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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황후 폐하께서 날뛰고 계십니다 (34/153)

34. 황후 폐하께서 날뛰고 계십니다2021.11.28.

예법은 쓸데없이 복잡했다. 그 말은 즉, 자연스러운 행동법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그래서 외우기가 쉽지 않았다. 쉬란의 예법은 특히나 섬세했다. 손을 내미는 동작 하나만 해도 넷째손가락과 새끼손가락 사이의 간격, 들어 올린 각도까지 신경 써야 했다.

16549360863727.jpg“우선 제 손을 보고 따라 해 보시지요.”

16549360863731.png“음, 이렇게?”

16549360863727.jpg“예, 거기서 조금 더 손목을 위로…….”

리시스의 운동신경은 나쁘지 않았다. 허멀 후작이 보이는 예시를 그대로 잘 따라갔다. 몇 번의 연습만으로 제법 우아한 태가 났다. 조금만 더 연습하면 쉬란에서 나고 자란 아가씨처럼 보일 수 있을 정도였다. 시키는 대로 잘 따라는 했지만 리시스의 표정은 영 떨떠름했다.

16549360863731.png“어색해.”

16549360863727.jpg“사교계 예법이라는 것이 대체로 교태로운 구석이 있지요.”

허멀 후작도 쉬란의 예법이 꽤 간지럽다는 건 인정했다. 어린 시절, 본인이 배우면서도 쑥스러워 몸을 꼬았던 기억이 있었다. 쉬란의 예법이 처음인 사람은 어색해 하는 것이 당연했다.

16549360863727.jpg“좋습니다. 이제 제 손에 손을 얹어 보십시오.”

16549360863731.png“이렇게?”

16549360863727.jpg“훌륭하십니다.”

그래도 진도는 쭉쭉 나갔다. 이러느니 저러느니 해도 리시스는 교사의 지시에 충실히 따르는 좋은 학생이었다.

16549360863727.jpg“이 상태에서 마주 보면 바로 춤의 기본자세가 됩니다. 한 번 서 보시겠습니까.”

16549360863731.png“이렇……. …….”

리시스는 수업에 완전히 집중했다. 그래서 생각보다 먼저 행동으로 따랐다. 허멀 후작의 손을 잡은 채 한 발 가까이……. 잘 나가던 리시스의 몸이 우뚝 멈췄다. 키에르트와 처음 춤을 췄을 때가 떠올랐다.

16549360863727.jpg“왜 그러십니까?”

16549360863731.png“……아니, 잠깐. 딴생각이 나서.”

16549360863727.jpg“잘하고 계십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오십시오. 가슴이 닿기 직전까지.”

16549360863731.png“어, 으응…….”

그러나 발바닥에 풀이 붙은 것처럼 움직여지지를 않았다. 드레스에 감싸인 부드러운 허멀 후작의 몸은 분명 키에르트와 달랐다. 하지만 상상은 현실을 가리기도 했다.

16549360863727.jpg“초야까지 치르신 분이 상상만으로 이렇게까지 부끄러움을 타시면 어쩝니까.”

처음 춤을 배우는 어린 소녀 같은 리시스의 모습에 허멀 후작은 목소리의 웃음기를 채 감추지 못했다. 그 초야를 안 치렀으니 이렇게 부끄럽지! 하지만 절대 밝힐 수 없는 사실이었다. 리시스는 혼자 앓았다.

16549360863727.jpg“다른 남성이라 생각하지 마시고 황제 폐하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허멀 후작의 입을 타고 나와버린 황제 폐하란 단어에 리시스의 상상은 더욱 구체화되고 말았다. 춤을 추면서 바싹 닿았던 가슴과 배, 허리를 한 손에 끌어안고 번쩍 들어 올리던 키에르트의 크고 뜨거운 손.

16549360863731.png“그래도 못하겠어…….”

리시스는 순식간에 자신감을 잃고 쭈그러들었다. 초야까지 보낸 유부녀가 보일 태도는 아니었다. 세상 물정 알 만큼 안다는 식으로 굴고 싶었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었다.

16549360863727.jpg“원래 상상을 하면 더 힘들어집니다.”

16549360863731.png“어떡하지?”

상상만으로도 이런데, 현실에서 배운 걸 써먹을 수나 있을까.

16549360863727.jpg“이럴 땐 최고의 답이 있지요. 실습부터 시작하시는 겁니다.”

16549360863731.png“실습?”

16549360863727.jpg“예, ‘진짜 남자’와. 막상 또 실제로 해 보면 아무렇지 않을 수도 있거든요.”

부끄러워 파티장 입구에서 도망치는 사교계 초짜 아가씨들은 종종 보인다. 하지만 눈 한번 딱 감고 한 곡만 추면 바로 적응하기도 했다.

