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달랑달랑 손잡고2021.12.12.
키에르트의 얼굴이 굳다 못해 와장창 깨져나갔다. 뭘 기대했던 건가. 실망하는 순간 자신이 뭔가를 기대했었다는 걸 깨달았다. 왜 기대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됐어. 그냥 내가 그대를 구하지. 그게 제일 속 편하겠네.”
“와, 폐하 수영도 할 줄 아세요?”
완벽한 황제로 키워진 키에르트는 못하는 걸 찾는 것이 더 어려웠다. 바다가 가깝지 않았지만 호수나 강에 빠져 죽을 위험에 대비해 수영도 철저히 배웠다.
“당연하지.”
“우와! 그럼 폐하가 저를 구해주시면 되겠어요!”
정답에서는 빗겨나갔지만 키에르트의 어깨를 으쓱하게 만드는 건 성공했다.
“당연한 것 아닌가. 나는 그대 외에 구할 사람도 없어.”
“어머.”
사실 그대로를 말했을 뿐인데 리시스는 두근 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런 대답에서는 현실성을 따져서는 안 된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저도 그럼 수영을 배워서라도 폐하를 구해낼게요!”
“늦었어.”
하지만 키에르트는 그 말에 픽 웃고 말았다. 웃겼으니 합격이다. 리시스는 살살 웃었다. 비벼 볼 수도 없을 정도로 살벌하게 얼었던 분위기는 확실히 녹았다.
“늦어도 정상참작은 해 주실 거죠?”
“글쎄.”
“아이이, 봐 주세요오오.”
이제는 웬만큼 봐 줄 것 같으니, 리시스도 마음 놓고 어리광을 부렸다. 키에르트는 헛기침을 하고, 시선을 돌리고, 마음을 차갑게 굳혀보려 온갖 노력을 했지만 이미 녹아버린 얼음이었다. 녹는 건 한순간이지만 다시 얼리는 건 한참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리시스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으니 그냥 넘겨주고 일을 벌인 렉싱턴 장군에 대한 지적만 공식적으로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미 그럴 수 없게 되어버렸다.
“……암호는 어떻게 구성됐는데.”
받을 것만 받고 끝내자. 정보를 얻는 쪽이 키에르트에게도 이득이다. 어차피 부상당해 전선에 서는 것도 어려워진 렉싱턴 장군을 잡아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당분간 에드린과 전투를 벌일 일도 없는데. 키에르트는 마음을 얼리는 어려운 과정 대신 보다 손쉽게 스스로를 설득하는 쪽을 택했다.
“아! 그거는요! 어, 말로 설명해 드리긴 어려운데. 제가 날 한번 잡아서 제대로 알려드릴게요!”
“군사 암호면 진짜 중요한 정보일 텐데. 그렇게 해맑게 알려줄 일이야?”
“엇……, 안 알려드려도 돼요?”
이것 봐라. 조금 풀어진다고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하지만 우는 것보단 웃는 게 보기는 좋았다. 이러나저러나 진 기분이다. 대체 리시스를 상대로 언제쯤 이겨볼는지 모르겠다. 이 정도로 많이 봐줬으니 살짝 심술은 부려도 되지 않을까?
“알려줄 때까지 티티는 내가 데리고 있겠어.”
“예?!”
꼭 심술궂은 어린애가 된 기분이다. 하지만 리시스가 팔딱팔딱 생생한 반응을 보여주니 만족감도 올라왔다. 스스로의 유치한 면을 바닥까지 확인하는 날인가 보다.
“그대 손에 넘겨주면 적군에게 칼을 쥐여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잖아. 암호라도 받아내야 내가 안심하고 돌려줄 수 있지.”
리시스의 소중한 동물이니 놓아주거나 죽일 수도 없다. 그렇다고 문제가 하나둘도 아닌데 이걸 다 그냥 너그러이 용서하고 없던 일로 해 주는 건 말이 안 되었다. 리시스도 고심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작은 문제가 있었다. 티티가 물건이 아니라 생물이라는 점이었다.
“그렇긴 한데요……. 티티 의견도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요?”
“물어봐.”
“……진짜요?”
