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무조건 이길 싸움2021.11.11.
함부로 입 벌리지 마! 키에르트는 호통을 칠 뻔했다. 저 작고 통통한, 새빨간 입술이 벌어지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는 심정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빨간 입술 사이로 드러난 진주알 같은 치아와, 그 사이로 언뜻 보이는 분홍빛 혓바닥. 자꾸 그런 쪽으로 생각이 엮였다.
“안 주세요?”
리시스는 세상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눈빛으로 재촉했다.
합궁을 건너뛰어도 친밀한 부부관계를 강조하기 위한 수작의 연속이라는 걸 알지만 손이 걸린 듯 덜컥거렸다. 겨우겨우 한 입 먹여주자 리시스는 꺅, 산새같이 소리를 지르며 호들갑을 떨었다.
“폐하가 먹여 주시니 더 맛있는 것 같아요! 폐하도 한 점 더 드시겠어요?”
호들갑조차 새의 파닥거림처럼 작고 연약했다. 키에르트는 넋 놓고 그걸 보다가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 아아.”
리시스의 애교에 앨린은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얌전히 입을 벌리는 키에르트의 고분고분함에 친위대 몇 명의 턱이 툭 빠졌다. 황제 부부께서 사이가 좋으시구나. 응, 많이 좋으시구나. 근데 너무 좋으시다. 지나치게……. 사람들은 가벼운 공황상태가 되어 누가 다가오는지도 몰랐다.
“제가 굉장한 시점에 본의 아니게 등장한 것 같습니다만…….”
다가온 사람이 말을 걸고서야 알아차렸다. 허멀 후작이었다. 한 손에는 책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돗자리를 든 채였다.
“굳이 물러나고 싶지도 않은데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황제 폐하?”
두 사람에게 다가온 허멀 후작은 깍듯이 예를 차리면서도 꽤나 무례한 청을 올렸다. 리시스는 헛기침을 하며 고기를 들어 올렸던 손을 내렸다. 왠지 나이 많은 사람 앞에서 히히덕거리던 모습이 민망했다. 정작 허멀 후작은 진귀한 광경을 구경한다는 듯 즐거워 보였지만.
“이 자리는 황후가 마련한 자리니 내가 아니라 황후에게 허락을 구하는 것이 맞겠군.”
“황후 폐하께서 친위대를 위한 사냥 대회라도 여신 겁니까?”
허멀 후작은 파티 장소를 휘 둘러보며 신기해했다.
“티파티야.”
초대장까지 받아 놓고 이러기인가? 돌아온 답장은 0개. 그 중엔 허멀 후작도 포함이었다. 리시스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초대장의 답장을 보내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 골탕 먹이는 짓을 허멀 후작이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등장 시간이 딱 그랬다.
“티푸드가 고기라니, 몹시 특이하군요.”
“에드린 식이거든. 고급은 아니지만 친해지기에 이만한 게 없어.”
“호오. 신기하군요.”
“일단 앉아서 한잔 하겠어?”
“주신다면 기꺼이 받겠습니다.”
허멀 후작은 까다롭게 굴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미심쩍어하던 다른 사람들과 달리 시원시원하게 음식을 입에 가져갔다. 차도 꿀꺽 잘 삼켰다. 의심스러워하며 냄새를 맡는 것이 아니라 다향을 즐기듯 두어 번 맡는 것이 전부였다. 리시스가 두 번 권할 필요도 없었다. 그 열린 태도에 리시스가 오히려 어리벙벙해졌다. 괴롭히러 온 게 아닌……, 건가?
“……잘 드시네.”
“훌륭하군요.”
허멀 후작은 차를 몇 번 더 홀짝이더니 감상을 늘어놓았다.
“고기도 차도 냄새만으로는 거칠고 저급하지만 막상 입에 넣으니 설탕이나 소금처럼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매력이 있군요. 한 번 입에 대면 멈추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고상한 척하는 향수 같은 차보다 원초적인 끌림이 있습니다.”
마치 진짜 티파티에 온 사람처럼. 그냥 왁자지껄 즐기던 황후궁 사람들이나 친위대와는 달랐다. 대접을 하면서도 대접받는 기분에 어깨가 들썩였다. 하지만 허멀 후작의 꿍꿍이가 어디에 있을지 모르니 최대한 힘을 주어 내렸다.
“그렇지? 먹는 것과 마시는 건 조화가 중요하잖아.”
