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싸게 해 줄게2021.11.25.
황궁의 문을 지나고서야 얼어붙었던 몸이 녹았다.
“어휴, 너무 야만적이었어요.”
“정말이지 끔찍해서 입이 다 얼어 붙더라니까요?”
리시스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하고 물러섰던 아가씨들이 동시에 입이 터진 양 재잘대기 시작했다. 세니아 대신 조금 더 열심히 싸웠어야 했다. 하지만 그 상황에 용감하게 나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불러 준 세니아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것이다. 오늘 세니아가 불러 모은 사람들은 평소에는 저 멀찍이 앉아야 하는 서열 낮은 이들이었다. 잘 먹는다는 점 덕분에 모처럼 세니아의 곁에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는데. 이런 좋은 기회를 그냥 날려버렸다. 리시스가 어마어마한 괴짜인 탓이었다.
“솔직히 사람 같지도 않았어요. 어떻게 그런 사람이 이 쉬란의 황후 폐하가 되어서는…….”
“세니아 양이 아니면 저는 도무지 황후 폐하라는 말이 나오지가 않지 뭐예요.”
“…….”
세니아는 대꾸도 하지 않고 앞만 보며 걸었다. 비웃음만 나왔다. 시키는 일 하나 제대로 못한 주제에 이제 와서 자기 공이나 챙기려고 드는 꼴이 우스웠다. 대놓고 무시를 당하면서도 샐샐거리며 웃는 배알들이 대단도 하다. 리시스는 무시를 당하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어떻게든 되돌려주었다. 건드리기 전에 당할 각오를 하게 만드는 성격이었다.
“가진 것 하나 없는 주제에 무슨 자신감인지.”
리시스가 빈털터리라는 건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았다. 남의 약점만 보이는 눈이 황후의 약점이라고 찾아내지 못할 리 없었다. 에드린에서 사랑받지 못한 공주였다는 것, 쉬란으로 결혼하러 올 때 들고 온 것 하나 없었다는 것, 시녀 한 명 데리고 오지 못했다는 것. 모든 것이 리시스의 약점이었다.
“황제 폐하의 관심을 받았다, 이거 아니겠어요? 짧은 관심 좀 받았다고 다 가진 양 거들먹거리는 거지요.”
모든 말이 스쳐 지나가듯 흘러갔지만 그 말만큼은 귀에 덜컥 걸려들었다. 세니아는 걸음을 멈추며 방금 그 말을 했던 사람을 홱 돌아보았다. 관심을 끌었다 생각해 반색하던 사람은 세니아의 흉흉한 눈빛에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황후의 조건에 언제부터 황제 폐하의 관심이 있었죠?”
“무, 물론 그건 아니지요. 그냥 가진 게 뭔가, 이 얘기를 하려다 보니…….”
“그러니까. 황제 폐하의 관심 좀 받는 것이 황후로서 뭐가 어떻다고요.”
“아뇨, 그, 그냥……. 죄송해요, 그런 말이 아니라…….”
세니아의 사나운 물음에 돌아오는 것은 결국 우물쭈물한 사과였다. 자신이 무슨 말실수를 했는지도 모르고 하는 사과였다.
“황후를 무슨 애첩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나 보네요? 황제 폐하 눈에만 들면 누구든 될 수 있는?”
“아니요! 무슨! 절대 아닙니다!”
하지만 결국 그 말이 그 말이었다. 세니아는 불쾌함을 가득 담아 노려본 뒤 마차에 올라탔다. 인사도 하지 않았다. 세니아가 황후인 것도 아니지만 꿍얼거리는 사람조차 없었다. 불만을 떠올리지도 못했다. 마차 창문에 달라붙어 인사를 건네기에 바빴다. 세니아는 쳐다도 보지 않고 마차를 출발시켰다.
“감히.”
