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우리 황후, 우쭈쭈2021.12.09.
“죽인다는 소리가 아니라……, 죽여도 무방할 사태인 건 알지?”
“아는데, 아는데요오……! 어어어엉. 제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지…….”
죄는 많은데 정작 죄를 지은 사람은 없었다. 키에르트도 미간을 모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에드린과 관련된 일은 키에르트도 예민하게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 리시스와는 별개였다. 하지만 리시스가 완전히 관련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쉬란의 황후라 해도 에드린의 공주가 아닌 건 아니었으니. 리시스에게 목숨으로 죄를 물게 할 생각은 없지만 에드린에 항의를 해야 하나, 마나. 렉싱턴 장군을 내놓으라 해야 하나, 마나. 고민이 길어졌다.
“그만. 뚝.”
“뚜윽. 흐윽!”
그러나 판결보다 리시스의 눈물을 멈추는 것이 먼저일 듯했다. 저렇게 울다가 사형 내리기도 전에 탈진해 죽겠다. 리시스는 울음을 멈춰보려 입술을 앙 다물었다.
“으응, 끙.”
그러나 그쳐보려 애쓰는 소리만 났지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눈에 힘을 꼭 주어도 눈물이 샜다. 그치라고 말해서 될 것이 아님을 키에르트도 깨달았다.
“차……라도 한 잔 마셔 보겠나.”
“흐읍, 응, 네.”
“그래, 자. 우유와 꿀을 섞어 줄게.”
키에르트는 손수 우유와 꿀까지 넣어주었다. 왠지 모르지만 어린애 다루듯, 달고 부드러운 걸 먹이면 그칠 것 같아서였다. 키에르트는 평생 입에 댄 적도 없는 레시피였다. 서툰 손길로 찻잔을 내밀자 리시스가 다소곳이 두 손으로 받아들고 입에 댔다. 찻잔을 기울이는 동안도 히끅, 어깨가 들썩였다. 숨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겨우 한 모금 마시는 리시스의 모습에 키에르트도 겨우 안도했다.
“좀 진정이 돼?”
“……흑.”
……속단하기는 일렀다.
“어, 으음……, 그럼 쿠키라도 먹어 보겠어?”
“네에에.”
리시스는 내미는 건 다 잘 받아먹었다. 낑낑 울면서도 먹을 건 먹었다. 그렇게 먹으면서도 울음을 안 그치는 모습이 신기했다. 반대로 울면서도 그렇게 먹어지는 것 역시 신기했다.
키에르트는 겸사겸사 호두 한 알을 더 으깨 티티에게도 내밀었다.
“삐잇.”
티티는 이제 키에르트를 ‘호두 주는 사람’으로 정했는지 의심 없이 호두를 채갔다. 리시스는 초코칩과 견과가 박힌 큼지막한 쿠키를 오독오독 씹으며 티티가 먹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키에르트의 눈에는 티티나 리시스나 거의 비슷한 동물처럼 보였다. 순하고, 동글동글하고, 보드랍고, 귀엽고. 먹을 걸 자꾸 주고 싶어지는.
“더?”
“쿨찌럭. 네…….”
울어서 그런지 배가 출출해졌다. 리시스는 키에르트가 권하는 쿠키를 거절하지 않았다. 이 와중에도 맛은 있었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맛보는 과자라서 그런가. 내심 키에르트가 엄청 심각하게 추궁하지는 않을 것이란 걸 느껴서일 수도 있었다. 엉엉 쏟아지던 울음은 슬그머니 훌쩍훌쩍으로 잦아들었다. 리시스는 눈치를 보며 먼저 말을 꺼냈다.
“티티느은.”
“응, 티티는.”
울음보다는 반가워서 키에르트는 얼른 리시스의 말을 받았다. 뭐든 좋으니 편하게 말해줬으면 좋겠다. 키에르트의 응원에 리시스는 킁, 코를 한 번 먹고 숨을 골랐다.
“코 풀고.”
키에르트는 얼른 냅킨을 집어 건네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리시스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냅킨을 코에 대고 팽 풀었다. 코가 시원해졌다. 키에르트의 마음도 시원해진 것 같았다. 이제야 사람다운 말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우느라 빨개진 눈, 코, 입 때문에 얼굴은 사람보다는 토끼에 가까웠지만.
“티티는, 진짜 저 찾아서 온 거예요.”
