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반라의 남편2022.01.02.
황후궁 사람들은 아우성치며 저항했다. 아무리 황제 폐하 앞이라 해도 갑자기 병사들에게 묶여 감옥으로 가게 되었다. 더럭 겁이 났다. 키에르트는 ‘용의자’도 아니고 ‘공범’이라 칭했다. 조사만 받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죄인으로 낙인찍힌 것이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억울합니다! 저희는 아무 짓도 안 했습니다!”
키에르트의 표정은 그 말에 더욱 차갑게 내려앉았다. 스스로 죄를 알고 반성해도 봐줄까 말까 한데, 억울하다 난리까지 쳐? 더욱 가만히 두고 싶지 않았다.
“죄인에게 자비로운 대우는 필요 없다.”
키에르트의 명령에 병사들은 험하게 황후궁 사람들을 묶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저항하고, 울부짖고, 도망치려고도 했다. 그러나 황제의 병사들에게서 도망칠 방법은 없었다. 전쟁통을 방불케 했다.
“어느 선까지 하시려고요?”
리시스는 살그머니 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 키에르트가 나서주면 위력이 강하기는 하지만 리시스의 위엄을 펼칠 기회를 잡기가 어려워진다.
“끝장을 내야지.”
“……저, 그럼, 하녀들 다 다시 뽑아야 해요?”
키에르트의 단호함에 리시스가 삐걱거렸다. 이거까지는 사전 합의 안 했잖아요? 리시스의 눈빛에 키에르트도 정신을 차렸다.
“안전상의 문제라…….”
“하긴. 그럼 어쩔 수 없네요.”
암살 시도로 리시스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직접적으로 황후궁 사람들의 협조가 있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결과적으로는 키에르트의 말이 맞았다. 일이 번거로워졌지만 납득했다. 리시스는 혀를 차며 줄줄이 끌려가는 황후궁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그러게 진작 잘 좀 하지. 황후궁 사람들이 다 끌려나가고, 병사들도 같이 사라졌다. 남은 호위들은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 자취를 감췄다.
“정리가 됐군.”
다시 원래처럼 키에르트와 단둘이 남게 되었다. 그러나 솜사탕을 밟던 것 같던 이전의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암살 시도를 받은 황후궁이다. 거기에 사람마저 싹 빠져 텅 비게 되었다. 보통 사람은 혼자 잘 엄두도 안 날 환경이었다. 리시스는 보통 사람보다 더 겁이 많고 소심했다. 순간적인 대처는 냉정하게 했지만 밤새 황후궁에 혼자 있는 건 생각만 해도 으스스했다. 리시스는 돌아가려는 키에르트를 다급히 불러세웠다.
“자, 잠깐!”
그리고 말보다 빨리 키에르트의 팔에 꽉 매달렸다. 손끝만 닿아도 빨개져서 어쩔 줄 모르던 리시스는 없어졌다. 살고 싶다는 뜨거운 열망에 증발했다.
“으, 응?”
“저! 저 좀! 재워주세요! 아니, 같이 자요! 무서워 죽으면 황후궁 귀신 돼서 저주할 거예요!”
리시스는 자기 혼자 여기 놓고 가면 죽어버릴 거라며 애절하게 협박했다. 곧 뿌애앵 울어버릴 준비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강력한 준비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
“……어?”
있는 대로 벽을 세우던 리시스와 달리 키에르트는 벽이 없었다. 암살 시도까지 있었던, 이 넓은 궁에서 혼자 자려면 당연히 무섭겠지. 아주 쉽게 이해하고 납득했다.
“진짜요? 다행이다!”
“그런데, 기왕이면 일이 있던 황후궁보다는 황제궁에서 지내는 건 어떤가.”
키에르트가 문득 제안했다. 암살자는 잡았지만 방비까지 완벽하게 하긴 어려웠다. 점검을 하는 동안은 황제궁이 더 안전할 것이다.
“좋아요! 좋아요!”
리시스는 깊게 생각할 것도 없이 당장 동의했다. 이 거대하고 무서운 궁전에 혼자 남겨지느니, 어디든 같이 가고 싶었다. 때마침 황후궁 안으로 마차가 한 대 들어왔다. 흙바람을 일으키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들이닥친 마차는 두 사람 앞에 정확히 멈춰 섰다.
“황제 폐하, 황후 폐하! 무탈하십니까!”
제롬이 마부석에서 뛰어내렸다. 그새 황제궁에 연락이 전해진 모양이었다. 그랬으니 시종장이 황제궁을 지키는 대신 직접 마부 옆에 앉아 달려온 것이다.
“안전을 위해 마차를 준비했습니다.”