화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황후는 인생의 최종 목표였다. 황후가 되기 위해 평생을 살아왔고, 당연히 황후가 될 것이다. 리시스가 황후 자리에 오르기는 했지만 그건 임시일 뿐이다. 갑자기 격렬해진 에드린과의 전쟁, 로구안의 야욕이 겹친 이 상황을 잠재우기 위한 방법 중 하나였다. 이 상황만 잘 마무리되면 황후의 관은 원래의 주인인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다. 그러니 ‘리시스’가 모욕당하는 것은 상관없어도 ‘황후의 자리’가 업신여겨지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마차는 렌데일 공작가의 화려하고 웅장한 대문 안으로 접어들었다. 세니아가 마차에서 내리자 대기하고 있던 집사가 절도 있게 다가왔다.
“공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바로 가지.”
세니아가 혼자 태어나지 않은 것처럼 황후도 혼자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렌데일 공작가의 모든 사람들이 세니아를 황후로 만들기 위해 집중했다. 당연하지만 렌데일 공작가 외에도 황후 자리를 노리는 가문은 있었다. 그러니 모두가 합심해 작전을 짜내야 했다. 렌데일 공작은 노심초사 세니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왔느냐.”
“네, 아버님.”
“그래, 어땠느냐.”
세니아는 쓰게 웃었다.
“망했어요.”
“……뭐라고? 망해?”
렌데일 공작은 생전 들을 일 없던 말을 듣고 멍해졌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세니아의 입에서 저 말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이었다.
“네, 저희가 백전노장을 너무 가벼이 여겼었나 봐요.”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오늘의 얄팍한 계획도 함께 만든 결과물이었다. 리시스가 잘못한 것은 없었다. 엄연히 따지자면 리시스도 희생자였다.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황제 폐하와 눈 한 번 마주치지 않던 사람이다. 그러던 것이 하룻밤 만에 싹 변해버렸다. 로구안의 위협이 사라지면 리시스는 에드린의 공주로, 세니아는 황후로. 각자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간다는 순리가 흔들리려 했다. 처음에는 ‘황후’를 존중해 고분고분한 태도를 가졌다. 하지만 리시스가 그 자리에 욕심을 내어 버티려 한다면 알려줘야 했다.
‘그 자리는 네게 어울리지 않는다.’
황후는 황제의 최측근이자 제국의 한편을 맡는 책임자였다. 아무 교육도 받지 않은 어중이떠중이가 앉을 자리가 아니었다. 리시스가 전쟁터에서 좀 활약을 했을지라도 제국을 운영하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타고난 가문, 재능, 태어났을 때부터 반복된 훈련, 교양, 지식, 이 모든 것들을 갖춰야 한다 경고하려 했던 것인데.
“말도 안 되는 역습을 당했어요.”
세니아는 티파티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히 늘어놓았다. 사감은 최대한 줄이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 사실만 말했어도 워낙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었던지라 이야기꾼의 과장 섞인 만담처럼 되어버렸다.
“파하하하!”
누군가가 세니아의 이야기를 듣고 거창하게 웃음을 터뜨린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세니아는 막 이야기를 마무리하던 입을 다물고 웃음을 터뜨린 남자를 노려보았다. 서재 창문 한쪽에 조용히 서 있던 남자였다.
“이야, 소문은 들었지만 리시스 공주, 거 성깔 장난 아닌 여자네.”
남자는 ‘황후’가 아니라 ‘리시스 공주’라 칭했다. 그래서 세니아는 다소 모욕적인 말임에도 입을 다물어 주었다.
“재밌네. 그런데 보통내기가 아닌데? 우리 고상하신 아가씨께서 처리하실 수 있을까? 힘들지 않겠어?”
“걱정 마. 나도 아직 제대로 된 실력을 보인 게 아니니까.”
“그러지 말고 그냥 나한테 맡겨. 깔끔하게 해결해 줄 수 있다니까?”
믿을 게 따로 있지. 세니아는 비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당장 필요에 의해 손을 잡기는 했지만 새끼손톱 끝을 걸쳐놓은 만큼의 동맹이다. 그 이상 손을 내밀어 잡는 것은 더 치밀한 계산이 필요했다. 가능하면 잡지 않는 것이 좋았고. 세니아의 차가운 반응에도 남자는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응? 응?’ 하고 넉살좋게 찔러댔다. 남부 특유의 검은 눈동자가 장난스럽게 빛났다.
“로구안 사람에게 빚지고 싶지는 않거든.”
“싸게 해 줄게.”
