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웃음은 유료입니다2021.11.21.
충격적이었다. 밤에 볼까 무서울 광경이었다.
“흐윽……!”
충격에 휘청거리는 사람이 속출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리시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칼질을 계속했다. 순식간에 황후의 두 손은 시뻘건 피로 물들었다.
“역시 식재료는 그 자리에서 잡아야 신선하지. 이번 건 확실히 더 맛있을 거야.”
피칠갑을 한 사람이 고깃덩이를 들어올리며 웃는다. ‘다음 재료는 너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직접 그릴 위에 고기를 올려 놓은 리시스는 천에 손을 닦으며 키에르트의 곁에 앉았다.
“뜻밖의 재주도 있었군.”
“재주랄 것까지는 아니죠. 자기 먹을 건 스스로 챙겨야 한 사람 몫을 하는 것이니까요.”
“그 말은 맞지. 제 식량 못 챙기는 병사도 많은데. 귀감이 되었겠어.”
키에르트는 아낌없이 칭찬했다. 아가씨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황제 부부의 불화설은 무슨. 합궁 소박설도 개뿔이었다. 황후의 피칠갑 티파티를 황제가 편들었다. 세니아가 버티고는 있지만 감히 황제의 의견에 정면으로 반박할 용기까지는 없었다. 다들 나서서 공격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도망치지도 못했다.
‘어떡하지?’
서로를 힐끔거리며 눈치만 보는 대치상황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미 리시스 쪽으로 승기가 기울었다.
“황후 폐하의 극진한 대우 덕분에 벌써 배가 부르네요.”
세니아는 퇴각을 결정했다. 겉으로 티내지는 않았지만 피를 본 순간 세니아도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무리 강한 척하려고 해도 피비린내를 곱게 자란 아가씨가 견디기는 어려웠다. 가지고 온 패도 떨어졌다.
“황후 폐하의 대접에 감사드리며 다음번에는 제가 황후 폐하를 모실 기회를 청하고 싶습니다.”
그래도 다음 전투의 예고를 잊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리시스의 판에 들어와 휘말려들었지만 다음번엔 자신의 판에 리시스를 불러들여 정식으로 붙어보겠다는 심산이었다.
“일단 초대장은 보내 봐.”
초대장을 받고 가든 말든, 오늘 세니아가 그랬던 것처럼 예고 없이 밀어닥치든, 그건 내 마음이고. 리시스는 세니아가 했던 짓을 그대로 돌려줄 수도 있다는 경고를 잊지 않았다. 눈앞에서 짐승 가죽을 벗기는 사람이 하는 말이다. 허투로 들리지 않았다. 세니아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생긋 웃었다. 오늘도 두 사람은 마주보고 웃지만 주변에는 광폭한 바람이 불어닥쳤다.
“자, 그럼 다들 먹을 만큼 먹었으면 잘들 가고.”
리시스는 세니아를 물리는 김에 다른 사람들도 내쫓았다.
“예, 예에……, 오늘 초대는 감사드립니다.”
“멀리 안 가네.”
리시스가 살랑살랑 흔드는 손바닥에는 검게 눌러붙은 핏자국이 낭자했다. 사람들이 절하는 각도가 등장할 때에 비해 몇 배는 커졌다. 물러나는 걸음도 몇 배 빨랐다. 순식간에 다시 처음의 인원으로 줄어들었다. 북적거리던 사람들이 확 줄어들자 썰렁한 느낌마저 감돌았다. 치이익, 남은 고기가 익는 소리만 울려퍼졌다.
“이제야 좀 한산하네. 사람이 너무 많으니 정신 사나워서, 원.”
자신이 차려 놓은 판을 엎어버린 리시스는 시원해 했다.
“왜, 왜왜, 왜, 그렇게까지 하셨어요!”
그러나 앨린은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이 상황에 그저 하얗게 얼어붙었다. 맛없다는 공격은 키에르트의 평으로, 준비가 부족하다는 공격은 사냥으로 차단했다. 세니아의 공격수단이 없어졌으면 이제 역공을 들어갔어야지, 대체 왜?
“건질 것이 없잖아.”
“?”
리시스는 도도하게 어깨를 추어올렸다. 앨린은 영문을 몰라 눈 한가득 물음표를 담았다.
“쿡.”