16549360863727.jpg“마침 황후 폐하는 결혼도 하셨지 않습니까. 남편은 이럴 때 써먹으셔야죠.”

허멀 후작은 도서관에서 오붓하게 수학 문제를 풀던 황제 부부의 모습을 기억했다. 그 정도로 친밀한 관계면 보통의 부부처럼 부탁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실상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니 할 수 있는 추측이었다. 그 속이 너무 잘 보여 리시스는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다.

16549360863731.png“그, 그럴까?”

또 한편으로는 이 사태의 주범인 키에르트를 만나 해결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았다. 허멀 후작의 말대로 괜히 상상이 보태진 탓이 큰 것일 수도 있으니. 한밤중에 화장실이 가고 싶었을 때, 일단 방문을 열고 나가면 생각보다 밤이 무섭지 않았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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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나 역시 밤이 무섭긴 했다. 벌써 며칠째, 리시스는 고민만 하며 시간을 버렸다. 허멀 후작이 바쁜 사람이라 다행이었다. 자신의 일만으로도 바빠서 리시스의 수업이 바투 붙지 않았다. 덕분에 시간을 좀 벌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미룰 수는 없었다.

16549360863731.png“하아아…….”

키에르트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해졌다. 초야 때 느꼈던 막막함과 궤가 같았다. 그때는 뭔지 몰라서 막연한 두려움이 컸다면, 이번엔 곰에게 한 번 물려 본 뒤에 곰 앞에 서는 것과 같았다. 키에르트와의 신체접촉은 얼굴로도 모자라 온몸이 화끈거렸다. 이걸 단순히 부끄럽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

16549360863731.png‘혹시 알러지……?’

그런 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자주 닿을수록 건강에 안 좋은 거잖아.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더 열심히 피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말도 안 되는 고민을 하며 리시스는 오늘도 황궁 여기저기를 서성거렸다. 발 닿는 대로 걷다 보니 황제궁 쪽으로 오고 말았다.

16549360863727.jpg“화, 황후 폐하. 어, 어인 일로…….”

황제궁 앞에 대기 중이던 호위와 시종들이 리시스를 알아보았다.

16549360863731.png“아냐, 그냥 걷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어.”

16549360863727.jpg“아, 아아, 황제 폐하와 약속이 있으신 건 아니시고요?”

16549360863731.png“어어, 진짜 그냥.”

다들 정중하기는 한데 하나같이 겁을 먹고 있다. 리시스의 귀여움에 황궁이 술렁이던 것도 잠시였다. 지난 티파티에서의 맹활약 덕분에 리시스는 ‘외모와 대조되는’ 잔인한 황후가 되어 있었다. 그래도 국보인 드레스에는 피가 묻지 않게 요령껏 조심했는데 몇 방울 튀었다. 키에르트는 한 번 입은 옷을 왜 또 입냐며 그냥 박물관에 돌려놓으라고 했다. 박물관에서 옮겨 온 드레스만 갈아입어도 몇 년은 걸릴 양이기는 했다. 리시스는 미련 없이 박물관으로 드레스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핏방울은 무성한 소문을 만들어냈다.

16549360863727.jpg‘황후 폐하께서 티파티 때 손에 피를 묻히셨다.’

그렇게 시작된 소문은 급기야…….

16549360863727.jpg‘그 피가 눈엣가시로 굴던 사람의 것이라고도 한다.’

……까지 번졌다. 일이 많은 티파티이긴 했다. 피범벅 해체쇼에, 세니아의 선전포고에. 리시스의 편지를 가로챈 황후궁의 쥐새끼를 알게 되기까지. 하녀장은 아직 쥐새끼를 찾는 중이었고, 리시스는 세니아와의 재결전에 앞서 맹훈련 중이었다. 드레스 한 벌 정도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 결과가 궁에 파다하게 퍼진 ‘수틀리면 손에 피 묻히는 황후’였다. 무시하고 기어오르는 것보다야 설설 기는 쪽이 나았다. 그래서 굳이 소문을 바로잡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16549360863731.png“그럼, 수고해.”

16549360863727.jpg“헛! 가, 감사합니다!”

허리가 꺾여라 인사하는 시종들을 뒤로하고 리시스는 황제궁에서 한시바삐 멀어졌다. 키에르트는 늘 바쁘다고 했다. 그리고 암살 위험도 커서 한 건물에서 오래 머물지도 않는다고 했고. 집무실과 침실도 여러 개의 건물과 여러 개의 방 중에 그날그날 바꿔 쓴다고 했으니 황제궁이라고 우연히 만날 확률은 지극히 낮았다.

16549360863731.png‘어차피 보자고 해도 못 만날 과야. 응.’

