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다음 사냥감2021.11.18.
숲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깊었다. 이런 숲이 황궁 안에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숲 초입은 연녹색 이파리들이 주를 이루었으나 조금 더 깊이 들어가자 정체를 모를 덩굴들과 짙푸른 잎사귀로 하늘이 덮였다. 빛이 덜 들어오니 어둑하고 습했다.
“진짜 곰 나올 분위기긴 하네요. 실제로 나오면 굳이 싸우지 말고 도망쳐요. 곰한테 이길 장소가 아닌 것 같아요.”
“그대의 판단을 존중하지.”
생각보다 사냥감이 사방에 널려 있지는 않았다. 숲에 들어가자마자 온갖 짐승들이 바글바글거릴 줄 알았는데 오랜만의 인기척 때문일까, 다들 꼭꼭 숨어 보이지 않았다. 곰이 나오는 것보다야 나았지만 숲 전체의 긴장된 기운에 침입자들도 덩달아 긴장했다.
“저기!”
리시스가 먼저 긴장감을 견디지 못하고 튀어 오른 토끼를 발견했다. 키에르트는 서둘러 활을 겨눴다. 그의 전투능력도 나쁜 편은 아니었다. 다만 낯선 환경에서 작은 동물을 목표로 하니 전쟁터만큼 실력이 나오지 않았다. 화살이 빗나갔다. 토끼는 화살이 꽂힌 것과 반대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두 번째 화살을 겨누려는데, 그보다 빨리 은빛 호선이 날았다. 팍! 토끼는 끽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단검에 맞아 고꾸라졌다. 키에르트는 두 번째 활을 올리던 자세 그대로 얼어 옆을 돌아보았다.
“꺅! 제가 잡았어요!”
살벌한 눈빛으로 칼을 날리던 것과 대조되게 성공을 기뻐하는 목소리는 귀엽게 들떴다. 그러나 키에르트의 귀에는 귀엽게 들릴 수 없었다. 활을 쏘아야 할 만큼 멀리 떨어진 곳에 단검을 날려 명중시키는 실력자였다니. 힘이 아니라 기술이 필요한 부분에서는 훌륭하다는 소리였다. 키에르트는 이미 늦은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리시스와 오붓한 모습을 보여줘야 할 것 같아 일부러 친위대를 대동하지 않고 숲에 들어왔다. 어차피 숲의 사방은 황궁의 다른 시설로 가로막혀 있다. 각 방향에 경비병들이 있으니 숲에 암살자가 숨어 있을 확률은 극히 낮았다. 그러나 자신의 옆에 암살자만큼 위험한 인물이 있었다.
“사방이 풀이라 토끼가 먹을 게 많았나 봐요! 완전 통통해요!”
잡은 토끼를 들고 돌아온 리시스가 신이 나 소리쳤다. 리시스는 보드라운 토끼를 끌어안고 쓰다듬는 것이 어울릴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피가 뚝뚝 떨어지는 토끼를 들어 올리고 있다. 거기에 병아리라도 받은 것처럼 보드라운 미소라니. 지독하게 안 어울렸다. 키에르트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하하,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다음 사냥감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얼른 다음 사냥감을 찾지 않으면 다음 사냥감은 자신이 될 것 같은 위기감이 몰려왔다.
“앗.”
그러나 사냥감 앞에서는 천하무적 같던 리시스도 약점이 있었다.
“아……, 이거 어떻게 지나가지. 잠시만요.”
물웅덩이였다. 키에르트는 키가 컸으니 다리도 길었다. 성큼 건너버리면 되었다. 그러나 리시스는 그보다 훨씬 짧았다. 거기에 치렁치렁한 드레스까지 입고 있으니 깡총 뛰어도 물웅덩이를 넘을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리시스는 혼자 곰곰히 고민하면서 물웅덩이 주변으로 돌아가 보려고도 했다가, 도움닫기를 했다가, 온갖 방법을 시도했다. 하지만 물웅덩이 주변은 나무와 가시나무 덩굴이 있어 돌아갈 수 없었고, 도움닫기를 해도 코앞에서 멈춰서야 했다.
“도와 달라 말을 왜 안 하지?”
가만히 지켜보던 키에르트는 결국 물웅덩이 앞에서 고뇌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리시스에게 물었다.
“네? 아, 그럼 되는구나.”