남자는 다시 한 번 능청을 떨었고, 세니아는 아예 못 들은 척 몸을 돌려 서재를 나가버렸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사방이 견제할 것투성이였다. 특히 저 남자는 더욱 주의해서 다뤄야 했다. 남자의 이름은 알헨크. 로구안의 첩자였다. *** 허멀 후작은 당장에 과외 모드로 돌입했다. 리시스와 한 배를 타기로 결정한 이상, 미적거릴 필요가 없었다. 첫 수업 날짜는 곧장 정해졌다.
“먼저 보내드린 책은 훑어보셨습니까.”
수업을 시작하기 전, 허멀 후작은 책을 먼저 보냈다. 우선은 대충이라도 훑어본 뒤 수업을 나가는 편이 진도를 빼기 좋을 것이라 생각해서였다.
“훑어보라고 보낸 거였어?”
그런데 리시스는 전혀 뜻밖의 말을 들은 것처럼 반응했다.
“베고 주무시라고 보내드린 건 아니었습니다만?”
“나는 전부 읽고 숙지하라고 보내준 줄 알았어.”
“예?”
허멀 후작은 또 전혀 생각지 못한 방향의 답에 물음표를 잔뜩 띄웠다. 과장을 조금 보태 도서관의 한 책장을 그대로 옮겨놓았다. 진심이 과도하게 발현되어버린 나머지 그렇게 됐다. 허멀 후작은 살짝 긴가민가한 마음으로 책더미에서 한 권을 끄집어 들었다. 어린이 역사 서적이었다. 리시스가 사교계에서 뒤지지 않을 만큼의 교양을 요구해서 역사서까지도 몽땅 밀어넣었다.
“케일 2세 황제 폐하께서 극심한 가뭄이 난 해, 무엇으로 극복하셨는지 아십니까?”
“릴키석.”
정답이었다.
“쉬란의 황실 계보는 혹시 외우실 수 있습니까?”
“라카렌, 데인, 소르타, 엔케…….”
리시스는 머뭇거림도 없이 줄줄 읊어댔다. 그도 모자라 각 황제의 업적과 통치기간까지도 외워 말했다. 허멀 후작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책을 보내고 한 달 후에 찾아 온 것도 아니다. 딱 삼 일 만이었다. 대체 이걸 어느 틈에 다 읽고, 그렇게까지 숙지할 수 있었단 말인가? 허멀 후작은 리시스가 인류가 아닌 다른 무엇이 아닌가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원래 암기력이 좋아.”
책은 없어서 못 읽었다. 어쩌다 손에 들어오면 얼른 읽고 돌려놔야 하니 빨리 읽고 외워버리는 재주가 생겼다. 리시스는 허멀 후작을 경악시킨 자신의 능력을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다.
“이 정도면 제가 굳이 뭘 가르쳐드릴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이미 완벽하신 것 아닙니까?”
책 외의 지식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한 번씩 짚어주는 정도만 하면 끝날 것이다. 리시스가 요청했던 것처럼 거창한 과외까지는 필요도 없을 모양이었다. 그러나 리시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냥 이렇게 외우는 건 문제가 없지. 나도 책을 보다가 이건 진짜 도움이 필요하겠다 싶은 부분이 있었는데…….”
“예, 어떤 겁니까?”
이렇게까지 영특한 리시스가 도움이 필요한 부분이라니. 허멀 후작은 호기심에 고개를 뺐다. 리시스는 책에 표시를 해 둔 부분을 찾아 허멀 후작에게 내밀었다.
“……아.”
페이지를 훑어 내린 허멀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리시스가 요청한 부분은 독학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는, 예법의 행동적인 부분이었다. 이론은 백지에 써 보든가 읊어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아무리 해 보아도 헷갈렸다.
“이론은 저보다 더 잘 외우고 계실 듯하니, 바로 실습으로 들어가지요.”
“응.”
“우선 손을 내밀고, 잡는 것부터 시작하지요.”
일상적인 것일수록 이미 있는 버릇을 고쳐야 하기 때문에 더 까다롭고 어렵다.
“저를 황제 폐하라 생각하시고 손을 내밀어 보십시오.”
“쿨럭!”
두 배 더 어려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