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부자 남편2021.12.26.
“폐, 폐하?!”
키에르트는 근처에 보이는 나뭇등걸에 걸터앉았다. 리시스를 안은 채로. 자연히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무릎에 앉게 되었다. 안긴 것도 모자라 이제는 무릎에 앉히기까지?!
“이것까지 벌이에요?”
키에르트가 잠시 버벅거렸다. 거기까지 생각해서 행동한 것이 아니었다. 리시스를 안은 채 더 시선을 받고 있다가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였다. 앉으면 덜하지 않을까 하는 가벼운 마음이었다.
“……벌이야. 그러니 얌전히 있어.”
굳이 벌인지를 따지자면 키에르트 쪽에 더 가혹한 벌이었다. 리시스는 부끄러움을 참는 정신적인 벌이지만 키에르트는 몸이 터질 것 같은 육체적인 벌이었다. 벌을 받을 이유도 없는데 받는다는 점에서 정신적인 것도 가중되었다. 심장이 콕콕 찔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터질 것 같았다. 허벅지 위에 사뿐히 내려앉은 체중이 심장을 눌렀다. 허벅지와 심장기능은 관련이 있다더니. 허벅지에 자극이 오면 심장에 무리가 가는구나. 앞으로 하체를 더 잘 단련해야겠다. 키에르트는 심장의 고통을 그렇게 해석하기로 했다.
“그치만 폐하도 불편해 보이시는데…….”
“아니. 전혀. 나는 그대를 벌줄 생각밖에 없어.”
“……그러시다면야…….”
키에르트는 리시스를 절대 놓지 않았다. 리시스의 맨발이 땅에 닿는 것을 생각하니 불쾌감이 훅 치고 올랐다. 그 불쾌감이 가슴의 압박, 통증보다 컸다. 키에르트는 리시스가 제 발로 일어서 버릴까 봐 허리를 감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스스로의 죄를 인정한 리시스는 저항할 생각이 없었다. 얌전히 키에르트의 품에 몸을 맡겼다.
“오늘따라 처벌이 가혹하세요.”
그래도 투정 같은 항의는 남겨놓았다. 적장의 비밀연락을 전서다람쥐를 통해 받은 대역죄도 그냥 봐 줬으면서, 제 몸 제대로 챙기지 않았다고 이런 긴 처벌이라니. 몸이야 편하긴 했지만 남자 품에 안긴 마음은 태풍 치는 바다 위에 떠다니는 낙엽처럼 요동쳤다. 키에르트의 허벅지는 탄탄하고 안정감이 있었다. 소파보다는 단단하고, 의자보다는 탄력 있었다. 질감만 치면 하루 종일 앉아 있어도 불편하지 않을 만큼 훌륭했다. 그러나 키에르트는 의자가 아니다. 황제다. 황제의 무릎 위에서 편하게 뒹굴 수 있는 것은 티티뿐이었다.
“삐잉?”
어느샌가 뽀르릉 따라온 티티는 보란 듯 키에르트의 무릎이며 어깨를 누비며 즐겁게 뛰어놀고 있었다. 그새 이렇게 친해졌다고? 하긴 키에르트와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었던 건 티티 덕분이다. 리시스에게 돌아온 것은 당연했지만 다음 소식을 물고 키에르트에게 간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티티는 여차하면 전장의 렉싱턴 장군에게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키에르트에게 꼬박꼬박 리시스의 쪽지를 전했다.
‘너 이 불충한 다람쥐.’
눈앞에서 손으로 으깨 준 호두가 그리도 맛있더냐. 본인도 먹을 것으로 사람을 홀린 주제에, 리시스는 자기 생각은 못 하고 티티를 째려보았다.
“삡?”
티티는 모른 척 눈을 돌리고 키에르트의 목 뒤로 숨어버렸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따라갔던 리시스는 어, 하고 흠칫 굳었다. 목 바로 위에 있는 것은? 얼굴. 얼굴에 붙은 것은? 눈코입. 눈이 마주쳤다. 또네. 또다. 요즘 들어 유난히, 유난히 눈이 더 잘 마주치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일까? 그냥 우연일까? 아니면 자신이 키에르트를 많이 보고 있었나? 그도 아니면 키에르트가 자신을 더 많이 보았나? 리시스는 눈치를 보며 시선을 내렸다.
