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구남친, 구남편?2021.12.19.
리시스도 청소를 명했지만 생각만큼 청소가 잘 되고 있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집 구조를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칠 수 있었다. 쥐는 예민하다. 사람의 아주 작은 행동마저도 읽고 민첩하게 움직였다. 키에르트는 편지의 봉랍을 손끝으로 건드리며 생각에 빠졌다. 어디에 적이 숨었는지 모를 때는 모든 것에 신중해야 한다. 한 걸음, 한 숨까지도. 이 편지를 전달할까 말까, 리시스에게 청소를 도와주겠다고 말을 할까 말까. 웬만해서는 직접 연락을 하지 않는 것이 나았다.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것 자체로도 누군가에게는 정보가 될 수 있었다. 고민하는 중에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티티가 뽀륵거리며 키에르트를 돌아보았다.
“뭐, 호두 또 줘?”
“삐잉.”
“호두 말고 왕밤?”
“삑!”
호두는 벌써 질렸나 보다. 입맛도 가지가지였다. 티티를 데리고 들어오면서 견과류를 좀 더 가지고 오라고 했더니 온갖 종류를 다 갖춰놓았다. 호두와 아몬드밖에 없을 땐 호두만 쳐다보더니, 종류가 다양해지니 더 따졌다.
“황제 폐하가 아주 만만하시지?”
“삐이잉?”
아닌 척해도 그런 게 훤히 보였다. 키에르트는 괘씸한 새앙다람쥐의 코를 톡 건드려 혼쭐을 냈다. 티티는 삑삑거리며 즉시 항의했다. 그래봤자 귀여울 뿐이었다.
“그래, 그래. 이거 먹고.”
키에르트는 혼내놓고 바로 기분을 풀어주려 밤을 내밀었다. 티티는 삐죽거리면서도 자그마한 두 앞발로 밤을 낚아채 책상 끄트머리로 도망갔다. 왕밤은 꽤 커서 한입에 들어가지 않았다. 소중한 보물처럼 쑤셔 넣었던 구슬을 다시 퉤 뱉어버렸다.
“아.”
덕분에 키에르트는 힌트를 얻었다. 이렇게 좋은 전령을 두고 왜 쓸데없는 고민을 했는가.
“티티.”
“삑?”
“밥값 좀 해 줘야겠어.”
“삐……?”
아무리 다람쥐라도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키에르트는 다른 사람을 써먹는 데 이골이 난 사람이었고. 키에르트는 협박과 회유를 섞어 왕밤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고는 주저 않고 서랍에 쏙 넣어버렸다.
“심부름 한 번 하자.”
“삐.”
티티도 모르는 척하지는 않았다. 확답을 받은 키에르트는 칭찬하듯 콧잔등을 손가락으로 몇 번 문질러 주고 펜을 들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시간이 늦었다. 낮에 리시스와의 예기치 못한 만남으로 시간을 써 버려서 지금은 새벽이었다. 내일로 미룰까 했지만 이미 티티의 왕밤을 빼앗아 버렸다. 오늘 중에 마무리하지 않으면 다시 물릴지도 몰랐다.
“그래, 일단 보내 보지.”
키에르트는 마음을 정했다. 리시스가 볼지 안 볼지 모르고, 티티가 제대로 심부름을 할 수 있을지 모르니 최대한 짤막하고 간단하게 적었다. 구슬에 돌돌 만 쪽지를 넣고 다시 물려주자 티티는 알아서 삑 소리를 내고 창문으로 포르르 사라졌다.
*** 고민하기 시작하면 계속 얽매이는 키에르트와 달리 일단 자고 내일 생각하는 리시스는 이미 침대였다. 토톡, 톡. 눈을 감고 거의 잠으로 빠질락 말락, 하기 직전이었던 리시스는 창문을 두드리는 작은 소리에 눈을 떴다. 리시스는 예민하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쉬란의 황궁에 들어온 이래로 직접적인 암살 시도는 없어서 요새 좀 많이 무뎌지기는 했다. 그래도 그 소리를 놓칠 정도는 아니었다.
“뭐야?”
침대에 앉아 소리가 들려 온 창문을 향해 물었다. 당연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그 어느 암살자도 ‘너의 목을 따러 왔다!’ 같은 대사를 실제로 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건 하수다. 입 놀릴 시간에 칼 한 번 더 휘두르는 게 낫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칼이 날아오지는 않았다. 리시스는 조심조심 창가로 다가갔다. 다시 토톡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바로 알아차렸다.
