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달콤한 꿈에 찬물 한 바가지2021.12.30.
“어느 세월에 하나하나 다 뒤져가며 찾고 있어요. 배후를 찾는 것이 급한 상황도 아니고.”
배후를 찾아 따질 것이 아니면 그냥 치워버리는 것이 가장 깔끔한 방법이다.
“그런 다음 하나씩 불러들이면, 잡기도 쉽고, 눈치 보여서 움직이지 못할 수도 있고요.”
각각 다른 집의 쥐들이 한데 모여 사람인 척을 하고 있다. 서로 꼬리를 밟아도 신세가 같으니 모른 척해 준다. 다 쫓아내고 새로 들이려 해도 귀족의 하녀는 끼리끼리 이어져 있다. 자기도 모르는 새 염탐꾼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한 명씩 들여보내면 자신의 차례에 갑자기 정보가 샜다고 들킬까 봐 몸을 사리게 될 것이다.
“겁들 좀 집어먹었다 싶으면 그다음부턴 먹이 하나씩 던져주며 적당히 길들여 보려고요.”
리시스는 호두에 넘어가버린 티티를 잊지 않고 노려보았다. 티티는 당당하게 삥, 코웃음을 치며 키에르트의 다른 쪽 어깨로 옮겨 탔다. 역시 좋은 먹이 주는 사람이 최고다. 진정한 충성심은 노력한다고 얻어지지도 않았다. 그건 리시스가 잘하고 말고를 떠나 본인들의 선택이다. 리시스의 작전은 두려운 주인이자 더 맛있는 먹이를 주는 주인으로 인식되는 것까지였다. 하녀를 전부 새로 뽑아봤자 그 사람이 매수되면 끝이다. 사람 뽑고, 일 가르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목숨 걸린 일이 아니면 대충 사는 게 편했다.
“그대가 그러고 싶다면.”
이번 작전만큼은 키에르트도 동의했다. 스스로의 몸을 불사르는 작전만 아니면 리시스의 작전은 대개 참신하고 효율적이었다.
“그뿐이면 되나?”
“네, 그사이 공식 일정만 잡지 않아주시면 돼요.”
아무리 대충 사는 리시스라 해도 공식 일정에 하녀들의 도움 없이 구질구질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건 피하고 싶었다.
“그야 당연한 것이고.”
“황후궁에서 나간 후엔 제 사람들도 아니니 조사를 하셔도 좋고요.”
“그것도 당연한 거고.”
부자 남편 믿고 집을 불사르겠다더니, 생각보다 소소했다. 부자 남편은 은근히 지갑 자랑이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산불을 기대했는데 성냥개비 수준이라 다소 실망했다.
“그 외엔 뭐 없는데요. 아, 가끔 시종을 보내서 황후궁 청소나 좀 도와주시면 좋으려나?”
“그것 역시 당연하지. 또?”
“……없어요.”
요구를 받는 것만큼 요구할 것을 생각해 내는 것도 어려웠다. 기회는 이때다 이것저것 말해보려 했지만 그것도 생각이 나야 할 수 있다.
“나중에 생각나면 말씀드려도 돼요?”
“언제든.”
이제 티티라는 두 사람만의 전속 연락 담당책도 생겼다. 비밀리에 연락을 주고받는 수단이 있으니 편하게 밀회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누구보다 경계하고 정보가 새어나가지 않게 조심하던 사람에게 등을 부탁하게 되었다. 이 상황이 한편으로 우스워 리시스는 씩 웃었다. 키에르트는 영문도 모르고 리시스의 웃는 얼굴에 자신도 짧은 미소로 답했다. 이런 사소한 짓에도 신뢰가 묻어났다.
“좋아, 용건은 마쳤으니 이제 돌아갈까.”
“네. ……응?”
자연스럽게 키에르트의 무릎에서 해방되려던 리시스의 미소가 사라졌다.
“……저기요, 폐하?”
“음?”
“벌 아직 안 끝났어요?”
“용서한다고 한 적은 없는데.”