그걸 이제야 깨닫다니. 키에르트는 흠, 낮게 한숨을 쉬며 다시 물웅덩이를 건너 리시스에게 다가섰다.
“보통 귀족 여성은 이럴 때 당연하게 손을 내밀지.”
“아…….”
그 말에 리시스는 손을 내밀다 움찔하며 거둬들였다. 아직도 손을 잡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부끄러움이 확 몰려왔다. 키에르트는 그걸 가만히 지켜보며 리시스가 자발적으로 손을 내밀 때까지 기다렸다.
“참 신기해. 어떨 때는 아무렇지 않게 훅훅 들어오면서 어떨 때는 지나치게 사리고. 그대의 기준을 모르겠어.”
덕분에 키에르트도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말도 안 되는 잠자리 옷을 입고 기다리는 건 하고, 누구나 잡아 달라 내미는 손은 사리고.
“예법이 달라서 그런 걸 어떡해요. 에드린에서는 웬만하면 남성과는 손끝도 닿지 않고 산단 말이에요.”
그래서 특히나 무도회가 큰 이벤트였다. 합법적으로 남녀가 손을 잡을 수 있는 몇 되지 않는 기회라. 리시스도 사춘기를 보내며 남자 손을 잡아보고 싶은 욕망은 느꼈다. 하지만 그 시기를 지나 이성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드니 민망함이 더 커졌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좀 배워서라도 익숙해지긴 해야 할 텐데…….”
“그렇게 생각하는 건 반갑군.”
“오늘 좀 느끼는 바가 많았어요. 아무리 제가 수를 생각해도 기본적인 예법이나 기초지식이 없으면 대처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아무래도 그렇지.”
오늘은 임기응변만으로 어찌어찌 때웠다. 가볍게 예상하고 있던 상황이 그대로 맞아 떨어져서 잘 해낼 수 있었던 것이지, 만약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공격이 들어왔다면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사교계의 싸움도 전쟁터만큼 빈틈이 있어서는 안 되었다. 칼 들고 싸우는 곳이 아니라고 너무 마음을 놓고 있었나 싶기도 했다. 이제부터라도 적어도 상식이나 기본 예의 부분에서 트집잡힐 부분을 없애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그럼.”
키에르트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리시스는 크게 한숨을 들이마시며 조심스럽게 손을 겹쳤다. 키에르트는 그 손을 꽉 잡더니, 반대 팔로 리시스의 무릎을 잡아올렸다.
“꺅?!”
이번에는 정말 크게 놀랐다. 리시스는 버둥거릴 뻔한 다리를 진정시키며 키에르트의 목에 팔을 감았다. 키에르트는 리시스를 번쩍 안아든 채 웅덩이를 건너서야 몸을 내려주었다.
“이, 이런 것도 쉬란의 매너예요?”
“매너지.”
“……어려워요.”
화끈거리는 얼굴이 진정이 되지 않았다. 키에르트와 몸을 닿은 것이 벌써 몇 번째임에도 익숙해 지지 않았다. 이것도 공부로 해결할 방법이 있겠지. 리시스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저것은 그냥 손이다. 아무렇지 않은, 누구나 잡는.
“후, 이제 진정됐어요.”
“……그대의 얼굴은 더욱 굉장해진 것 같은데.”
“응? 얼굴요? 왜요?”
리시스는 더듬더듬 손가락으로 얼굴을 매만졌다. 갈색 부스러기들이 손끝에 묻어나왔다. 그 정체는 금방 알아 볼 수 있었다.
“아, 손에 피 묻은 걸 깜빡했네.”
여기저기서 갈색 부스러기들이 떨어졌다. 거울이 없으니 스스로 전부 지워내기도 어려웠다. 리시스는 키에르트를 문득 돌아보았다.
“이럴 때 지워달라고 얼굴 내미는 것도 예의일까요?”
“숙녀의 요청을 받으면 거절할 수 없지.”
키에르트는 증명하듯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손수건이 필수 준비물인 세계라니. 참으로 생소했다. 키에르트는 물구덩이에서 살짝 물을 적셔 리시스의 얼굴에 묻은 피를 살살 닦았다.
“이 정도로는 다 지우기 어려울 것 같긴 한데.”
“어느 정도는 남겨 주세요. 기왕이면 험악하게.”
“굳이 그럴 이유가 있나?”