“티티?”
“삐!”
리시스는 후다닥 커튼을 걷었다. 티티가 창틀에 붙어 선 채 꼬리를 살랑였다. 창문을 열어주니 기다렸다는 듯 뽀로롱 달려 들어와 리시스의 팔에 몸을 감았다.
“너 여긴 어떻게 왔어? 도망쳤어?”
“쁍.”
티티는 대답 대신 입에 물고 있던 구슬을 뱉었다.
“응?”
그새 전선에 가서 새로운 쪽지를 물어 왔을 리는 없고. 하지만 구슬은 웬만해서는 뱉지 못하게 훈련을 시켜 놓았다. 아까 키에르트 앞에서 뱉었던 것은 호두에 모든 정신이 쏠린 탓이었다. 리시스는 구슬을 쪼갰다. 쪽지가 들어 있었다. 설마 키에르트가? 자려고 방의 불을 다 꺼놓아서 달빛에 겨우 글씨를 읽었다. 『자나?』
“……응?”
리시스는 눈을 의심하며 다시 쪽지를 들여다보았다. 잘못 읽은 것이 아니면 꼭 전남친이 보낸 것 같은 말이었다. 그러나 리시스는 전남친이 없었다. 하나 보태자면 전남편도 없었다. 남자도, 결혼도 키에르트가 처음이었다. 혹시 자신도 모르는 전남친이 언제 있었나? 기억을 더듬어도 없었다.
‘밤에 쪽지 보내고 그러는 구질구질한 놈은 상종도 하면 안 됩니다!’
렉싱턴 장군이 얼마나 신신당부를 했던가. 그것 외에도 절대 피해야 하는 남성의 조건에 대해 렉싱턴 장군은 빠듯하게 교육시켰다. 아무래도 껄떡거리는 젊은 놈들이 많은 전선이라 그런지 특히나 신경을 썼다. 늘 리시스를 공주님으로 격조 있게 대하면서도 남자 얘기만 나왔다 하면 막내동생처럼 붙잡고 설교를 늘어놓았다. 그 과묵한 사람이.
‘아시겠습니까? 얼굴만 뻔드르르한 놈은 쓸모가 없습니다. 갖다 버리십시오!’
‘못생긴 놈은 양심이 없는 놈입니다. 어떻게 감히 그 얼굴로 공주님께 들이댑니까!’
‘그렇다고 가문만 좋은 놈도 쭉정이입니다. 쳐다도 보지 마십시오!’
‘친절하다고 다 좋은 놈은 아닙니다. 능력이 없으면 친절합니다!’
‘잘 싸우는 놈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언제 어떻게 그 힘을 쓸지 모릅니다!’
‘못 싸우는 놈은 남자도 아니니 보이는 종종 뻥 차버리십시오!’
결국 남는 남자는 아무도 없었다. 착하면 착해서 문제다, 못되면 못돼서 문제다. 잘생기면 잘생겨서 문제다, 못생기면 못생겨서 문제다. 그냥 세상의 모든 남자는 문제다, 라고 가르쳤다. 리시스는 그 앞뒤 안 맞는 조언도 웃으며 들었다. 어차피 남자에게 관심이 크지도 않았다. 에드린 왕이 하고 다닌 짓을 보면 남자란 인생에서 최대한 멀찍이 떨어지는 것이 맞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 이렇게 갑자기 결혼을 하게 되었지만. 그런고로, 보통 전남친이 보낸다는 이 쪽지는 리시스의 유일한 남자이자 남편인 키에르트가 보낸 것이 맞을 것이다.
‘근데 왜?’
하지만 너무 쌩뚱맞았다. 밤이 깊었다. 새벽으로 접어드는 시간인데 당연히 자겠지. 이 시간에 굳이 사람이 자냐고 확인을 하는 이유는 뭔가. 전남친, 전남편은 새벽 감성으로 한 번 찔러보려는 이유라도 있지. 키에르트는 현남편이지 않은가. 리시스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쪽지를 바라보았다. 그냥 무시하고 잘까도 생각했지만 그 바쁘신 황제 폐하께서 하신 일이니 뭔가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리시스는 고민 끝에 짤막한 답장을 적었다. 『네.』 쪽지를 말아넣은 구슬을 티티에게 물리자, 티티는 왔던 대로 창문을 타고 포르릉 사라졌다. 답장의 답장이 올지 안 올지는 모르지만 혹시 몰라 창문을 연 채로 기다렸다. 왠지 웃음이 나왔다. 이게 뭐야, 어린애 같았다. 혼자 키득거리고 있는데 티티가 다시 창문을 넘어 들어왔다. 이번에는 뭐 좀 안 주냐는 듯 리시스의 손을 요리조리 뒤졌다.