리시스는 스스로를 설득하며 돌리는 걸음에 구실을 주었다. 황제궁 근처까지 왔으면 할 만큼 했는데 못 만난 느낌도 나고, 이 정도면 괜찮았다. 오늘은 이만큼만 노력하자.

16549360863731.png“어?”

황후궁으로 돌아가는 걸음을 재촉하던 리시스는 길가에서 작은 그림자를 발견했다. 작은 그림자도 리시스를 발견하고 몸을 곧추세웠다.

16549360945074.jpg“삑?”

16549360863731.png“어, 어어?”

저 귀엽고 깜찍한 소리를 내는 입. 동그랗고 큼지막한 귀. 깨알처럼 작은 앞발 뒷발. 온몸을 감싼 하얗고 보들보들한 털. 어디서 많이 본 짐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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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360863731.png“티티?!”

16549360945074.jpg“삐익?!”

짐승도 리시스를 알아본 듯 삑 소리를 질렀다. 리시스는 확신했다. 저건 분명 전선에서 키우던 리시스의 새앙다람쥐, 티티가 분명했다. 티티는 리시스를 알아본 것 같더니 홱 몸을 돌려 가까운 담을 타고 넘어버렸다.

16549360863731.png“티티!”

낯선 환경에 놀라서일까. 티티는 리시스의 부름도 무시하고 달음질쳤다. 다른 곳도 아니고 황궁 안이다. 새앙다람쥐는 북쪽에서만 서식하는 동물이다. 누군가의 눈에 띄면 이상하게 여겨 잡힐지도 모른다. 어쩌면 죽여 버릴 수도 있고. 마음이 급해진 리시스는 냅다 담에 매달려 기어올랐다.

16549360863727.jpg“으악?! 황후 폐하?!”

멀어지던 황후를 지켜보던 황제궁의 시종들은 기겁하며 달려왔다.

16549360863727.jpg“황후 폐하! 거기는 안 됩니다!”

16549360863731.png“빨리 잡아 올게!”

마음이 급한 리시스는 시종들의 만류도 무시했다. 그러나 시종들도 만만치 않게 강경했다.

16549360863727.jpg“무례를 용서하소서!”

미리 사과를 하더니, 리시스의 몸을 잡아 끌어내리려 했다. 하지만 이미 리시스는 담장에 반쯤 걸쳐져 있었다. 리시스는 지금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티티는 너무나도 소중한 존재였다. 죽을 뻔한 것을 리시스가 구해 내 길들인, 친구이자 자식이자 부하였다. 어떻게 이 먼 곳까지 따라왔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놓쳐서 큰일이 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16549360863731.png“미안!”

리시스는 시종을 뻥 차버렸다.

16549360863727.jpg“으억!”

시종은 리시스의 한쪽 신발과 함께 날아가 버렸다. 한 사람이 날아가면서 달라붙던 다른 시종과 병사들까지 우르르 쓰러졌다. 리시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담을 쏙 넘어갔다.

16549360863727.jpg“아이고, 폐하!”

리시스가 넘어가 버린 곳은 정원 같은 곳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진짜, 진짜, 진짜로 중요한 곳이었다. 건너편 첨탑에서 활을 든 병사가 한시도 쉬지 않고 지켜보고 있을 만큼 보안도 엄중했다. 담장 근처만 가도 경고성 화살이 날아오는 곳인데, 황후 폐하라 쏘지 못했을 뿐이다.

16549360863727.jpg“이걸 어째!”

난리 났다. 하지만 이미 리시스의 모습은 담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담장 밖에서 발을 구르던 시종들은 황급히 제롬을 찾아 달렸다. *** 키에르트는 집무실 밖의 소란에 굴리던 펜을 내려놓았다. 황제궁의 시종들은 웬만해서는 발소리를 내지 않는다. 키에르트가 소리에 예민한 탓이었다. 발걸음을 가벼이 하는 것도 잊는 정도면, 큰일이 일어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제롬이 노크를 했다.

16549360863727.jpg“폐하. 일이 일어났습니다.”

1654936100646.png“선전포고?”

16549360863727.jpg“예? 아니, 그 정도는 아닙니다만…….”

전쟁이 아니면 키에르트 기준에 일이랄 것은 딱히 없었다. 하지만 그건 제롬도 비슷했다. 키에르트는 말해보라고 턱짓했다.

16549360863727.jpg“예, 황후 폐하께서 날뛰고 계신다 합니다.”

1654936100646.png“그게 보고할 만한 일인가?”

리시스의 피범벅쇼를 본 것이 불과 며칠 전이다. 리시스가 웬만큼 날뛰어도 그러려니 싶었다. 그러나 제롬이 덧붙인 말에 키에르트도 벌떡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16549360863727.jpg“황후 폐하께서……, 시종들을 무찌르시고 ‘그곳’에 침투하셨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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