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눈물이 뚝뚝2021.12.05.
고개를 푹 숙이고 걷는 동안 어디로 걷는지도 모르고 따라 걸었더니 어느 순간 탁 트인 황제궁의 정원이었다. 시종과 호위들이 모여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눈치 보는 리시스를 느낀 티티도 눈치를 보고 소매 속에 들어가 숨었다. 리시스는 혹시 몰라 소매를 더 단단히 여며 티티를 숨겼다.
“제롬. 간단한 다과를 준비해.”
“예.”
“전원 정원에서 철수.”
키에르트는 명령하고 정원 한가운데의 테이블에 앉았다. 제롬이 직접 우린 차와 물, 다과 등을 차려놓고 물러났다. 모두들 신속했다. 키에르트의 명령은 지엄했다. 리시스는 다시 한번 움츠러들었다. 자신이 그 동안 정말 많은 관용을 받았던 것이구나 새로이 느꼈다.
“삑…….”
“아, 티티. 물?”
소매 속에서 티티가 울었다. 리시스는 황급히 소매를 벌려 티티를 꺼냈다. 티티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물병의 뚜껑을 여니 호로록 타고 올라가 물을 마셨다. 얼마나 목이 말랐는지 그 조그만 입에서 물 넘기는 챱챱 소리가 꽤 크게 울렸다. 물병의 물이 확 줄어드는 게 보였다.
“목 많이 말랐어? 많이 마셔.”
“삑!”
티티는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양 대답까지 했다. 그리고 열심히, 벌컥벌컥 마셨다. 어지간히 목이 말랐는지 낯선 사람인 키에르트의 존재도 잊어버렸다. 덕분에 키에르트는 쉬란에서는 특이한 생물인 새앙다람쥐를 눈앞에서 관찰할 수 있었다. 오랜 시간 험하게 구른 탓인지 하얀 털은 꽤 꼬질꼬질했다. 그래도 앙증맞은 생김새가 퍽 귀여웠다. 언뜻 보면 고양이 같기도 하고, 여우 같기도 한 것이. 하얗고 뽀얀 리시스와 잘 어울리기도 했다. 꼬질꼬질한 것과 별개로 일단 예쁘고 귀여워서 자꾸 눈길이 갔다.
“이런 건 먹나?”
물을 열심히 먹었으니 먹이도 먹여야 하지 않을까. 키에르트는 과자 위에 올라간 아몬드를 떼어 내밀어 보았다. 다람쥐와 비슷하니 먹는 것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으악! 안 돼요!”
그러나 리시스가 기겁을 하며 말렸다. 응? 하며 손을 물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눈이 번쩍인 티티가 키에르트의 손을 와드득 깨물었다. 순간적으로 키에르트는 손에 힘을 주었다. 키에르트의 손가락이 단단했던 것이 다행이었다. 티티의 이빨은 피부를 뚫고 파고들기 전 근육에 걸려 멈췄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은 티티는 이빨에 힘을 주어 대롱대롱 매달렸다.
“꺄악! 티티! 안 돼! 놔!”
리시스는 하얗게 질려 티티를 붙잡았다. 이빨 사이로 손을 넣어 벌리자 티티가 반항했다.
“삐, 끼이익! 삐이익!”
“어허!”
“삑.”
하지만 리시스의 호통에 금방 찍 하고 조용해졌다. 혼나고 얌전해진 티티를 품에 숨긴 리시스가 키에르트를 돌아보았다. 얼굴이 하얘지다 못해 파래지기 직전이었다. 여차하면 모근까지 하얘질 예정이었다. 키에르트의 손가락이 튼튼해서 다행히 피를 보지는 않았지만 황제의 손을 문 짐승이라니. 죽여도 할 말이 없었다. 그 주인인 리시스까지 덤으로 사형당할 수도 있는 무서운 사태였다.
“폐, 폐폐, 폐하, 괘, 괜찮…….”
“……괜찮긴 한데. 보기보다 사납군.”
키에르트는 손가락을 한 번 내려다보고 말았다. 이빨 자국이 남기는 했지만 대수롭지 않았다. 그보다 저 귀여운 생김새에 어울리지 않는 흉폭한 성격이 의외였다. 꼭 주인을 닮았다.
“얘가 사실 보이긴 이래도 육식이라서……! 너 굶고 다닌 것도 아닐 텐데 왜 이래!”