마차는 그 어떤 암살 시도도 막아낼 수 있을 것처럼 크고 튼튼했다. 두꺼운 문은 마부와 제롬이 달라붙어 끙끙대야 열렸다. 마차는 말을 탄 친위대원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궁 안의 숙소에 있던 인원들은 즉시 소집했습니다.”
미하엘이 인사를 올려붙이며 보고했다. 황제궁으로 가는 길의 안전이 확보되었다. 암살자가 한 명뿐일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안전은 최대한 챙기는 것이 나았다.
“타지.”
“넵!”
키에르트는 리시스를 매단 채 마차로 걸음을 옮겼다.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옆구리에 찰싹 붙어 같이 움직였다. 그 모습에 제롬이 헛, 하고 눈에 띄게 당황했다.
“황후 폐하도 함께 가시는 겁니까?!”
“그렇게 됐어.”
암살 시도가 있었다, 황제 폐하의 위치는 황후궁이다. 여기까지가 제롬에게 들어간 정보였다. 그 사이 키에르트가 황후궁을 싹 쓸어버렸다는 소식까진 전해듣지 못했다.
“주, 주, 주무시고 가시는 거지요……?”
“당분간 황제궁에서 지낼 거다.”
“화, 황제궁에서, 두 분이 같이요?”
“음.”
제롬의 머리가 빠개질 듯 바빠졌다. 무려 황후를 모시는 일이다. 미흡한 점이 있어서는 안 되었다. 황후가 황제궁에 하루 이상 머문 일은 거의 없었다. 보통은 황제가 황후궁에 머물렀다. 국빈은 손님용 궁이 따로 있었다. 황제궁은 오로지 황제만의 것. 황제의 생활 목적으로만 사용되었다. 그 때문에 황제궁은 손님맞이 매뉴얼이 거의 없었다. 굳이 따지면 있긴 했지만 세상이 망하는 마지막 날에나 사용될 법한 고문서처럼 전해 내려왔다. 그 고문서를 꺼낼 날이 제롬이 시종장일 때 와 버렸다. 위기는 원래 준비되지 않았을 때 오는 법이다.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최선을 다한다고 하더라도 완벽할 자신은 없었다. 제롬의 직업인생 최초로 벌어진 사건이었다. *** 마차는 창문까지 나무로 막혀 있었다. 거대한 통 안에 들어온 것처럼 사방이 꽉 막혔다. 하지만 사방에 불빛이 켜져 있었고 움직이는 동안 흔들림도 거의 없어 답답하지는 않았다. 작은 방에 들어와 앉아 있는 것처럼 안락했다. 암살 시도에 놀랐던 신경도 덕분에 빨리 가라앉았다.
“당분간 신세 좀 지겠습니다.”
제정신이 돌아오면 신기하게 부끄러움도 같이 왔다.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팔에 엉겨 붙었던 몸을 슬그머니 떼어내며 엉덩이를 옆으로 옮겼다. 키에르트가 리시스를 흘겨보았다.
“필요할 땐 덥썩 달라붙더니.”
“팔도 감사했습니다.”
리시스는 정중하게 감사를 표하는 것으로 키에르트의 입을 막았다. 손끝도 대지 말라고 한 건 자신인데 자꾸 자신이 먼저 키에르트에게 달라붙었다. 그것도 필요할 때만. 의식을 할 때엔 손끝도 못 대겠고. 의식을 못 할 때는 엉겨 붙고. 대체 왜 이러니. 지금도 키에르트의 팔을 쳐다보자 눈 밑이 화끈거렸다. 계속 팔을 쳐다보고 있을 수도 없어 시선을 옮기던 리시스가 아, 하고 작은 소리를 냈다.
“폐하, 아까 뭔가에 부딪치셨던 것 같은데.”
“아, 아아.”
키에르트도 경황이 없어 잊고 있었다. 리시스의 말을 듣고서야 생각해 냈다. 지금까지 생각이 안 났다는 건 치명상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귀한 황제 폐하의 옥체다. 대충 넘어갈 수는 없었다.
“어디 한 번 봐 봐요.”
“등 어딘가였는데.”
“아프진 않으세요?”
“지금은 괜찮아.”
키에르트는 리시스 쪽으로 등을 돌려 앉았다. 평소에도 크다 생각은 했지만 코앞에 등이 놓이자 더 커 보였다. 눈앞에 성벽이 선 것 같았다. 사소한 감상은 넣어두고, 리시스는 상처 찾기에 집중했다. 하지만 겉옷 색이 짙어 잘 보이지 않았다.
“겉옷 때문에 잘 안 보여요.”
