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죽을 맛2021.12.23.
키에르트는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리시스의 예기치 못한 공격에 뒤를 당할 때 꼭 이랬다.
“황후?”
보지 말라는 리시스의 당부는 비상상황이니 무시했다. 고개를 돌려 리시스가 있던 창문을 올려다본 키에르트는 경악했다. 그냥 휙 뛰어내렸다면 그 길이 가장 빠르지, 하고 납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리시스는 엉금엉금 벽을 타고 있었다.
“무슨 짓이야!”
키에르트는 아슬아슬하게 벽에 붙은 리시스를 보고 정신이 그만 혼미해졌다.
“쉬이잇!”
리시스는 자신이 위험하다는 자각도 없는지 한 손을 떼어 입술 앞에 세우기까지 했다. 그 모양에 키에르트는 눈뜨고 기절할 뻔했다.
“아, 알았어. 조심히.”
일단은 무사히 내려오는 것이 중요하다. 키에르트는 두 손을 벌리며 침착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리시스보다 스스로를 위한 조치였다. 저럴 줄 알았으면 그냥 쪽지나 주고받을걸.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키에르트의 속도 모르고 리시스는 침착하게 움직였다. 신중하게 돌을 짚으며 조금씩, 조금씩. 본인은 최선을 다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밑에서 지켜보는 키에르트는 생각이 많아졌다. 통으로 된 원피스 잠옷. 이따금 부는 바람. 휑하니 흩날리는 치맛자락. 올려다보자니 민망한 노출을 직면하게 되고, 눈을 떼자니 혹시 떨어질까 봐 조마조마했다. 죽을 맛이었다.
“음……, 여기서는…….”
1층 창문쯤에서 리시스는 내려가는 길을 찾지 못하고 멈췄다. 이리저리 둘러봐도 발을 걸칠 만한 곳이 없었다. 한참 그대로 멈춰 고민하는 동안 바람이 휭 불었다. 치맛자락이 펄럭 일어서며 허리까지 올라갔다.
“꺅!”
“…….”
그제야 리시스도 자신이 어떤 꼴을 하고 있었는지 자각했다. 황급히 한 손으로 치맛자락을 부여잡으려 했지만 펑퍼짐한 치마는 걷잡을 수 없었다. 하필 오늘은 밤바람도 거셌다.
“그냥 뛰어.”
키에르트가 벽 가까이 다가가 두 팔을 벌렸다. 애초에 창문에서 뛰었다 하더라도 리시스 정도의 가벼운 몸은 받아내고도 남았다. 처음부터 그냥 뛰라고 할 걸 그랬다.
“예? 뛰라고요?”
“제발 뛰어.”
키에르트는 애원했다. 더 이상 이 꼴을 보고 있다가는 정신이 무너져내릴 것 같았다.
“어, 아, 음…….”
키에르트 하나만 믿고 뛰어야 했다. 이러는 동안에도 손에서는 힘이 빠져나갔다. 맨바닥으로 뛰는 것보다는 키에르트에게 뛰는 쪽이 나았다. 리시스는 두 눈을 꼭 감고 몸을 날렸다. 긴 머리카락과 옷이 종잇장처럼 팔락팔락 흩날렸다.
“!”
리시스의 몸은 키에르트의 팔에 내려앉는 무게도 사뿐했다. 마치 팔 안에서 스러져버릴 것처럼 가벼웠다. 힘주어 잡지 않으면 그대로 흩어져버릴 것 같은 불안감에 키에르트는 두 팔에 힘을 꽉 주어 붙잡았다. 흩날리던 머리카락이 키에르트의 어깨 위에 흘러내리며 무게가 팔에 실렸다. 이제야 잡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하.”
키에르트는 한숨을 몰아쉬었다. 짧은 사이, 땀이 죽 흐를 정도로 긴장했다. 리시스도 숨을 몰아쉬며 몸을 늘어뜨렸다. 그러자 조금 더 키에르트의 팔이 묵직해졌다. 그 무게가 마음에 들어 키에르트는 팔에 준 힘을 풀지 않았다.
“감사해요. 덕분에 살았어요.”
“이 작전은 뭐지?”
놀란 키에르트가 당장 야단부터 쳤다.
“계산상으로는 괜찮은 작전이었는데요……. 제가 생각보다 벽을 못 탔네요.”