“폐하께서 초반에 지으셨던 표정을 보면 나쁘지 않은 작전인 것 같아서요.”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주려다 보니 자연스레 얼굴이 바싹 붙었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리시스도 어느 순간 키에르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가까웠다. 입으로 숨을 쉬면 숨결이 닿아버릴 정도로. 리시스는 입술을 다물었다. 리시스의 눈빛에 얼굴을 닦아주던 키에르트도 서서히 손을 멈추고 눈을 마주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티파티가 끝나면 일단 매너 관련 공부부터 시작해야겠어요.”
“응?”
“그럼 적어도 이렇게 당연한 매너를 주고받을 때마다 어색해서 견딜 수 없는 건 좀 덜해질 테니까.”
“아아. 그렇겠군.”
리시스가 어색해서 견디지를 못하니 키에르트도 덩달아 이상해져버리는 일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냥 가볍게 에스코트 받듯 넘기면 되는 일을, 자꾸 의식하게 된다. 특히 리시스가 약한 부분이 이렇게 남성들과의 가벼운 접촉이니까 확실히 공부라도 해서 익숙해져야 했다. 키에르트야 웃으며 넘겨주었지만 만약 다른 남성들과 접촉할 일이 있을 때 똑같이 정색을 해 버린다면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상대가 불편을 느낄 수도 있으니까. 선생님을 구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현재 상태에서 리시스에게 그나마 우호적인 사람은 앨린과 허멀 후작. 두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둘은 사교계에서 변방에 있었다. 선생님을 구하는 것도 일이었다.
“물웅덩이가 없는 다른 길로 돌아서 가요.”
리시스는 얼굴을 대충 닦자 얼른 몇 걸음 물러서 키에르트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아직은 공부하기 전이니 굳이 키에르트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곳을 피해서 갔다.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뒤를 조용히 따라갔다. 그도 리시스와 가까워질 때마다 평소와 다르게 요동치는 심장 때문에 곤란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
“이 정도면 여럿 먹기에 모자라진 않겠지?”
돌아가는 길에도 사냥은 계속되었다. 키에르트도 몸이 풀리고, 리시스의 활약도 더해져서 두 사람은 하루 종일 먹고도 남을 만큼의 사냥감을 물어왔다. 그러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피가 튀었다. 키에르트는 활을 주로 써서 심하지는 않았다. 반면 리시스는 사냥터의 학살자가 되어 등장했다. 안 그래도 밝은 색 드레스를 입어 피가 더 눈에 띄었다. 하얀 얼굴과 밝은 금발에 치덕치덕 달라붙은 검붉은 핏자국은 진한 대비를 이루어 보는 이로 하여금 소름이 돋게 했다. 대낮에 사신 등장이었다.
“어후, 전쟁터에서 안 봤던 꼴을 여기서 보다니요.”
특히 친위대는 악몽이 돌아온 것처럼 진저리를 쳤다. 전쟁터에서 직접 칼을 들고 휘두르는 리시스를 본 적은 없다. 실제로 그런 적도 없었고. 하지만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리시스의 이미지가 지금의 모습과 가장 유사했다. 사람이 가장 상태가 좋지 않을 때 최악의 이미지와 마주치면 정신적으로 힘들어진다.
“조, 좀 매무새를 정리하시는 것이 어떨까요……?”
보기에 끔찍했던 것은 친위대들뿐만이 아니었다. 세니아조차 질린 얼굴로 한마디를 했다.
“그대들에게 맛있는 걸 먹이고 싶은 마음에 체통이고 매너고 다 내려놓게 되었지 뭐야.”
“……황송합니다.”
“기왕 이렇게 된 것, 다들 아주 즐겁게 놀아줬으면 해.”
그 말과 함께 리시스는 푹, 잡아 온 사냥감의 목에 칼을 박아넣었다. 부욱 소리와 함께 가죽이 찢어지고, 그 안의 뼈와 신경이 으깨지며 피가 사방으로 솟았다. 아가씨 중 한 사람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기어이 쓰러졌다.
“오늘 날이 덥나? 시원한 곳으로 옮겨 줘.”
그리고 리시스의 발골쇼는 계속되었다. 드레스가 온통 시뻘겋게 물들 때까지. 식량 문제는 중요했다. 리시스가 주로 맡은 일 중 하나는 잡아 온 사냥감의 손질이었다. 뼈와 살을 가르는 중간중간 단검을 잡은 손의 그립마저 바뀌었다. 휘리릭, 휘리릭. 사신이 칼춤도 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