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맨손으로 곰 때려잡기2021.11.14.
리시스는 다시 한번 밝게 미소 지었다. 반갑고 고마워서 짓는 미소는 아니었다. 너 이제 죽었다, 선언하는 사신의 미소였다. 허멀 후작이 먼저 도착하지 않았더라면 감동의 순간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차가 이렇게 무섭다. 허멀 후작 뒤에 도착한 탓에 구원군이 될 뻔한 세니아는 역적이 되었다.
“그 집은 초대장이 무사히 도착한 모양이야?”
리시스의 선제공격에도 세니아의 표정은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본인이 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행히도 잘 받았습니다만, 우편사고가 있었나 보네요.”
초대장은 다 시종의 손으로 직접 전해지는 걸 알면서 우편사고 운운한다. 리시스가 그 정도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일까. 알면서도 슬쩍 무시한 것일 수도 있고.
“응, 황후궁에 쥐가 있나 봐. 쏠아먹은 모양이야.”
“저런, 큰일이군요. 쥐가 다 쏠아먹기 전에 잡으셔야겠습니다.”
본인이 키우는 쥐일 수도 있을 텐데 세니아는 아주 태연히 모르는 척 놀란 표정만 지었다.
“조만간 대대적으로 소탕작전을 벌여야겠어.”
“예.”
“알겠지만, 나는 파티보다는 전투가 주력이라.”
리시스는 끝까지 웃었다. 세니아도 마주 웃었지만 눈가에 긴장감이 어렸다. 리시스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어딜 감히 황후를 물먹이려 드나. 이전에 만났을 때 너무 깍듯해서 헷갈렸던 것은 끝이다. 찻잎 가게에서 슬그머니 내비쳤던 야심이 이제 본격적으로 드러났다. 리시스를 황후로서 제대로 모실 생각이 없다는 것은 분명해졌다.
“이렇게 왔으니 즐거운 시간이 되기를 바라.”
리시스는 일단 형식을 갖췄다. 먼저 이빨을 드러내는 것은 약점을 보이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감사합니다. 그런데……, 황제 폐하께서도 계셨군요.”
“지나가다 우연히 들르셨어. 여긴 지나가다 우연히 들를 만한 장소잖아. 허멀 후작도 그랬고.”
“그렇긴 하네요.”
키에르트를 앞세워 티파티를 성공시키려는 것이냐는 비난도 이렇게 피해갔다. 귀여운 이미지 탓에 허당으로 보는 사람은 많았다. 하지만 리시스는 대치상황에서 절대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얼추 방어를 성공한 느낌이었다.
“아주 신선하네요. 틀에 박혀 있지 않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마시는 차도 특별할 듯합니다. 잘 어울리시는 분위기를 택하신 것 같습니다.”
세니아는 더 물어뜯는 대신 우아하게 대처했다. 정석적으로 티파티에 초대받은 손님처럼 티파티의 외양, 분위기에 대한 칭찬을 했다. 그럼 그렇지, 리시스는 당연한 말을 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리시스가 가장 경계해야 했던 것은 세니아가 주최한 파티의 어설픈 복제였다. 이 티파티는 고급스러운 분위기는 아니지만 오히려 자연이 주는 생명력에 싱그러웠다. 감히 누가 자연을 저급하다 칭하겠는가. 테이블 위에도 최대한 자연에 가까운, 가공하지 않은 순면 테이블보를 깔았고, 의자도 원목 그대로 다듬어 만든 것만 두었다. 그릇의 마무리는 물론, 그릇에 그려진 그림의 점 하나까지도 완벽하게 찍혀 있던 세니아의 물건들은 이곳에서 보이지 않았다. 세니아는 자신의 흔적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티파티의 정경에 낮은 웃음을 한 번 흘리고 넘어갔다.
“차와 함께 드시기 좋은 고기와, 특별히 황후 폐하께서 직접 섞어 만든 차입니다.”
시종이 조심스레 세니아의 앞에 접시와 찻잔을 내려놓았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차의 반은 떨면서 흘려보냈다. 세니아 주변으로 옹기종기 모여앉은 아가씨들 사이로도 차가 날라졌다.
“어머, 이건…….”
