폐하, 제롬입니다. 마차 문을 열어도 되겠습니까?”
굳어 돌이 되다 못해 부스러지기 전, 마차는 목적지에 다다랐다. 제롬의 목소리에 리시스는 마음속으로 만세를 부르짖었다. 드디어 어색한 시간에서 해방이다. 하지만 그냥 뛰어내릴 수는 없었다. 마차 밖에는 사람들의 눈이 있으니까. 리시스는 엉덩이로 움직여 다시 의자 중앙으로 돌아갔다. 키에르트도 리시스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마차 안에서는 내외하며 거리를 두었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그럴 수 없다.
‘준비 됐나?’
‘넵.’
두 사람 다 작전에 한해서는 철저했다. 눈빛을 교환하며 전열을 다듬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은 출전이나 마찬가지였다.
“열어.”
키에르트는 선봉에 선 장군처럼 의연하게 명령했다. 문이 열리자 제롬과 시종들이 일제히 절을 올리며 두 사람을 맞이했다. 리시스는 잠옷 바람이지만 우아하고 도도하게 턱을 치켜 올리며 마차에서 내리려 했다. 그러나 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 허리가 채였다.
“맨발.”
키에르트의 지엄하신 경고였다. 아차. 맨발인 걸 또 까먹었다. 황후궁에서처럼 대충 맨발로 가겠다 하면 안 되겠지?
“슬리퍼…….”
……를 시키려는 것보다 키에르트가 빨랐다.
“슬리퍼 가지러 왔다갔다하는 것보다 그냥 내가 안고 가는 쪽이 빠르지 않겠나.”
제롬은 속으로 흠칫 놀랐다. 황제 폐하께서 이젠 하다하다 슬리퍼 대용을 자처하셨다. 일전에는 도서관 책 나르는 시종 일까지 하셨다는데, 리시스가 들어온 이후로 상당히 괴상한 짓을 하고 계신다. 내가 알던 그 황제 폐하가 맞으신가?
“하지만…….”
아까는 보는 눈이라도 없었지. 지금은 시종과 호위 수십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다. 리시스가 머뭇거리며 키에르트의 손길을 피하려 하자, 제롬이 나섰다.
“송구합니다만, 슬리퍼를 찾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한참 기다리셔야 할 수도 있는데…….”
처음에는 적국의 공주라 의심하던 제롬이지만 이제는 달랐다. 두 분께서 화기애애하고, 황제 폐하께서 저렇게 들이대고 계신다. 시종장 된 자로서 마땅히 도움이 되어야 했다. 제롬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리시스의 망설임을 차단해 주었다.
“아……, 그럼 어쩔…… 수…… 없……네요.”
“실례하지.”
제롬의 말에 리시스는 어쩔 수 없이 키에르트의 팔에 안겼다. 키에르트는 냉큼 리시스를 안아들었다. 이제는 리시스를 안아드는 팔이 자연스러웠다. 태어났을 때부터 팔에 사람 하나 안고 태어난 사람 같았다. 리시스만 남의 팔다리를 붙인 사람처럼 뻣뻣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제롬은 충실한 시종장의 역할에 충실했다. 아무것도 못 본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사무적인 표정으로 정중하게 앞섰다. 하지만 가슴은 벌렁벌렁 뛰었다.
‘와, 진짜 황후 폐하가 실세가 되어가시나?’
황제를 가지게 되면 결국 다 가지게 되는 것이다. 가진 것 하나 없던 황후의 기대가치가 갑자기 폭발했다. 제롬은 약삭빠르게 태세전환을 한 자신을 칭찬했다. 역시 황궁에서 구른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급조한 방의 준비도 성공적일 것이라 믿어마지않았다. ***
“급히 준비해 미흡한 점이 많습니다. 너른 마음으로 신의 불충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방 앞에서 제롬은 깍듯하게 예를 갖춰 머리를 조아렸다.
“…….”
“…….”
키에르트는 오늘 두 번째로 체성분을 변화시켰다. 돌로. 황제가 돌이 되어버릴 것처럼 굳었는데 제롬은 뿌듯해하고 있었다.
‘이것을 원하셨던 거지요! 말하지 않으셔도 다 압니다!’
그런 표정이었다. 굳다 못해 파스스 흩어질 지경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방은 익숙한 모양이었으나 지금 상황에서는 대체 왜?!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마차가 달리는 사이, 제롬은 방을 부지런히 신방 분위기로 꾸몄다. 키에르트는 황제궁의 많은 건물들 중에서도 가장 보안에 철저히 신경쓰고 밀폐된 곳을 지정했다. 그리고 방 역시도, 철저하게 외부와 단절된, 창문조차 삼중 벽으로 된 곳으로 골랐다. 이 방은 내란이 일어난 수준의 비상상황에 대비해 만든 방이다. 키에르트는 지금까지 한 번도 쓴 적이 없다. 황후궁에 암살자가 든 것은 큰일이기는 하지만, 전쟁터를 누빈 두 분이 비상사태 선언을 할 정도는 분명 아닐 것이다. 그렇다는 건 일부러 외부와 철저하게 밀폐된 방을 ‘폐하께서’ 직접 선택하셨던 것. 밀폐된 방에서 둘이 할 것이 뭐겠는가. 마차에서 벌인 일의 연장선이겠지!
“필요하실 것 같은 것들은 방 안에 모두 구비해 두었습니다.”
“응…….”