토끼가 사람 말을 한다. 키에르트는 신기한 광경에 잠시 이성을 놓았다. 하지만 얼른 제정신을 차리고 리시스의 말에 집중했다.
“그 먼 길을?”
“저도 이렇게까지 멀리 따라온 건 처음인데……, 전선에서 에드린 궁까지 따라온 적도 있긴 했거든요.”
전선에서 에드린 궁까지의 거리도 쉬란의 황궁만큼 멀다. 이미 전적이 있는 새앙다람쥐였다. 키에르트의 시선을 받은 티티가 삑, 하며 고개를 갸우뚱하고 뽈뽈 다가왔다. 더 줄 호두가 없냐는 듯 손가락을 이리저리 뒤지는 모습에 키에르트는 픽 웃었다. 웃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귀여웠다. 그래봤자 이미 사람 손가락도 으적으적 씹어먹으려 드는 포악한 생물이라는 것을 들킨 후다.
“하늘을 나는 것들은 다 통제하고 있지만 땅을 달려오는 것도 있을 줄은 몰랐군.”
전서구였으면 황궁의 담을 넘으려는 순간 날개에 구멍이 나서 떨어졌을 것이다. 키에르트는 호두를 하나 더 으깨 졸라대는 티티의 입에 물려주었다.
“그런데 이렇게 다른 사람 손을 잘 타도 되나?”
“원래는 저랑 렉싱턴 장군님 외에는 다 물어버리는데요…….”
다람쥐도 잘 보일 사람을 알아보나? 티티는 키에르트가 완전히 마음에 든 듯 두 손으로 손가락을 꼭 붙잡고 호두를 얻어먹었다. 군대에서 티티에게 물리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한 번만 물렸겠나. 지나가다 제 기분 상하면 그냥 달려와 물기도 했다. 그런 녀석이 저런 애교를? 키에르트가 마음에 들어도 어지간히 든 모양이다.
“어차피 같은 전선에 있는데 전서동물을 쓸 일이 뭐가 있지?”
키에르트는 손장난을 치며 티티와 잘 놀아주었다. 상식적이고 가벼운 질문이었다. 그러나 그건 에드린 군의 작전 비밀이기도 했다.
“그건…….”
잠시 고민하던 리시스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죽이지 않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절해도 모자랄 판에 정보를 아끼려 드는 건 욕심이다.
“전투 중에요.”
“음?”
“저는 멀리서 내려다보면서 실시간으로 전략을 짜고, 그걸 티티가 장군님한테 전달했어요.”
“그 난장판에?”
“작고 빠르니까요.”
말에 밟히지 않을 정도로 잽싸고,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아무리 현장에서 신속하게 정황을 파악해 명령을 내려도 내려다보는 것만 할 수는 없었다. 결국 에드린 군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리시스라는 눈을 하나 더 달고 싸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리시스의 작전이 상상초월의 경지인 것도 한 이유였지만 전투 중에 전서동물을 이용하는 것은 너무 강력했다.
“……하. 그게 그렇게 된 것이었군.”
키에르트는 이제야 밝혀진 전투의 비밀에 흐응, 콧소리를 냈다. 리시스는 밑장까지 다 까인 기분으로 다시 쭈굴해졌다.
“저는 이제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요……. 티티랑 렉싱턴 장군님이 제가 가진 전부예요.”
“……거기 렉싱턴 장군이 껴?”
키에르트가 지적했다. 흑백 사이에 낀 분홍색을 본 느낌이었다. 왜 자꾸 그 이름이 끼어드는 것인가. 지금까지는 있었는지도 까먹을 정도로 존재감이 없다가. 티티의 등장까지는 귀여우니 봐 줄 수 있지만 렉싱턴 장군은 전혀 귀엽지 않았다. 리시스보다 머리 두 개는 크고, 어깨는 세 배 넓은, 맨손으로 사람을 뽑았다 심었다 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누구에게도 귀여울 수 없었다. 가끔 뽑혔다 심겼다 한 것이 자신의 병사라면 끔찍하게 싫어질 수도 있었다. 렉싱턴 장군이라는 말이 리시스의 입에서 나올 때마다 신경이 갉혔다. 절로 인상이 써지려는 걸, 리시스가 겁먹을까 봐 겨우 힘주어 풀어야 했다.
“네, 티티를 같이 구조한 사람이기도 하고……, 렉싱턴 장군님만큼 가까운 분이 없는 걸요.”