리시스는 머쓱하게 변명했다. 실행능력에서 오차가 생길 줄은 몰랐다.
“그래도 안 들키고 나오는 건 성공했잖아요.”
결론적으로 성공했으니까 된 거지. 리시스는 깔끔하게 결론지으려 했다. 그러나 키에르트는 넘어가 주지 않았다.
“그러다 다치면 어쩔 거야.”
“안 다쳤잖아요.”
“내가 없었으면 진짜 다쳤을 수도 있어.”
“안 다치고 잘 끝났잖아요. 왜 일어나지도 않은 ‘만약에’를 자꾸 생각하세요.”
키에르트는 이를 악물었다. 사람이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도 모르고,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겸업으로 무 농사라도 지었나. 사람 정신을 어떻게 이렇게 무 뽑듯이 쑥쑥 잘도 뽑아대는지.
“그래서 또 위험한 짓을 하시겠다?”
“……안 해요. ……아닌가? 이따가 다시 기어 올라가야 하나?”
“들어갈 때까지 그럴 필요는 없잖아.”
들어갈 때는 누가 깨어나도 혼자 산책하러 나갔는데 아무도 안 깨더라, 는 식으로 둘러댈 수 있다. 굳이 리시스가 벽을 타고 오르는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었다.
“아, 맞다.”
지적을 하자 그제야 깨닫는 모습에 키에르트의 속이 다시 끓는점을 넘었다. 부글부글. 진짜 조심할 거였으면 지적하기 전에 생각했어야지. 스스로 조심하겠다는 자각이 없는 것이 너무 뻔히 보였다.
“그런데, 이제 내려주셔도 되지 않을까요……?”
“맨발로?”
“맨발로도 서는 데는 문제없어요.”
“당장 여기서 얘기할 건 아니고 이동할 거야.”
“저 발바닥 튼튼해요.”
발바닥은 다쳐도 돼? 키에르트는 어이가 없어 화를 낼 기력마저 잃었다.
“튼튼하고 말고 문제가 아니라 황후로서 자신의 몸을 소중히 하라는 말이야.”
“아. 그 점은 죄송해요.”
최단 시간, 최고 효율을 챙긴 건 잘했지만 황후로서의 자각이 부족했던 것은 맞았다. 황후는 혼자만의 몸이 아니다. 리시스의 안전을 책임지는 여러 사람들의 일자리와 두 나라의 평화까지 걸려 있다. 목숨만 생각했는데 작은 상처도 논란의 여지가 될 수 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리시스는 깔끔하게 자신의 과실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사과가 아니라…….”
“네. 앞으로 황후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고 항상 몸 관리에 유의하는 것도 잊지 않을게요.”
스스로 생각해도 깔끔한 대처였다. 과실 인정, 후속 조치.
“…….”
그런데 돌아온 것은 키에르트의 어이없다는 시선뿐이었다. 또 왜. 또 뭐. 하지만 리시스의 머리에는 더 이상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궁리 끝에 겨우 하나 짜냈다.
“……아. 제가 신발을 챙기지 않아서 폐하께서 팔이 아프시겠네요.”
“말고.”
“번거로움도 추가?”
“…….”
키에르트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밤, 자신이 쏟아낸 한숨으로 하늘이 무너지진 않나 걱정이 되어서. 황후가 아니라 공주로서도, 아니, 그냥 사람으로서 자신의 몸을 소중히 하는 건 기본이다. 다쳤을 때 내색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길 수는 있다. 약한 소리 하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도 있다. 그러나 리시스는 애초에 자기 자신을 스스로 소중히 해야 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개념은 당장 가르친다고 알게 되는 것이 아니었다.
“앞으로는……, 몸에 신경을 좀 더 잘 써.”
“네, 폐하께서 신경쓰시지 않도록 알아서 잘 할게요.”
“…….”
키에르트는 체념을 배웠다. 가만 생각하니 자신이 이렇게 열을 내는 이유도 잘 모르겠다. 리시스가 스스로 관리를 못해도 주변에서 적정선은 지켜 줄 것이다. 황후로서 크게 문제될 건 아니다. 이런 사고만 자꾸 치지 않으면. 오늘 일은 어쩌다 일어난 사고였고, 이런 일이 늘 일어날 건 아니다. 그러니 자신은 신경을 꺼도 됐다.
“하…….”