“마셔도 되는 걸까요?”
대부분의 귀족 아가씨들은 생소한 차를 경계했다. 리시스는 굳이 권하지 않았다. 먹든 말든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두고 키에르트를 돌아보았다.
“폐하? 한입 더?”
이미 입 앞까지 들이밀어 놓고 물어보는 심리는 뭔지. 키에르트는 픽 웃으면서도 입을 벌려주었다. 리시스가 먹여주는 고기 맛이 꽤 좋았다. 시장에서 과일 주스도 그랬는데, 이상하게 리시스가 먹여주면 더 맛이 있었다.
“음, 맛있군. 그대가 먹여줘서 그런가?”
이번에는 다른 이들 보라고 일부러 그러는 것인 줄 확실히 알겠다. 키에르트도 적당히 변죽을 맞춰 주었다. 실제로 맛있기도 했고. 맛있게 먹는 황제 폐하의 모습을 본 다른 사람들은 맛없다고 비판할 기회를 잃었다. 황제 폐하께서 맛있으시다는데 ‘이런 쓰레기 같은 음식을 어떻게 티파티에서 내놓으실 수가 있나요!’랄 수는 없었다. 다들 차려놓은 상 앞에서 눈치만 보다가 슬그머니 손을 뻗었다. 억지로 한 입 밀어 넣었던 사람들은 ‘어라?’ 하며 눈을 다시 떴다. 용기 내 한 입 머금어 본 차도 마찬가지였다. 겉보기로는 두렵기 그지없었는데 막상 입에 넣어 보니 이런 묘미가 따로 없었다. 한 입 들어가니 두 입, 세 입은 술술 들어갔다.
“어머, 어머나……, 맛있네요.”
“그러게요, 이런 맛이.”
“황후 폐하께서 이런 숨겨진 맛을 알려주시네요.”
사람 다 똑같았다. 맛있는 것을 먹으면 기분이 풀어지고, 저도 모르게 좋은 말이 나온다. 세니아를 따라왔으니 어떻게든 리시스를 공격하려고 벼르고 왔을 것이다. 그러나 황제 폐하도 맛있다고 먹겠다, 실제로도 맛있겠다, 나쁜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러게요. 정말 신선하네요.”
세니아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투박하기는 하지만 자신이 보급하는 찻잎으로는 도저히 낼 수 없는 맛이었다. 리시스가 왜 그렇게 찻잎에 자신만만했는지 이해가 됐다. 이것이 맛있게 먹어도 된다는 신호였다.
“멈춰지지가 않아요.”
“어떡하죠, 허리가 터질 것 같은데.”
그러면서도 손과 입은 멈추지 않았다. 접시가 치워지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졌다.
“……?”
리시스는 그쯤 되어서 뭔가 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들 너무 잘 먹었다. 새 모이만큼 찍어 먹는다는 귀족 아가씨들과 달랐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군인 한 사람만큼 듬직하게 음식들을 비워댔다. 아무리 많은 고기와 차를 준비했다 하더라도 양이 한정되어 있었다. 이 인원은 처음에 계획했던 인원에 가깝기는 하지만 어차피 안 올 거라 생각하고 먹어치웠던 양이 문제였다.
“저, 황후 폐하. 고기가 부족해질 것 같습니다.”
주방장이 진땀을 빼며 다가와 보고했다. 저렇게 먹어 치우는 귀족 영애들은 처음 보았다. 낯설고 두려운 존재였다. 리시스는 이제 세니아의 계획을 간파했다. 처음에는 맛으로 트집을 잡는 것이 일차.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많은 인원수로 먹어치워서 준비가 부족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이차였다. 일부러 많이, 잘 먹는 사람들만 데리고 온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리시스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재료 파악부터 시작했다. 전쟁과 크게 다를 것 없었다. 전술에서 식량 보급은 무엇보다 중요한 부분이었다.
“향신료와 찻잎은?”
“그건 충분합니다.”
“그럼 됐어.”
모자라는 것이 고기뿐이라면 걱정할 필요 없다. 리시스는 가볍게 웃으며 원시림이 된 숲을 바라보았다. 재료야 저기 많이 있으니까.
“다들 잘 먹는 걸 보니 뿌듯하네.”