리시스는 렉싱턴 장군을 말할 때마다 얼굴을 다채롭게 변화시켰다. 그리운 듯 울먹거렸다가, 푸근한 듯 미소 짓다가. 반면 키에르트는 줄곧 ‘기분 나쁨’ 하나로 통일되는 중이었다.
“아무리 친밀해도 장군과 공주 아닌가. 이제는 쉬란의 황후지. 어떻게 감히 일개 장군 ‘따위가’ 쉬란의 황후에게 도망을 치니 마니.”
“렉싱턴 장군님은 ‘일개 장군’ 따위가 아니에요!”
“그럼 뭔데?”
“어…….”
리시스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소중한 존재, 가장 가까운 존재로는 설명이 되지 않다니. 하지만 키에르트 말대로 대외적인 입장을 말하자면 장군과 공주였다. 가족도, 친척도, 연인도 아닌. 게다가 두 사람 사이엔 절대 좁히지 못한 선도 분명히 있었다. 렉싱턴 장군은 리시스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언제나 깍듯이 존대하며 리시스를 공주로 모셔주었다. 리시스도 렉싱턴 장군을 잘 따랐지만 공주로서 하대했다. 뭔가를 먹을 때, 앉을 때, 문을 나설 때, 모두 리시스가 먼저 대접을 받았다.
“진짜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사이……인데, 친오빠가 있다면 딱 렉싱턴 장군님 같을 거라고…….”
“엄밀히 따지자면 이제 그대의 가족은 나지.”
“……어?”
키에르트는 뭘 그렇게 놀라냐는 듯 삐딱하게 팔짱을 끼고 리시스를 바라보았다.
“그렇잖아. 우리는 법적인 부부인데.”
“어, 그게, 그렇게……, 되나요……? ……되네요.”
하지만 키에르트는 렉싱턴 장군과는 달랐다. 행동도, 말도, 신경쓰며 해야 했다. 그리고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아도 신경이 쓰였다. 이 차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리시스는 손가락만 꼬물락거렸다.
“아무튼…….”
“그래, 계속해 봐.”
“쪽지도 그냥 혼잣말하듯 쓴 것일 거예요. 진짜 전선용 서신은 암호로 쓰거든요. 폐하께서 원하시면 그것도 알려드릴게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잘 들어주고는 있지만 키에르트는 무슨 말에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폭탄 같았다. 리시스는 조마조마하게 톡 건드려 보았다.
“렉싱턴 장군님께 책임은 안 물어주시면 안 될까요……?”
“하하.”
키에르트는 웃었다. 하지만 리시스도 느꼈다. 왠지는 모르지만 터지기 직전이구나. 키에르트도 자신이 왜 이렇게 자꾸 꼬여드는지 알 수 없었다. 리시스가 렉싱턴 장군의 편을 들수록 꼬여들었다. 자신에게는 내기에서 져 놓고도 작전에 쓰인 지리 하나 알려주지 않으려 그렇게 빙빙 돌려놓고선? 기껏 다람쥐 한 마리와 장군을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기밀에, 암호까지 술술 털어놓겠다고 한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우리도 동맹 관계 아니었나? 말뿐인 동맹이었나? 아, 그래. 이건 배신감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황후. 지금 나랑, 렉싱턴 장군이랑 물에 빠지면 렉싱턴 장군을 구하겠다, 이거잖아?”
“말이 왜 그렇게 돼요?”
리시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따지는 게 아니라요. 진짜로, 그게 왜 그렇게 연결이 되는지 상관성이 좀…….”
“우리는 법적으로든 사적으로든 굉장히 튼튼한 관계라 생각했는데, 그대는 ‘별 대수롭지 않은 관계’인 렉싱턴 장군 쪽에 많이 기울어 있는 것 같아.”
“그야, 목숨줄을 쥔 건 황제 폐하시니까요…….”
이 남자,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 리시스는 진짜 알 수가 없어서 쭈뼛쭈뼛 변명했다.
“그러니까. 목숨줄을 내가 안 쥐고 있고, 둘 다 물에 빠졌으면 어쩔 거냐고.”
“그……, 아마 폐하를 구하지 않을까요?”
“……그래?”
그럼 그렇지. 꼬였던 속이 조금 풀어졌다. 10단 꼬기에서 8단 정도로 내려갔다고 해 주겠다. 그런데 잠깐 고민하던 리시스가 양심껏 물었다.
“렉싱턴 장군님은 수영을 잘하거든요. 근데 저는 수영을 못해요. 제가 폐하를 구할 수 있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