그래도 한숨이 쏟아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주눅이 들어 얌전히 몸을 옹송그리고 있던 리시스는 한숨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늘 올려다보는 키에르트지만 이렇게 바싹 붙어 턱선을 보는 것은 익숙하지 않았다. 끌어안겼을 때나 잠자리에서나 잠깐 봤던…….
“……으아.”
“왜.”
걷기에 바쁜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부끄러움을 빨리 발견하지 못했다.
“계속 안겨있으니까 부끄러워서요…….”
리시스가 손가락을 꼬물꼬물거리며 물었다. 동시에 발가락도 수줍게 모아 꼬물거리고 있었다. 손도 못 잡아 꺄악꺄악 거리던 사람이다. 안기는 것이라고 자연스러울 리가. 하지만 키에르트는 또 화를 낼 뻔했다. 왜 손가락 발가락을 꼬물거려! 그건 잘못이 아니었다. 쑥스러워서 꼬물거리는 걸 뭐라고 할 수는 없다. 아는데. 아는데 화가 나는 걸 어쩌나. 갑자기 분노를 조절하는 신경에 문제라도 생긴 것인지도 모르겠다. 키에르트는 하늘을 쳐다보며 숨을 한 번 골랐다. 여기서 리시스를 내려 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리시스의 열기가 옮은 것인지, 가라앉던 화가 다시 치솟아 버린 것인지 훅 올라버린 열을 가라앉힐 시간이 필요했다.
“벌이야.”
“벌은 폐하께서 받고 계신 것 같은데요…….”
벌써 걸어온 길이 한참이다. 슬슬 내려줘도 될 만큼 으슥한 곳까지 온 것 같은데, 키에르트는 좀처럼 멈출 기색이 없어 보였다.
“참는 것도 벌이야.”
“…….”
품에서 벗어나려는 리시스의 시도를 일축하는 한 마디였다. 그 말에는 리시스도 꼼짝 못 했다. 민망하고 부끄러운 것이 벌이라면 달게 받아야지, 별수 있나. 죄인은 할 말이 없었다. 키에르트는 굽이굽이 뒷길을 걸었다. 이게 어떻게 이렇게 이어지나 싶은 지름길과 뒷길들 사이를 누볐다. 처음에는 대충 외우던 리시스도 중간부터는 방향감각마저 잃어버렸다. 황궁의 굽이굽이 숨은 길들은 역시나 어려웠다. 백골사체, 남 일이 아님을 오늘도 다시 새겼다.
“……어디까지 가세요?”
벌이니 얌전히 받아들여야 하지만 멀어도 너무 멀리 왔다. 앞만 보고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는 키에르트의 분위기가 하도 흉흉해서 그 질문을 꺼내기까지도 한참이 걸렸다. 리시스의 질문에 키에르트는 드디어 걸음을 우뚝 멈췄다.
“몰라.”
“……네?”
“지금 나도 어디까지 갈지 고민하는 중이니까 그대는 가만히 기다려.”
“?”
뭔 소리야. 하지만 키에르트의 심각함에 따지지는 못했다. 대신 입 대신 눈을 움직였다. 입은 다물었으나 눈은 소리가 나지 않았다. 힐끔, 힐끔.
‘뭘 고민하시는데요? 왜 고민하시는데요? 어디까지 갈 생각이신데요?’
눈빛이 시끄러웠다. 리시스의 말마따나 벌은 키에르트가 받는 것 같았다. 팔이 아프진 않았다. 하루 종일 들고 있어도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벼운 몸이었다. 눈빛이 문제였다. 온 얼굴이 다 따끔따끔했다. 리시스의 눈빛은 피부를 뚫고 들어가 온몸을 돌아다니기라도 하는지 심장까지 뜨끔거렸다. 몹시 고통스러웠다. 결국 키에르트는 더 멀리까지 나가지 못하고 걸음을 멈췄다.
“슬슬 얘기를 시작할까.”
이미 멀리 와서 더 인적 드문 곳을 찾아 숨을 필요도 없었다. 겉으로 보이는 호위조차 없었다. 단둘뿐인 숲속이었다.
“네. 그럼…….”
내려주세요, 라고 리시스가 끝까지 말을 하기도 전이었다. 키에르트가 행동해 버렸다.
“?!”
리시스는 깜짝 놀라 튀어오를 뻔했다. 그러나 키에르트의 품 안이었다. 벗어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