키에르트의 편견 없는 지시에 주인인 리시스가 오히려 떨떠름해졌다. 티티가 눈치빠르고 머리 좋은 건 맞다. 그런데 말을 알아듣는 것까진 모르겠다. 오라고 할 때 무시하고, 불러도 못 들은 척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리시스는 티티에게 말을 걸었다.
“티티……, 너, 괜찮겠어?”
“삡.”
“…….”
알아듣는 것 맞구나. 단박에 키에르트의 손에 들린 호두로 달려가 버리는 티티. 이 배신다람쥐. 티티는 원래 저렇게까지 먹을 것에 많이 흔들리지 않았다. 다른 병사들이 먹을 걸로 아무리 유혹해도 본 체도 안 했던, 콧대 높은 새앙다람쥐였단 말이다. 지금은 감사한 배신이었지만, 어디 두고 보자. 리시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티티를 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티티는 우드득 한손으로 호두를 무한히 까 주는 키에르트가 엄청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아주 키에르트의 팔에 매달려 떨어질 줄을 몰랐다.
“동의하는 건가?”
“……잘 부탁드려요.”
얄미워도 친구이자 가족 같은 녀석이었다. 키에르트가 어련히 잘 해줄까 싶지만 걱정되는 마음에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럼 이만 일어나지.”
오늘은 예상하지 못한 일정이어서 진짜로 여유시간이 많지 않았다. 다음 일정 때문에 슬슬 자리를 마무리해야 했다. 두 사람이 자리를 뜨려 하자 티티는 알아서 구슬을 뽀로록 삼키고 키에르트의 소매로 파고들었다. 몇 번 들락날락하다 소매 사이로 얼굴만 쏙 내미는 모습이, 아주 천연덕스럽다.
“그대도.”
키에르트는 자연스럽게 리시스에게 팔을 내밀었다. 아무리 예기치 못한 만남이어도 눈앞에서 여성을 돌려보내는 법은 없었다. 그건 쫓아내는 수준으로 냉정하게 보내버리는 것이었다. 하다못해 입구까지만이라도 에스코트를 해야 최소한의 예의였다. 별다른 의미도 없는 에스코트였다. 리시스도 에스코트 정도는 가볍게 받았었지만.
“아.”
오늘은 날이 달랐다. 정원에서도 그랬지만, 한 번 의식해버리니 쉽지 않았다. ‘손’만 보아도 신경이 쓰이고 간지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그것이 키에르트의 심기를 건드렸다.
“……? 아까부터 대체 왜 그래?”
“그게요……. 아, 맞다. 사실 오늘 폐하를 찾아 나선 이유가 그거였는데요. 제가 폐하랑 손을 잡아야 해요.”
“?”
리시스는 최대한 자신이 느낀 불편함과 어색함을 설명했다. 하지만 리시스의 설명력은 도서관 때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미 우리는 손을 잡은 관계가 아닌가?”
두 사람의 협력관계를 말하는 거라면, 이 이상 손을 잡을 수는 없다. 손도 모자라 팔꿈치까지 잡아야 한다.
“아니, 그거 말고요! 진짜로 손.”
“손도 잡았었잖아.”
“그렇긴 한데요! 사교계 규칙에 따라 잡으려니까 너무 이상해요. 여자 손은 괜찮은데 남자 손은 생각만 해도, 으으.”
“……흐음.”
키에르트도 리시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여전히 말도 안 되는 리시스의 설명력과, 그만큼 말도 안 되는 출중한 해석력이었다.
“그러니까, 내 손이 남자 손이라 못 잡겠다?”
좋은 쪽으로만 해석하는 경향이 없잖아 있지만.
“내 손은 이미 몇 번이고 잡았었잖아.”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했었는지 까먹었어요.”
“그럼 내 손 말고 다른 남자 손도 안 잡아 봤어?”
당연히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 리시스는 음? 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그랬던 것 같은데요. 제대로 잡은 건.”
“……그랬다고? 렉싱턴 장군은?”
리시스 주변의 남자,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니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질문에 별 해괴한 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 기겁했다.
“렉싱턴 장군님이랑 손을 왜 잡아요?!”
“잡으면 안…… 되나?”
“굳이 왜 잡아요?”