“직접 이름을 부르시거나 종을 울리시지 않는 한 외부에서 먼저 문을 여는 일은 결코 없을 터이니 안심하십시오.”
그야 안전을 위한 공간이니 당연한 조치였지만 말에 묻은 뉘앙스는 그렇지 않았다. 편안하게 ‘뭔가를 계속’, ‘잘’ 하라는 응원이 느껴졌다. 오해는 오해를 불러왔다. 이번에도 두 사람은 아니라고 하지 못했다.
“그럼, 편안한 밤 되십시오.”
제롬은 지그시 미소 지으며 문을 닫았다. 마차 문처럼 육중한 문은 체중으로 끌어당겨야 겨우 닫혔다. 쿵 소리가 울리며 문이 완전히 닫히자 방은 완전히 밀실이 되었다. 리시스는 무심결에 숨을 내쉬었다가 지나치게 크게 들려 사레에 걸릴 뻔했다.
“쿨럭! 헉!”
“……이 방이 가장 보안이 좋아 고른 건데……, 다른 의미로 생각할 수 있을 줄은 몰랐어.”
키에르트는 오해를 푸는 것부터 시작했다. 리시스는 아하하하, 힘과 영혼이 누락된 웃음을 흘렸다.
“다른……, 의미……. 오해를 해 준 건 고마운데……, 풀고 싶은데……, 풀 수도 없고……. 그렇죠?”
황제의 최측근인 시종장과 친위대장이 오해했다. 이 정도면 온 제국의 눈을 가렸다고 해도 무방했다. 두 사람의 작전은 몹시 성공리에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성공이 다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오해하는 만큼 더욱 확실한 모습을 보여줘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조여왔다. 이미 지금도 한계치까지 노력하고 있는 중인데, 여기서 더 뭘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이 정도면 노력 말고 실제로도 이미 역사 속의 그 어느 황제 부부보다 친한 것 아닌가.
“그렇지…….”
키에르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두 사람의 관계를 과시하는 것은 충분하다 생각했다. 오늘 암살 시도가 리시스를 향한 것도 그 증거의 하나였다. 리시스가 아무것도 아니라면 아무도 노리지 않았을 테니까. 워낙 둘이 계획 외로 얽힐 일이 많았다. 키에르트도 본의 아니게 리시스와 심적으로 가까워졌다 느끼고는 있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부담스럽다고 거리를 둘 수도 없었다. 그러면 이제까지 해 왔던 노력들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린다.
“우선은 기대에 응해준 다음 차차 정리해 가야지.”
그러니 오늘 밤은 뜨거운 부부인 척, 한 방에서 잘 지내보아야 했다. 하지만 차분한 말과 다르게 키에르트의 속은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침대를 보니 간신히 잊고 있던 리시스의 잠꼬대가 떠올랐다. ……미치겠다.
“기대에……, 어떻게 응해요? 여기서 더?”
리시스도 둘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감지했다. 여기서 뭔가를 더 하려면 실제로 무슨 일을 벌이는 것뿐이다. 리시스가 차라리 키에르트의 목을 따겠다고 했던 그 일. 지금 제롬이 판 깔아 놓은 건 딱 그걸 위함인데, 그걸 하겠다고?
“아니, 아니. 그 소리가 아니고. 아니야!”
키에르트가 기겁하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을 자꾸 짐승같이 보는데, 이미 스스로도 진짜 짐승이 될까 봐 두려웠다. 평소엔 그래도 괜찮았는데, 침대와 리시스를 한데 둔 것이 문제였다. 오늘 리시스의 잠옷은 평범하게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원피스였다. 단추도 목까지 잘 채웠고, 소매도 길었다. 살이 노출되는 부위는 없었다. 누구나 입을 만한 잠옷이었다. ‘벽을 타고 내려오지만 않았으면’ 키에르트도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아까 보았던 훌러덩하던 잠옷. 일전에 입었다 할 수도 없는 옷을 붙이고 굴러다니며 자던 모습. 침대 앞에 리시스를 세워두니 기억과 상상이 절로 더해졌다.
“아니. 아니야. 절대 그럴 일 없어.”
키에르트는 고개를 거칠게 휘저었다. 떠나라, 이놈의 생각. 제발 떠나라.
“폐하가 약속을 그렇게 깨는 사람이 아닌 건 이제 알아요.”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경고등 소리는 듣지도 못하고 혼자 해맑았다. 황제궁의 시종장마저 이 사태를 벌여 놓은 걸 보면, 궁 전체가 두 사람 등을 떠밀고 있는 수준이었다. 이 와중에 정작 주인공인 두 사람만 데면데면했다. 이것 참, 지금까지 잘했구나 스스로 장하면서도 앞일이 난감했다.
“기대만큼 뜨거운 밤까지는 아니어도 한 침대에서 잘 자도록 노력은 해 봐야겠네요.”
“……한, 침대. 후.”
키에르트는 자신과의 싸움 중이었다. 리시스의 티파티 날, 하루 종일 머릿속에 달라붙어 찐득거리던 망상이 돌아왔다. 입은 것 같지도 않은 옷을 입은 리시스, 무방비하게 잠든 리시스, 침대를 굴러다니며 야릇한 자세가 잠깐씩 되었던 리시스, 그 리시스의 뽀얀 살결, 보드라운 머리카락…….
“그만!”
키에르트는 절박하게 외쳤다. 생각, 멈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