“끼르륵…….”
만져보니 살이 통통한 것이 굶고 온 것도 아니다. 새앙다람쥐는 족제비와 일대일로 싸워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강했다. 웬만한 생물도 다 강한 북쪽에서 그랬으니 남쪽으로 오는 길은 그야말로 차려 놓은 밥상이었을 텐데. 애교 부리며 잘 보여도 모자랄 판에 물기까지 하다니. 리시스의 속만 터졌다.
“얘가요……, 견과류를 좋아하긴 하는데. 너무 흥분해서 그랬을 수도 있어요.”
“그래?”
키에르트는 이번엔 조금 더 큰 호두를 골라 내밀어 보았다. 리시스가 조마조마하게 티티를 내려다보았다. 이번에 물면 너랑 나, 둘 다 죽는다! 눈을 부릅떠 마음을 전달했다. 티티도 생존본능은 있었다. 삐삑, 하며 평소보다 귀여운 소리를 내며 테이블로 올라가 이번에는 키에르트의 손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부터 맡았다.
“내 손 말고 이걸 먹어.”
키에르트는 친절하게 호두를 내밀어 주었다. 티티가 이번에는 번지를 제대로 찾았다. 호두를 조금 더 좋아하는 덕분이기도 했다. 오도독, 오독. 손끝에서 울려 퍼지는 작은 소리에 키에르트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제 손에서 짐승이 무언가를 받아먹는 것은 알게 모르게 뿌듯했다. 쿠키 옆에는 장식용으로 까지 않은 호두알 몇 개가 놓여 있었다. 키에르트는 호두를 집어 손 안에서 으깼다. 으드득! 리시스는 자신의 머리통이 터지기라도 한 것처럼 움찔 어깨를 들썩였다. 아무 생각 없던 키에르트는 호두의 알맹이를 잡아 티티에게 다시 내밀었다. 티티는 키에르트를 그새 ‘호두 주는 사람’으로 인식했는지 호로록 달려가 신나게 받아먹었다.
“한 번 먹기 시작하니 잘 먹는군.”
감히 황제의 손가락을 문 짐승이다. 귀여워해주는 것만으로도 엎드려 절할 일이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리시스는 거듭 굽신거렸다. 티티는 주는 대로 잘도 받아먹었다. 조그만 게 욕심을 내며 끝없이 밀어넣으니 키에르트의 손도 바빠졌다.
“삡!”
배가 불러진 티티는 뱃속에 넣는 대신 볼에 물었다. 그게 문제였다. 조그만 볼에 호두가 들어가 봐야 얼마나 들어가겠나. 몇 개 밀어넣으니 공간이 순식간에 꽉 들어찼다. 그래서 안에 물고 있던 것을 톡 뱉어놓게 되었다.
“음? 이건 뭐지?”
키에르트가 먼저 발견했다. 볼에 보관하고 있던 씨앗인가 하고 봤는데, 금속제의 동그란 구슬 같은 것이었다.
“……아.”
“……헉.”
용도는 오래 보지 않아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키에르트는 구슬의 이음새를 손으로 굴려보았다. 어렵지 않게 구슬은 반으로 쪼개지며 안에서 돌돌 만 작은 종이쪽지가 나왔다. 키에르트는 낮게 신음했고, 리시스는 쩍 얼어붙었다. 티티가 저걸 왜 물고 있는지는 리시스도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전서다람쥐가 물어 나른 쪽지는 예사 물건이 아니었다.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초유의 사태에 얼었다. 키에르트는 우선 돌돌 말린 종이를 펴 보았다.
“……음…….”
내용을 확인한 키에르트는 다시 한번 신음했다. 쉬란 궁의 기밀이나 군사정보를 요구하는 내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런 것은 전혀 아니었다. 그래서 더욱 난감해졌다.
“직접 보지.”
“……예? 저요?”
리시스는 부들부들 떠는 손으로 쪽지를 받았다. 눈동자가 흔들려 글씨에 초점이 맞지 않을 정도였다. 겨우 눈에 힘을 주어 글씨를 읽었다.
“……아.”
익숙한 필체의, 짧은 문장이었다. 『들려오는 소식이 전혀 없어 잘 지내시는지 걱정이 됩니다. 힘들면 도망치셔도 됩니다. -렉싱턴』 다른 놀람에 떨림마저 멈췄다. 맥이 탁 풀린 리시스는 두 손을 떨구었다.