이상하게 키에르트와는 눈을 잘 마주칠 수 없었다. 손잡는 것도 그렇고, 남들이랑 뭔가 달랐다. 별것 아니라 생각하면 아무렇지 않을 수도 있는 건데. 역시 남편이라 그런가? 이름뿐인 관계여도 뭔가 다르긴 다른가 보다. 어색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리시스가 여기까지 온 이유를 끄집어냈다.
“근데요……. 하실 얘기가 엄청 은밀하고 중요한 얘기 아니었어요?”
“그런 얘기긴 해.”
“이 자세로 그런 얘기를 해도 괜찮아요?”
지금은 딱 저녁이 맛있었지, 오늘은 별도 잘 보인다. 우리 자기 눈빛처럼 반짝거리네. 이런 대화나 주고받아야 어울릴 것 같은데.
“안 될 건 없지.”
“……네.”
키에르트는 뜻밖의 부분에서 자유로운 사고를 가졌다. 이야기를 할 본인이 괜찮다는데 뭐 어쩌겠나. 리시스가 다소곳이 들을 준비를 하자 키에르트가 본론을 꺼냈다.
“나와 렉싱턴 장군의 군대가 각각 위기에 빠졌어. 그대는 한쪽으로만 지원군을 보낼 수 있지. 어느 쪽으로 보낼 건가?”
“……?”
리시스는 귀를 의심했다. 이건 저번에 ‘물에 빠졌을 때’ 이야기의 기출변형이었다. 자세도 이런데 중요한 얘기랍시고 왜 질척거리는 남자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건가. 그때 리시스의 머릿속에 설마, 하는 가정이 스쳤다.
“폐하, 이건 그냥 제 순수한 걱정인데요.”
“걱정?”
“혹시 연애하고 싶으세요?”
“……뭐……?”
키에르트는 한 대 맞은 표정으로 리시스를 내려다보았다.
“사람이 가끔 연애가 고플 때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아직 그 때가 안 와서 잘 모르겠는데, 폐하가 혹시 그때이신가 해서…….”
“그 질문은 대체 머릿속의 어느 경로를 통해 도출된 거야.”
“요즘 폐하 하시는 게, 딱 남들이 연애할 때 하고 싶은 것들……, 같은 느낌이……. ……제 착각이었나 봐요.”
리시스는 말을 하며 스스로 답을 찾았다. 아무리 키에르트가 궁해도 자신을 대상으로 할 리가 없었다. 자신들은 엄연한 동맹관계였다. 동맹이 아니었으면 적이다. 연애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전제였다.
“아무튼, 동맹 유지를 해야 하니 남들 다 알게 연애를 하시는 건 곤란하고요.”
“안 해, 생각 없어. 아무리 형식적인 결혼이어도 도덕적으로 싫어. 그리고 내가 지금 연애할 기분으로 물어본 것 같나?”
“아뇨, 절대 아닙니다. 그럴 리가 없으시죠.”
리시스는 눈치가 빨랐다. 진심, 그 밑바닥의 진심까지 내보여줄 수도 있다는 절대적인 진실의 눈빛으로 대답했다. 암, 우리 폐하께서는 연애 같은 건 관심 없으시다. 나라를 위해 적국의 공주와 결혼을 하겠다고 나서신, 스스로의 인생마저 말아버린 분이니까.
“그런데 그 질문은 왜요? 폐하께서 절 구하시는 걸로 끝난 것 아니었어요?”
“아니지. 이번엔 전쟁에 관한 일이잖아. 실제로 벌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고.”
“저한텐 군사가 없는데…….”
현실적인 지적이었다. 키에르트는 조금 더 구체적인 예시를 구상했다. 리시스 덕분에 상상력이 날로 발전한다.
“로구안이 병력을 키워서 두 나라를 동시에 공격했다고 쳐. 나와 렉싱턴 장군이 각각 군대를 출전했는데 둘 다 위기에 처한 거지. 그대에겐 내가 남겨놓고 간 수도 방위군이 있어. 거리는 동일, 승산도 동일. 하지만 군사를 쪼개면 둘 다 죽어.”
리시스는 상상만으로도 숨이 턱 막혀 살짝 창백해졌다. 그런 상황이 벌어지기 전에 막을 수 있으면 막아야지. 키에르트가 그렇게까지 무능할까 싶지만 세상일은 모른다.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는 있다. 리시스는 차갑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생각을 좀 해 볼게요.”
“오래 걸려도 괜찮아. 잘 생각하고 답해.”
한참 고민한 뒤 리시스는 신중히 답을 내놨다.