키에르트는 잠시 혼란스러웠다. 그렇게 친밀한데 왜 손을 잡는 건 저렇게 질색을 하는 것인가. 키에르트는 여자 형제가 없어서 그걸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할 수 없는 걸 당장 이해하려 노력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리시스가 남자 손에 면역이 없다는 것이니까. ……나쁘지 않았다. 자신의 손을 거부하는 리시스의 태도에 슬그머니 부아가 치밀려던 키에르트는 다시 관대함을 찾았다.
“그래, 잘 되다가도 안 될 때가 있지.”
“……어떡하죠?”
“이러면 어때.”
키에르트는 사전 동의를 구하지 않고 리시스의 손을 덥석 잡아버렸다.
“꺅!”
리시스가 놀라 펄쩍 뛰어올랐다. 하지만 키에르트는 힘을 주어 리시스의 손을 꾹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어, 어, 어떻게…….”
“이상해?”
“모오르겠어요.”
“잘 봐.”
리시스는 콩딱콩딱 난리를 치는 가슴을 누르며 잡힌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냥 손이었다. 하얗고 단단한, 손을 다 덮을 만큼 커다란 키에르트의 손.
“손…….”
“그래, 그냥 손이야.”
손을 잡는 것에 굳이 의미부여를 하면 끝없이 이어지지만, 반대로 가볍게 생각하면 별것 아닌 일이기도 했다. 키에르트는 괜히 한 번 튀어 올랐다가 내려간 심장의 움직임은 모른 척했다. 리시스는 잡힌 손을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말짱한 얼굴로 키에르트를 돌아보았다.
“괜찮은 것 같아요!”
“……그래?”
“아. 역시. 무서운 건 직면해 버리는 게 효과가 좋네요.”
막상 잡고 나니 괜찮았다. 리시스는 천진난만하게 잡은 손을 흔들어 보이며 키에르트의 손을 요리조리 뜯어보았다.
“그래도 역시 악수랑은 느낌이 달라요.”
“어떻게?”
“손바닥이랑 손끝이 간지러워요.”
“그건……, 나도 그렇군.”
“아, 역시.”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니 마음이 조금 더 놓였다. 두 사람은 손을 잡은 채 걸음을 옮겼다. 걸음에 맞춰 손이 앞뒤로 흔들렸다. 걸음에 맞춰 흔들리는 손의 감각이 즐거웠다. 리시스는 히히, 웃으며 손을 앞뒤로 크게 흔들었다.
“이거 좋은 것 같아요! 에스코트보다 움직이기도 편하고.”
“그럼 종종 이러고 다니지.”
“아, 그러게요. 연습해야 돼요. 이거 말고도 연습할 게 산더미예요.”
“허멀 후작의 수업이 꽤 빠듯한 모양이야.”
“이론은 그냥 할 만한데, 실습은 저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요. 그래서 폐하한테 도와달라고 달려왔다가…….”
이 일련의 사태가 벌어져 버린 것이었다. 이제야 리시스의 황제궁 난입사건의 앞뒤가 맞아 떨어졌다. 그래도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러 달려왔다는 점에서 감점은 없었다.
“앞으로는 그냥 연락을 해.”
“저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단 말이에요.”
“이런 건 마음의 준비 없이 하는 게 낫다는 걸, 오늘 배웠지 않아?”
키에르트가 맞잡은 손을 흔들어 보였다. 만약 키에르트도 리시스처럼 시간을 들여야 했다면 긴장으로 손바닥이 축축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냅다 저질러버리니 별것 아니지 않은가. 손잡는 것도 그렇고, 끌어안았을 때, 춤을 추며 몸을 바싹 붙였을 때 모두. 엉겁결에 일어나 버리면 놀랄 틈도 없다. 그냥 그렇게 자연스럽게, 사고처럼 일어나는 편이 나았다. 키에르트는 무심결에 리시스의 입술을 쳐다보았다.
“……?”
리시스가 키에르트의 시선을 느끼고 마주 보았다. 손을 잡은 채 입술을 바라보는 키에르트. 그렇다면 키스도, 잠자리도, 그냥 저질러 버리는 것이 편하지 않겠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투명하게 보여버려서 그만, 리시스는 입술을 물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