키에르트는 리시스를 다시 안아들고 일어섰다. 리시스가 벌로 받아들이면 벌이라고 하면 그만이다. 저 하얗고 여린 맨발이 바닥에 닿는 꼴을 보느니, 악당이 되고 말겠다. 키에르트의 팔에서 느껴지는 강한 억지에 리시스는 물끄러미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남자가 진짜. 하지만 이유가 있어야 설득이라도 하지, 억지는 어쩔 도리가 없다. 리시스는 심호흡 한 번과 함께 몸에 힘을 빼고 키에르트의 팔에 몸을 맡겼다. 맘대로 하세요. *** 가마라면 최상급 성능이다. 키에르트는 흔들림 없는 안정적인 걸음으로 리시스를 황후궁 현관까지 날라주었다. 기어이 흙 위에는 발톱 끝도 닿지 않았다.
“그럼, 전 들어가 볼게요.”
“그래.”
“……안녕히 주무세요.”
그냥 들어가려다 멈칫하며 리시스는 뒤돌아 인사했다. 달빛 아래 조각상처럼 서서 배웅하던 키에르트가 눈썹을 들어올렸다. 입술이 열린 걸 본 리시스는 말을 기다렸다. 말이 나온 것은 꽤 한참 뒤였다.
“……그대도.”
한참을 망설이다 겨우 꺼낸 말은 그것이었다. 너무 보잘것없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최선이었다.
“네.”
리시스는 잠시 당황했지만 곧 활짝 웃었다. 키에르트의 손에 들려 있던 꽃이 자신에게 내밀어졌던 순간이 무심결에 떠올랐다. 남들에게는 정말 별것 아닌 그저 꽃 한 송이였다. 비싼 꽃도 아니고, 길가에 피어 있던 수많은 꽃 중의 한 송이에 불과했지만 리시스의 가슴엔 크게 남은 기억이었다. 평생 채워진 적 없던 부분이 채워진 것 같은 포만감이었다.
“그럼, 저 들어갈게요?”
“그래.”
크림을 잔뜩 문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발바닥에 닿은 차가운 돌바닥의 감촉마저 솜과자처럼 몽실몽실했다. 달짝지근한 느낌에 리시스는 그만 늘 곤두세웠던 마음을 내려놓고 말았다. 리시스가 문에 손을 대는 순간. 키에르트가 리시스의 팔을 거칠게 끌어당겼다.
“꺅!”
놀란 리시스가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며 키에르트의 가슴팍에 얼굴을 부딪쳤다. 키에르트는 얼른 다시 일어서려는 리시스의 어깨를 꽉 안아 자신의 몸에 붙였다. 리시스는 바싹 붙은 뺨에 전달되는 심장소리에 놀랐다.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폐하?”
그러나 놀랄 틈도 없이 챙그랑,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리시스는 깜짝 놀라 키에르트의 품에 안긴 채 고개를 돌렸다. 발치에 눈에 겨우 보일 만한 작은 날붙이가 문에 맞고 떨어져 빙글빙글 돌다 멈췄다. 암살 시도였다. 키에르트가 잡아주지 않았다면 날붙이는 머리를 꿰뚫었다. 간담이 서늘해졌다. 심장이 한 번 크게 펄떡였다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놀란 것은 둘째다. 우선은 대처부터다. 리시스는 신속하게 전시체제로 돌아갔다.
“폐하, 뒤!”
두 번째 공격은 리시스가 먼저 발견했다.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고함에 즉시 반응했다.
“?”
그런데 리시스가 기대했던 반응이 아니었다. 둘이 동시에 몸을 낮춰 각각의 방향으로 흩어지는 것이 기본적인 암살 대응법이다. 키에르트는 완전히 엉뚱하게 움직였다. 리시스의 몸을 자신의 몸으로 포장하듯 감싸고 옆으로 굴렀다.
“윽!”
키에르트의 몸이 무언가에 부딪쳤다. 등을 울린 충격이 감싸인 리시스에게까지 닿았다. 리시스가 그 짧은 순간동안 하얗게 질렸다. 안전이고 뭐고 키에르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자신이 아니면 키에르트가 죽을 상황이었다.
“폐하, 잠깐…….”
“가만히.”
그러나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몸을 꾹 눌러 움직임을 막았다. 혹시 어디가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리시스는 힘을 쓰지도 못했다. 키에르트의 품에 안긴 채 숨죽이며 시간이 흘렀다. 이어지는 세 번째 공격은 없었다. 공격 대신 황후궁을 둘러싼 사방에서 소란이 일었다.
“쫓아!”
“저쪽!”
아무도 없는 것 같았던 숲 이곳저곳에서 동시에 고함이 솟구쳤다. 숨어서 호위하던 병력이었다. 암살자는 도망치느라 세 번째 공격을 시도하지 못했다.