“동의합니다. 쉬란에서는 굉장히 낯선 향과 맛임에도 즐길 수 있군요. 새로운데 자극적인 맛이라니. 황후 폐하 덕분에 좋은 경험을 해 보게 되었습니다.”
“다행이야.”
답장을 보내지 않은 것이야 어쨌든, 와서 즐겨주니 되었다. 리시스는 어깨의 힘을 빼며 미소 지었다. 허멀 후작은 몇 번이고 차를 홀짝이며 들여다보았다.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처음부터 초대해 주셨더라면 좋았을 텐데, 불청객으로 앉아서 조금 아쉽군요.”
“……응?”
리시스는 눈을 깜빡였다.
“오늘 여기는 일부러 온 게 아니었어?”
“……? 아닙니다만. 가끔 이렇게 책을 들고 정원이나 숲으로 가고는 합니다.”
허멀 후작은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던 책을 들어보였다. 액세서리로 책을 들고 다니는 건 아니었다.
“슬슬 돌아갈까 싶어 지름길을 가로지르는 김에 웬 굉장한 냄새가 나서 한 번 와 봤던 겁니다. 첫 티파티는 두 분 만의 티파티로 결정하신 겁니까?”
“아쉽게도 나 역시 초대를 받지는 못했군.”
키에르트가 끼어들었다. 저 뒤끝, 앞으로 몇 번은 더 보게 될 것 같다.
“아, 그럼 아무도 초대하지 않은 티파티를 여신 겁니까? 그것도 굉장히 혁신적이군요.”
허멀 후작은 밑도 끝도 없이 이해하려 들었다. 리시스는 고개를 저었다. 허멀 후작의 태도가 이상하다 느끼기는 했는데 그 이상한 느낌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었다. 어긋났던 앞뒤가 맞아 떨어지면서 얼굴에 피가 몰려 개미가 기어다니는 것처럼 따끔거렸다.
“나는 허멀 후작에게는 초대장을 보냈어.”
“……제게요?”
허멀 후작도 리시스의 말에 놀라 눈빛을 달리했다. 리시스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수도에 거주하는 모든 귀족 여성에게 초대장을 보냈다. 혹시 누락된 사람이 있지는 않은지 몇 번이고 확인을 했다. 빠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옆에서 그걸 지켜봤던 앨린도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가 드렸던 명단에도 허멀 후작님께서 분명히 들어 있었어요!”
“……이상한 일이군요. 저는 초대장을 받은 적이 없는데.”
개인적으로 만난 적도 있는 허멀 후작이라 초대장 문구를 더욱 신경 써서 썼다. 무슨 말을 썼는지도 기억했다. 분명히 리시스는 초대장을 보냈고, 허멀 후작은 그 초대장을 구경조차 하지 못했다. 이게 무슨 조화인가. 두 사람은 어이없는 사태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 그건가.”
먼저 상황을 알아차린 것은 리시스였다. 편지는 잘 전달해 달라고 하녀장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닿지 않았다. 그럼 어디에서 사라진 것일까? 이야기를 듣던 하녀장은 자신을 향한 리시스의 찌르는 시선에 헉 놀라 그 자리에 엎드렸다.
“제 불찰입니다!”
“응, 하녀장의 불찰이 맞네.”
황후궁 안의 잔손 가는 살림은 하녀장의 책임이었다. 책임소재가 분명했다. 리시스의 눈빛에 하녀장은 식은땀을 흘리며 강경하게 다짐했다.
“반드시 색출해 내겠습니다. 감히, 황후 폐하의 친필 서한을 빼돌리는 간 큰 인간이 황후궁에 있다니.”
오늘 황후궁의 모든 인원이 나온 것은 아니었다.
“꼭 잡아내.”
리시스의 초대장을 빼돌린 사람은 곧 누군가의 수하일 것이다. 그 꼬리를 계속 황후궁에 붙여 둘 수는 없었다. 리시스는 차갑게 명령했다. 눈빛이 달랐다. 갑자기 티파티 테이블이 전쟁터의 전략 테이블로 바뀐 듯한 착각마저 일었다. 리시스의 서늘한 눈빛에 하녀장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평소에 하늘하늘 웃기만 하는 제비꽃 같은 공주님이지만 얼어붙으니 베일 정도로 차가웠다.