“황후 폐하의 훌륭한 준비 덕분이지요.”
지금까지는 훌륭했다만, 앞으로도 그 준비가 먹힐지는 모르겠다. 숨겨진 말이 뻔히 보였다. 하지만 리시스는 여유로웠다.
“폐하, 기왕 사냥을 나오셨던 거니, 창궐하고 있는 짐승들을 좀 잡으면 어떨까요?”
“사냥해 오라고?”
“같이 가요.”
직접 사냥에 나서겠다는 리시스의 말에 키에르트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황궁 안의 사냥터라고는 하나 방치된 지 오래라 안전하지 않아. 풀어놓았던 맹수들이 얼마나 번성했을지 몰라.”
“안전하게 잡으면 되죠.”
그러나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설득에도 물러나지 않았다. 키에르트는 잠시 리시스를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가지.”
리시스가 나서면 뭔가 계획이 있을 것이다. 지금이 세니아와의 전투 중이라는 것은 키에르트도 알았다. 전투 중의 리시스는 천하무적이니까. 굳이 키에르트가 끼어들지 않았던 것은 리시스의 티파티였기 때문이다. 수국 정원에서 마주쳤을 때에는 키에르트가 먼저 나서 순번 정리를 했다. 그때는 키에르트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리시스의 장소다. 자신이 나서 정리를 하는 것 자체가 리시스의 전략에 차질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리시스가 먼저 청해 온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세니아가 한때 유력한 황후 후보였고, 만약 리시스와의 결혼이 끝난다면 다음 황후로 다시 거론될 확률이 가장 높은 사람이지만 지금은 황후의 밑이었다. 나중 일까지 생각하면서 봐 줄 필요는 없었다.
“나 활 좀.”
리시스는 나들이라도 가는 것처럼 발딱 일어나 친위대에게 손을 내밀었다. 사냥을 나왔으니 무기는 당연히 있었다. 하지만 친위대의 무기였다. 리시스가 다룰 수 있을지 없을지 몰랐다. 그래도 친위대는 충실하게 리시스의 손에 무기를 쥐여주었다. 주인님이 하시는 일에 토 달지 않고 움직이는 것은 노예의 본분이었다.
“잠시만 즐기고들 있어. 더 신선한 고기를 보급해 줄 테니까.”
리시스는 키에르트와 오붓하게 숲을 향해 걸어갔다. 어느 정도 걸어가자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사냥도 할 줄 아나?”
내심 되게 궁금했다. 말도 못 타는 리시스가 사냥이라니. 자신만만하게 활을 요구하는 걸 보면 할 줄 아는 것 같기도 한데…….
“아뇨?”
리시스는 웃으며 단박에 부정했다. 키에르트의 머리가 띵해졌다.
“아니, 잠깐. 그럼 그냥 사냥을 해다 달라고 하든가.”
“그럼 그림이 안 나오잖아요. 저는 오늘 엄청 무시무시한 황후로 기억될 예정이거든요.”
“……무시무시……?”
리시스가 전쟁터에서는 무시무시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 무서움을 깨닫게 될 때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실물을 본 후로는 이 사람이 그 사람이 맞나 의심도 되었다. 그만큼 리시스의 외모로 ‘무서움’을 연출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직접 활을 쏘아 보이지 않는 한 무서워 보이긴 어려울 것 같은데.”
키에르트의 염려에도 리시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진짜로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었다.
“괜찮아요. 제가 진짜 보여줄 건 따로 있으니까.”
“그럼 사냥은 왜 직접 나섰어? 위험한데.”
“이미지는 차츰 쌓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위험해요?”
“곰 나온다는 소문이 있던데.”
곰이라는 말에 리시스는 처음으로 진지해졌다.
“음……, 잡아주실 수 있죠?”
키에르트는 자신의 손에 들린 활과, 허리에 찬 단검을 내려다보았다. 곰을 잡기에는 터무니없이 빈약한 무기들이었다. 애초에 진심으로 사냥을 할 생각도 없었으니 무기를 제대로 챙기지도 않았다. 그러나 진짜로 곰이 나온다면?
“……노력해 보지.”
맨손으로라도 때려잡아야지, 어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