“하…….”
리시스는 몸을 늘어뜨리며 긴 숨을 쏟아냈다. 키에르트의 단단히 굳었던 몸도 살짝 긴장이 풀렸다.
“괜찮나?”
“네, 저는…….”
키에르트는 몸을 일으키며 리시스의 안위부터 확인했다. 리시스는 아직도 정신이 얼떨떨해 고개를 휘휘 저었다. 달콤한 꿈을 꾸다가 찬물을 맞은 기분이었다. 꽃 한 송이의 달콤함에 취할 시간조차 주지 않는다니. 현실은 참 잔인했다.
“무슨 소란……, 폐하?!”
호위들이 암살자를 쫓는 소리는 온 황궁을 흔들었다. 곤히 잠들었던 황후궁도 수런수런 깨어났다. 먼저 나와 봤던 잠귀 밝은 하녀가 현관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하고 펄쩍 뛰었다. 키에르트의 기준에는 늦어도 한참 늦은 등장이었다.
“황후궁의 호위들은.”
“예, 예? 어, 어. 왜 없지? 교, 교대 시간인가…….”
감히 황제 폐하의 존안을 실제로 뵙는 것도 모자라, 질문을 직접 받기까지 했다. 하녀는 겨우 기절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러나 키에르트의 눈빛에 냉랭함을 가중시키는, 몹시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
“하녀들은 모두 자고 있었고, 호위는 자리를 비우고.”
애초에 모든 사람이 잠들어 있던 것이 말이 되지 않았다. 첫 번째 공격의 챙그랑 소리가 들리자마자 불침번을 서던 사람이 달려 나왔어야 했다.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키에르트의 추궁에 하녀가 바짝 엎드렸다. 심상치 않은 키에르트의 분위기에 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그러는 동안 하녀장을 포함한 황후궁의 다른 인원들도 몰려나왔다.
“폐, 폐하!”
“이게 무슨 일…….”
처음에는 어수선하며 당황하던 이들도 키에르트와, 바닥에 떨어진 암기를 보자마자 상황을 파악했다. 아무리 현관이라고는 하나 황후궁 안에서 암살 시도가 일어났다. 모두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키에르트는 말없이 그들을 노려보았다. 공기가 에어들었다. 황후궁 사람들은 살려달라, 죽여달라, 읍소조차 하지 못하고 그저 엎드려 벌벌 떨었다. 키에르트의 입은 숲에서 몇 명의 기사들이 다가왔을 때에야 열렸다.
“추격은.”
“생포했습니다.”
“가둬. 그리고.”
“예.”
암살자의 보고를 받을 때까지도 건조했던 키에르트가 황후궁 사람들을 돌아보며 독으로 가득 찬 바다처럼 출렁였다. 암살자야 시키는 일만 했을 뿐이다. 고문하고 죽이긴 하겠지만 사감은 없다. 그러나 시킨 일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 황후궁의 인원은 암살자보다 더 분노할 대상이었다. 암살자가 이렇게까지 침투할 수 있던 것은 그만큼 황후궁에 구멍이 많았다는 소리다. 아직 황궁에 적응하지 못한 리시스가 놓친 부분이 있어도 잘 메꿨어야지. 암살자가 황후궁 앞마당에 숨어들 때까지 아무도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그건 공범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공범들도 같이 가둬.”
“폐, 폐하?!”
“사, 살려주십시오, 폐하!”
황후궁 사람들은 경악했다. 때마침 소식을 들은 경비병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태만이 암살자의 침입을 묵과하는 것이 되었으니 이는 명백히 황족 위해죄에 속한다.”
키에르트의 판결에 리시스조차도 흠칫하며 돌아보았다. 휴가 줘서 내보내기는 살짝 협박 치고는 약하다 싶어 아쉽던 차였다. 암살 시도는 경악할 일이었지만 잘만 엮으면 쓸 만하겠다, 리시스도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런데 키에르트가 웬일로 리시스보다 더 과격하게 상황을 끌고 갔다. 황족 위해죄는 처벌이 무거웠다. 사형까지도 가능한 죄였다.
‘설마 집 태워버린다는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건 아니겠지……?’
이 자리에서 물어볼 수는 없었다. 설마 아닐 거야, 리시스는 스스로를 위로했다. 부부는 닮는다더니 키에르트가 자신의 과격한 작전을 닮아가는 것 같아 기분이 착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