그러나 허멀 후작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키에르트도 크게 표시내지는 않았지만 살짝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
여전히 앨린만 혼자 헤맸다. 전쟁터와 학문, 멀리 보는 사람들의 눈에만 보이는 것이었다. 작은 사교계 안에서만 살던 앨린의 시야에는 보이지 않았다.
“세니아의 충신을 굳이 내 편으로 끌어들는 것보다는 엄포라도 놓아 까불지 못하게 예방해 두는 쪽이 쉬우니까.”
한 번 굳어진 사람의 마음을 돌리기란 쉽지 않다. 세니아의 편으로 굳어졌다면 그냥 세니아에게 붙어 있으라고 내버려두는 편이 경제적이다. 억지로 그 마음 녹이려 힘 들일 필요 없다. 그럴 시간에 자신을 향해 돌아설 사람에게 집중하는 것이 낫다. 보통은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의 마음을 돌리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리시스는 싫어하는 사람은 싫어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누군가는 이유 없이 자신을 싫어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쉬웠다.
“그치만 그렇게 치면 끌어들일 사람이 없을 텐데요…….”
굳이 세니아 편이 아니어도 파벌은 이미 꽉 짜여 있었다. 앨린처럼 어느 파벌에도 ‘못 낀’ 축은 끌어들여봤자 힘이 되지 않는다. 앨린은 스스로의 주제를 너무나도 잘 알았다.
“꼭 수가 중요한 건 아니지. 일당백의 장군 한 명과 칼 들 줄도 모르는 백 명의 병사. 어느 쪽이 낫겠어?”
리시스는 허멀 후작을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일당백의 장군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 진짜로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공들일 사람은 따로 있었다.
“이 정도면 황후의 첫 티파티로 어땠나?”
“충격적이군요.”
허멀 후작의 평은 솔직담백했다.
“충격적일 정도로 강한 인상으로 남았다면 다행이네.”
“그렇게까지 좋기만 한 건 아닙니다만.”
“하지만 최선이었잖아?”
리시스는 강인함으로서 자신이 ‘탈 만한 배’임을 증명했다. 무작정 한 가지 목표만을 향해 달려가다 좌초하는 것보다 최선의 목표를 설정하고 이뤄내는 것. 그것이 리시스가 보여준 방향이자 목표였다. 황후로서의 행보도, 축제도 그렇게 나아갈 것이다.
“누군가의 도움이 있다면 조금 더 나은 최선일 수도 있고.”
리시스는 넉살좋게 허멀 후작의 옆구리를 한 번 더 찔렀다. 허멀 후작은 자신의 평만큼 직설적인 리시스의 답에 다시 한번 쿡쿡 웃었다. 넘어가 줄 생각이 있으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좋습니다. 그 배가 어디까지 가게 될지 궁금하군요.”
“멀리 가지는 못해도 중간에 난파되진 않으려고.”
“그럼, 저는 배에 올라타서 뭘 하면 됩니까?”
리시스는 기다렸다는 듯 냉큼 대답했다.
“과외교사.”
“?”
뜻밖의 주문에 허멀 후작은 응? 하고 되물었다.
“제게 뭘 배우실 게 있습니까?”
도서관에서 본 리시스는 충분히 영특했다. 가르침이 필요하다면 자신 같은 독서가가 아닌 진짜 학자가 붙는 게 맞았다.
“예절교사가 필요해.”
“아아. ……하지만 왜입니까?”
허멀 후작은 알 것 같으면서도 여전히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리시스가 쉬란의 예법을 완벽히 지키는 것은 아니지만 에드린 식의 예법에는 출중했다. 에드린 출신의 황후가 쉬란의 예법을 완전히 지킬 필요는 없다. 지금도 리시스의 예법으로 트집을 잡는 사람은 없는데, 굳이?
“믿기지 않겠지만 말이야……, 나는 싸움을 좋아하지 않아.”
“그러십니까.”
“다만 싸움을 걸어오면 지지 않을 뿐이야.”