“폐하께서 승하하시면 쉬란은 혼란에 빠지고, 렉싱턴 장군이 돌아가시면 에드린이 위태로워지겠죠.”
“그렇겠지.”
개인적인 감정만 고려하면 당연히 렉싱턴 장군을 구하고 싶다. 하지만 쉬란이 흔들리면 에드린은 일차 방어막을 잃는다. 위기에 빠지는 것은 똑같다. 그렇게 되면 리시스의 신세가 다시 처량해질 것은 뻔한 일. 감정은 배제하고, 최대의 이익을 생각했다. 로구안을 제압하고 자신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방법.
“폐하께 보내겠어요.”
“그 때문에 렉싱턴 장군이 죽고, 에드린이 망한다 하더라도?”
“에드린은 망하든 말든.”
지금도 크게 도움 되는 것 없는 본국이다. 있든, 없든 리시스에게는 큰 관계가 없었다. 어린 리시스를 데려다 놓고 구박만 했던 사람들 역시 죽든, 말든이다.
“폐하를 살려야 저도 살아요.”
이보다 더 확실한 확답은 없었다. 덕분에 키에르트도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키에르트는 주머니에서 에드린 왕의 편지를 꺼내 리시스에게 건넸다.
“……읽어야 돼요?”
에드린 왕의 인장을 확인한 리시스가 얼굴을 구겼다. 편지만 봐도 화가 났다. 읽을 필요가 없으면 당장 박박 찢어 불살라 버리고 싶은데.
“그대가 확인해 줬으면 좋겠어.”
“……하아.”
키에르트가 부탁을 하니 거절할 수 없었다. 리시스는 한숨을 내쉬며 봉인을 뜯었다. 전장에서 가장 받기 싫은 것 중 하나가 에드린 왕의 편지였다. 황궁에서도 받기 싫은 건 마찬가지였다. 내용을 확인하니 아니나 다를까. 리시스의 손 안에서 편지가 우그적 찌그러졌다.
“어떻게 생각하나.”
“찢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해요.”
“……그건 나중에 하고.”
키에르트의 말에 리시스는 겨우 이성의 끝자락을 잡았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니 바로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
“황후궁에 에드린의 쥐도 얹혀살고 있었어요?”
“그런 것 같지?”
봉인이 그대로인 편지의 내용을 키에르트가 알고 있는 것은 놀랍지 않았다. 그런 기술은 에드린 쪽에도 있었다. 하지만 에드린 왕이 쉬란의 황성에 침투시킬 만큼 실력 있는 첩자를 가진 건 놀라웠다.
“그런 인재가 주변에 없었을 텐데…….”
“매수했을 수도 있지.”
“그만큼 돈이 있었구나…….”
“그래도 왕인데 그 정도도 없었을까.”
“그럴 돈이 있었으면 전선에 빵 하나라도 더 보내지. 망할 놈.”
리시스의 거침없는 패륜 대사에 키에르트는 마른침을 삼켰다. 피칠갑 하고 가죽 벗기는 모습은 야성적이고 멋지게 볼 수 있지만 패륜은 충격이었다. 정작 본인은 키에르트의 앞이라 더 심한 욕을 참느라 힘들었다.
“렌데일 공작가의 쥐도 잡기 힘들어 죽겠는데, 에드린의 쥐까지 들어왔네요.”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
“일단 다 휴가 줘서 내쫓아 버린다 했어요.”
“……응?”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파격적인 작전에 눈을 크게 떴다. 귀족 여성조차 하녀 두셋은 기본적으로 달고 산다. 하녀가 없으면 목숨줄이 끊어진 것처럼 난리가 난다. 생활 자체가 안 되는 것이다. 더구나 리시스는 황후다. 무조건 사람 손을 거쳐야 하는 일이 끝없이 많을 것이다.
“……어쩌려고?”
이번에도 리시스는 태평하고, 키에르트는 조바심이 났다. 리시스는 남 일처럼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어떻게든 되겠죠. 저는 쥐 한 마리 잡자고 집안 살림 다 뒤지는 꼼꼼한 성격은 못돼서요.”
“그렇다고 하녀를 다 내보내는 건…….”
“부자 남편 뒀잖아요. 확 집에 불질러 버리는 게 시원하고 깔끔하지 않아요? 집이야 다시 지으면 되니까. 그쵸?”
부자 남편의 지갑 의견도 들어봐야겠지만, 리시스는 그런 세세한 것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 그렇지.”
부자 남편은 당연히 동의할 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