“미안한데, 지금 가진 게 없어. 가서 두 배로 얻어먹어.”
“삐익!”
티티가 사납게 항의하며 리시스의 손에 구슬을 퉤 뱉었다. 구슬 속의 쪽지는 단정한 글씨체로 항의의 말이 새겨져 있었다. 『안 자잖아.』 자려고 했다가 쪽지 받고 일어났으면 잔다고 하는 게 맞지 않나? 리시스는 솔직히 답장했다. 『자려고 했는데요.』 다시 날아온 키에르트의 답장. 이번에는 조금 더 돌아온 속도가 빨라진 것 같았다. 글씨도 살짝 흐트러졌고. 『안 자면 얘기 좀 하지.』 『이렇게요? 티티가 오늘밤엔 포식하겠네요.』 『잠깐 나올 수 있겠나? 아무도 모르게.』 몇 번의 쪽지를 더 주고받은 뒤 받은 내용에 리시스는 고개를 기울였다. 렉싱턴 장군님의 경고에는 ‘밤중에 보자는 남자는 최악이다’도 있었다. 하지만 남편이니 괜찮으려나……? 오늘은 달도 밝았고, 잠도 달아났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가고 싶었다. 전쟁터였으면 어림도 없었다. 리시스가 ‘공주라서’ 더 도전의식을 가지는 정신 나간 놈들도 종종 있었고, 암살 위험도 있었다. 화장실이 급할 때를 제외하고는 절대 밤에는 문을 나서지 않았다. 황궁에서도 키에르트가 암살 위험을 강조해서 최대한 해가 진 후로는 외출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키에르트가 불러내는 것이면 괜찮지 않을까? 『이 밤중에요?』 그래도 한 번 더 물었다. 답장은 굉장히 빨리 돌아왔다. 『그래야 보는 눈이 적으니까.』
“응?”
마지막으로 온 답장은 너무 합리적인 이유였다. 껄떡대는 느낌은 하나도 없었다. 그제야 리시스는 키에르트가 심심해서 장난을 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진짜로 밤에 만나야만 하는 용건이 있는 것이었다. 굳이 티티를 보낸 것도 재미삼아가 아니라 사람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리시스는 답장이 돌아온 속도를 생각하다가 후다닥 창문 밖을 내려다보았다.
“……폐하?!”
“쉿.”
키에르트가 창문 밑, 건물 그림자에 숨어 있었다.
리시스는 얼른 입을 다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밤늦은 시간이다. 황후궁의 다른 방들도 불이 다 꺼져 있었다. 깨어 있는 것은 리시스 하나였다. 하지만 큰 소리를 내거나 움직이면 분명 누군가는 깰 터다. 황후궁의 하녀들은 귀가 비상하게 밝았다.
“내려올 수 있겠나?”
키에르트가 소리를 낮춰 물었다. 속삭이는 목소리였어도 워낙 조용한 밤이라 멀리까지 들릴 것 같았다. 리시스는 바짝 긴장하며 다시 한번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직까지 누군가가 깨어난 기색은 없었다. 키에르트의 기척에 누군가가 깨기 전에 얼른 나가야 했다. 리시스는 맨발로 살금살금 문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문은 무거웠고, 살짝만 건드려도 육중한 소리를 울렸다. 분명히 누군가는 깨어날 소리였다.
“음.”
문을 열어야 복도로 나갈 수 있는데. 문을 노려보던 리시스는 아, 하고 창문을 돌아보았다. 창문도 문은 문이었다. 여기는 이층이라 그렇게 높지도 않았다. 장군님처럼 성벽에서 뛰어내리는 기행을 할 수는 없지만 웬만한 짓은 따라 할 수 있었다.
“잠시만 뒤돌아보고 계세요.”
그래도 잠옷 바람으로, 키에르트가 올려다보고 있는데 벽을 탈 수는 없었다. 키에르트는 아직 리시스의 작전을 상상도 못 한 채, 순순히 뒤돌았다.
“이쪽엔 아무도 없어.”
순진한 황제 폐하는 그저 망을 보라는 소리인줄만 알았다. 덜 순진하고 파격적인 황후는 훌쩍 창문을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