“예,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하녀장을 물린 리시스는 다시 허멀 후작을 돌아보며 웃어 보였다. 초대장을 보냈던 유일한 손님이다. 우여곡절 끝에 자리하게 되었으니 소중한 자리로 만들어야 했다.
“손님이 있는 자리에서 쥐를 잡는 소동이 일어날 줄은 몰랐네. 입맛이 안 떨어졌길 바라.”
“쥐야 어디에든 숨어 있지요. 다만 황궁은 워낙 깨끗하게 치우고 살아서 쥐가 없는 줄 알았습니다.”
허멀 후작은 차를 홀짝 마시며 태연하게 이야기를 받았다.
“집이 오래 비워져 있으면 바깥 짐승이 들어오는 법이니까. 잠깐 살 집이면 그냥 같이 살겠는데……, 좀 오래 살 것 같아서.”
“길든 짧든 집에 쥐가 있는 건 좋지 않지요.”
허멀 후작의 응대에 리시스의 안색이 밝아졌다. 이 정도만 받아주는 것도 고마운 일이었다. 아예 못 들은 것처럼 무시하든가 리시스를 몰아붙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쥐를 내쫓으면 여름 준비도 조금은 더 수월해지려나?”
친위대를 끌어들였지만 일손은 많을수록 좋다. 리시스는 은근슬쩍 허멀 후작을 떠보았다. 허멀 후작은 크게 리시스의 편을 들지도 않았지만 적대하지도 않았다. 궁에 한 자리 차지하고 있기도 하고, 작위도 후작이다. 리시스에게는 여러모로 도움이 될 사람이었다.
“흐음……. 아예 무너질 집이면 쥐가 있든 없든 무너지겠지요. 그 집에 들어갈지는 조금 더 지켜보고 판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너 하는 거 봐서, 라고 허멀 후작이 선을 그었다. 아직 여름 축제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다. 리시스는 조금 더 열심히 치덕거려 보기로 마음을 먹으며 싱긋 웃었다. 허멀 후작이 이런 신선한 경험을 좋아한다는 것은 잘된 일이었다. 하나라도 더 끌어들일 방법을 쥐고 있는 것이니까.
“손님이 더 온 모양입니다.”
그런데 저 멀리서 재잘거리는 목소리들이 한 무더기로 다가왔다. 새가 지저귀는 듯한 밝고 영롱한 목소리들. 저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화사한 드레스가 햇살을 반사해 반짝거렸다. 쉬란의 드레스들은 유난히 반짝이는 재질이 많아서 어디서든 빛났다. 귀족 아가씨들이었다. 의외로 인원이 적지 않았다. 앨린이 수를 헤아려 보다가 헉 숨을 삼켰다. 어림짐작으로 보아도 작은 파티에 준하는 인원이었다.
“앨린. 못 온다는 답장은 없었지?”
“네에…….”
참석한다는 사전 답장 대신 직접 답장을 들고 티파티에 찾아가는 경우. 무례한 일이지만 무례를 탓할 수는 없다고 했다. 대신 그랬다가는 다신 초대받지 못할 수도 있어 못 하는 일일 뿐. 다들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않고 오늘만 사는 사람들인 모양이다. 또는 리시스가 오늘만 살아 있는 황후라 생각했을 수도 있고. 하지만 호락호락 그렇게 물러서 줄 생각은 없었다. 리시스는 전의를 다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어쨌든 티파티에 참가 자격이 있는 손님이네. 잘 맞아야지.”
“황후 폐하…….”
앨린이 울상이 되었다. 웬만한 준비는 되어 있지만 저 사람들은 작정하고 리시스를 괴롭히기 위해 온 사람들이다. 자신도 겪었던 일의 반복에 겁을 단단히 집어먹었다. 그러나 리시스는 태연히 미소 지으며 돌격하는 적군을 맞아들였다. 오늘의 목표는 저들을 섬멸하는 것보다 허멀 후작의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이다. 전투의 목표를 잊지 않으면 불리한 싸움도 승리할 수 있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미리 연락드리지 못하고 불쑥 찾아뵌 점, 깊이 사죄드립니다. 돌아가시라 명하시면 그리하겠습니다.”
역시나, 그들의 맨 앞에 선 것은 세니아였다. 세니아가 우아하게 절을 올리자 그 뒤에 우르르 몰려선 아가씨들도 곱게 인사를 올렸다. 표면적으로는 흠잡을 곳 없이 깍듯했다. 그러나 이제 진짜 전투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