허멀 후작은 그제야 이해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세니아의 선전포고를 받아버렸다. 피하면 진 것이 된다. 붙어서 질 수도 없다. 그렇게 되면 황후로서의 입지는 정말 사라져버릴 것이다. 다음엔 세니아의 티파티에 초대받아 가는 것이니 오늘처럼 요령을 피우기도 어려웠다. 찻잎이니 찻잔이니 요상한 말로 칭송하고, 찻잔 드는 법, 마시는 법까지 깨알같이 까고 들려 할 것이다. 허멀 후작의 말대로 ‘에드린 출신이니까’로 일관되게 무시해도 되지만 리시스는 걸려 온 시비에 완벽함으로 대적하고 싶었다. 예법을 몸에 익히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고 말이다. 리시스의 결연한 의지에 허멀 후작은 결국 손을 잡았다.
“좋습니다, 황후 폐하. 하지만 수업이 쉽지는 않을 겁니다.”
“원하던 바야.”
리시스는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번에는 키에르트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말인데요, 폐하아.”
“음?”
키에르트는 갑작스러운 부름에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내렸다. 허멀 후작과는 어른스러운 대화를 이어가더니 갑자기 애교가 끼어들었다. 말꼬리도 늘어졌다. 키에르트는 저도 모르게 바짝 긴장해 허리를 곧추세우고 리시스의 말을 경청할 준비를 취했다.
“돈 좀.”
“……돈?”
“과외비요.”
앨린은 자원해서 들어온 시녀라 비용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허멀 후작은 리시스가 끌어들였다. 본인이 좋다고 허락했어도 대가를 쥐어주는 것이 맞다고 여겼다.
“돈……, 받을 건가?”
키에르트는 생각지도 못한 비용 청구에 우선 허멀 후작의 의견을 물었다. 허멀 후작의 재정은 풍족했다. 보수야 받든 말든 상관없었다. 황실 도서관의 사서도 명예직이었다. 하지만 황제 폐하의 주머니에서 나온 황후 폐하의 작고 귀여운 돈은 받아보고 싶었다.
“주시면 받지요. 공짜보단 나으니까요.”
허멀 후작은 냉큼 받기로 했다.
“그래, 나중에 청구서는 내게 보내.”
“그러도록 하지요.”
키에르트는 역시나 이번에도 후했다. 돈에 한해서는 정말 아량 넓은 남자였다. 세상에 돈만큼 쉽게 쓸 수 있는 것이 없다지만, 남에게 주기 어려운 것이기도 한 것이 돈이다. 그런 것을 키에르트는 언제나 별것 아닌 듯 리시스에게 쉽게 베풀었다.
“그럼 저도 이만 물러나도록 하지요. 즐거운 티파티였습니다, 황후 폐하.”
배도 채웠겠다, 호기심도 채웠겠다. 용건도 끝났으니 허멀 후작은 가볍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시간 될 때 연락 주게.”
“그러겠습니다.”
세니아 일행을 떨쳐냈을 때와는 다르게, 리시스는 살갑게 배웅했다. 아까 살벌하게 눈에 힘을 주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대조적이었다. 리시스는 싸울 사람과 끌어들일 사람을 분명히 구분했다. 허멀 후작을 보내고 다시 자리로 돌아오던 리시스는 키에르트와 문득 눈이 마주치자 반사적으로 생긋 웃었다. 겨우 가라앉았던 키에르트의 가슴이 돌 맞은 어항처럼 출렁 튀어올랐다. 자신을 향해서도 저 웃음이 날아올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왜요?”
뜨끔한 키에르트의 표정이 이상했는지 리시스가 물었다.
“잘 웃어서.”
“아……, 전 또 뭐라고. 저한테 도움 줄 사람인데 울상 할 필요 없잖아요.”
그러니까 유료라는 소리다. 키에르트도 이제 적극적인 아군이 확실해졌으니 웃어주는 것이었다. 괜히 놀라고 저의를 파악하고 할 필요도 없었다. 적어도 키에르트가 리시스의 도움이 되는 한 저 웃음은 그대로겠지. 가슴의 출렁임이 잦아들었다. 대신 슬그머니 불길이 일었다. 키에르트도 스스로 잘 의식하지 못했지만 은근히 호승심이 강했다. 남들한테도 다 보여주는 웃음을, 자신에게도 똑같이 보여준다? 남들보다 못하지 않은 게 어디냐 싶기도 했지만 역시 그걸로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더. 남들보다는 더 큰 웃음을 받고 싶었다.
“혹시 돈 더 필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