“렉싱턴이면, ‘그’ 렉싱턴 장군이 맞나?”
“네…….”
키에르트도 익히 아는 이름이었다. 렉싱턴 장군. 리시스와 더불어 전쟁터의 쌍벽을 이룬 명장이었다. 리시스가 말도 안 되는 전략을 세우면 렉싱턴 장군은 말도 안 되게 그걸 실천했다. 전장에 실제로 나서는 것은 렉싱턴 장군이라 키에르트도 종종 마주쳤다. 말을 주고받은 적은 없지만 ‘아는 사람’이었다.
“마지막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지 않았었나?”
“……맞아요…….”
리시스의 목소리가 다 죽은 것처럼 쭈그러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렉싱턴 장군이다. 키에르트가 가장 많이 상대했던 장군이자, 리시스만큼 쉬란 군의 원수. 게다가 전선에서 보내 온 쪽지라는 점도 문제가 될 것이고. 렉싱턴 장군이 보고 싶기도 하고 부상이 걱정되기도 했다. 렉싱턴 장군은 살면서 천덕꾸러기 공주인 리시스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준 몇 되지 않는 사람 중 하나이자, 리시스가 전쟁터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도와주었던 은인이었다. 장군과 공주로 서로를 예우하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그냥 오빠였다. 쉬란에 적응하느라 바빠 떠올리지도 못했는데, 그런 동안 렉싱턴 장군은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다.
“으읍……!”
눈물이 왈칵 솟았다. 하지만 잘못해 놓고 울면 안 된다. 리시스는 입술을 물어 눈물을 삼켰다.
“저, 저는 정말 모르는 일이지만……, 렉싱턴 장군님은 진짜 다른 생각 없이 그저 저를 걱정해서…….”
“…….”
에드린의 전선에서, 군용 전서동물이, 장군의 말을 황후에게 전했다. 있는 사실 그대로만 본다면 이혼이 문젠가. 다시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는 큰일이 일어났다. 사실 그대로만 정리하면 쉬란의 황제로서 분노할 일이었다. 그런데 키에르트는 분노하는 대신 긴 한숨을 내쉬었다.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동안 보아 온 리시스라는 사람이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사람은 아니었다.
“일단 연락이 오가던 것 같지는 않고.”
“네, 진짜예요, 티티도, 끕흑, 어떻게 왔는지, 끄흡!”
“그래, 그건 알겠고.”
하지만 이 사태에 대한 책임은 어떤 식으로든 져야 할 것이다. 티티로 인한 사태 하나에 걸린 것이 너무 많아졌다. 뭘 걸고 넘어가든 하나하나가 중대 사안이었다. 앉혀놓고 차를 따라줄 것이 아니라 사약을 따라줘야 맞았다.
“제, 제제, 제가 모든 책임을 질 테니 전쟁만은……, 티티 목숨만은……!”
리시스는 비장하게 외쳤다. 키에르트는 선뜻 그래라 말아라 이야기하지 않았다. 덕분에 초조함은 극에 달했다.
“아니! 그냥 저도 살려주세요! 어흐엉!”
렉싱턴 장군도 소중하고 티티도 소중했다. 하지만 역시 자신의 목숨도 소중했다.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면 그냥 봐 줘라! 리시스는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눈물이 끊임없이 볼을 타고 흘러 뚝뚝 떨어졌다.
한 번 울음이 터지니 세상의 모든 서러움이 다 몰려왔다. 티티를 만나자마자 헤어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도 슬프고, 자신을 아껴준 사람과 편하게 연락을 주고받지 못한 것도 슬펐다. 남들은 딸이 결혼한다 하면 사위 멱살도 잡는다는데 리시스의 머리끄덩이만 잡는 아비도 서러웠고, 에드린 공주로 태어나 버린 것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것까지도 서러워져 버렸다.
“지, 진정해.”
“어어엉!”
“안 죽일 테니 일단 그쳐 봐.”
“……진짜 죽일 생각이셨어요?”
사형감인 건 알지만 설마, 진짜, 정녕? 리시스도 리시스대로 키에르트에 대한 신뢰를 쌓았다. 웬만해선 자신을 해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 정도로. 그래서 더욱 놀랐다. 키에르트의 말에 리시스는 울다가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바람에 눈물이 더욱 퐁퐁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