키에르트는 잠자코 겉옷을 벗었다. 겉옷을 벗자마자 속에 받쳐 입은 흰 셔츠에 핏자국이 보였다.
“어! 피 났어요!”
“피?”
리시스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사라졌다. 진짜 다쳤을 줄은 몰랐다. 리시스는 암살자에게 습격을 받았을 때만큼이나 덜컥 겁을 먹었다.
“셔츠도 벗어보세요!”
“……다쳤어?”
“핏자국이 있어요.”
키에르트가 등을 돌린 채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단추를 푸느라 웅크린 등의 주름이 팽팽하게 조여들었다. 리시스는 무심결에 그것에 눈이 가 빤히 쳐다보았다.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근육은 확연한 남자의 몸이었다. 이제까지 크게 의식하고 산 적도 별로 없던, ‘남자’. 너른 어깨를 따라 셔츠가 흘러내렸다. 그러자 우유를 굳혀 만든 것처럼 매끄럽고 흰 등이 드러났다.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등에 넋을 놓았다.
‘왜, 왜 이래.’
눈을 깜빡이며 정신을 차려보려 했는데도 한 번 꽂힌 눈길이 뽑히지를 않았다. 상처를 봐야 하는데 자꾸 등만 쳐다보게 됐다. 키에르트의 등은 조각가가 몇 년이고 공들여 조각한 작품처럼 섬세하고 매끄러웠다. 너무 아름다우면 절로 손이 간다던가. 꽃을 보고도 지나쳤던 리시스는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고 말았다.
“……!”
리시스의 손끝이 닿자 등이 움찔 흔들렸다. 닿았다. 지문이 있는, 아주 작은 면적이지만 살과 살이 닿았다.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리시스는 부모 몰래 사탕단지에 손을 댄 아이처럼 마른침을 삼켰다. 깊이 파인 등골, 우아하게 솟은 날개뼈. 리시스의 손끝이 근육 위를 덧그렸다. 매끄러웠다.
“상처가 거기에도 있나?”
영 다른 곳을 짚는 듯한 손길에 키에르트가 물었다. 리시스는 화들짝 놀라 마차 천장에 머리를 박을 뻔했다.
“아, 아뇨! 혹시 여기에도 있을까 해서 살펴봤어요! 어두워서 잘 안 보여서!”
“……아, 그래.”
석연치 않은 느낌이었지만 키에르트는 그런가 하고 깊게 묻지 않았다. 리시스는 이번에는 진짜 집중해서 상처를 확인했다. 흰 등에 찍힌 상처는 마차의 작은 흐린 조명에도 선명히 보였다. 리시스는 등짝을 감상하던 마음을 잊어버리고 울상이 되었다.
“잘 안 보여요. 피가…….”
암기에 당한 것이면 독 문제 때문에 빨리 알아봐야 했다. 키에르트의 피에 머릿속과 눈앞이 동시에 하얘졌다. 웬만한 피는 봐도 놀라지 않았다. 자신의 손으로 사냥감의 가죽도 벗기는데 피가 무서울 리 없다. 상처야 익숙했다. 렉싱턴 장군의 상처를 급한 김에 꿰매준 적도 있다. 그러나 귀하신 황제 폐하의 옥체였다. 게다가 자신을 감싸느라 생긴 상처다. 그냥, 보통 상처가 아니었다. 큰일이 나서는 절대 안 됐다.
“아, 차라리 내가 다쳤어야 했는데…….”
“뭐?”
“……합.”
무심결에 본심이 튀어나왔다. 사납게 돌아온 키에르트의 기세에 리시스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런다고 튀어나온 말이 도로 삼켜지진 않았다. 바로 전까지 자신의 몸을 소중히 해야 한다고 혼나 놓고서, 그새 까먹었다. 또 혼나겠다. 키에르트의 날카로운 태도를 보면 아닌 척 능청맞게 넘어가기도 글렀다. 혼나기는 싫고, 마차 안에서 도망갈 곳은 없고. 리시스는 쭈글 몸을 움츠렸다.
“황후, 그대는 진짜…….”
키에르트가 겨우 화를 참는 듯 내려앉은 음성으로 중얼거리며 돌아앉았다. 마주보고 앉아 얼굴 보며 제대로 혼낼 분위기였다. 리시스는 더욱 고개를 푹 숙였다.
“잘못했어요…….”
“……!”
그런데 두 사람 다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돌아앉은 키에르트는 상의를 벗은 채였다는 점이다. 즉, 등만 보였는데 이제는 가슴부터 배까지 훤히 보이게 되었다. 홀랑 벗은 남편의 하얀 몸. 리시스는 혼날 준비를 하던 것도 잊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