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부부의 확실한 애정표현2021.11.07.
친위대는 정리했으니 이제 키에르트 차례였다. 친위대는 그래, 황실 소유의 사냥터에서 무단으로 수렵, 취사 행위를 한 역도들을 때려잡겠다고 달려왔다는 분명한 사유가 있었다.
“제가 듣기로 황궁 사냥터는 폐하께서 직접 폐쇄하셨다고 들었는데……, 사냥을 나오셨다고요.”
그럼 키에르트는 왜 안 하던 사냥을 갑자기 한다고 나섰을까? 그것도 리시스가 티파티를 여는 그날에, 딱. 리시스는 상냥하게 웃으며 일단 키에르트가 먼저 말할 기회를 주었다. 기왕이면 키에르트가 스스로 예쁜 말로 포장해 말해주는 쪽이 사람들 듣기에도 좋을 테니까. 그러나 리시스가 넘겨준 기회에 키에르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쩌다 보니.”
“……끝이에요?”
“끝이야.”
리시스는 눈썹을 휘었다. 정말 왜 이러시지? 아까부터 계속 피하려고만 하고, 말과 행동이 다 이상했다.
“하필 사냥터에서 제가 티파티를 여는 날, 폐쇄된 후 한 번도 와 보지 않으셨던 사냥터에 사냥을 하러 어쩌다 오신 거라고요.”
더 이상 기회를 줘 봤자 예쁘게 마무리될 것 같지 않아 리시스가 먼저 본론을 꺼냈다. 처음부터 이상했다. 오고 싶으면 티파티 가도 되냐,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이지 않은가. 이제껏 보아 온 키에르트라면 그랬을 사람이다. 합궁 날부터 이상해졌다.
“……그래.”
역시나 키에르트는 찔끔하며 눈을 피했다. 리시스는 실눈을 떴다. 문제가 있긴 있는데, 회피하고 싶은 문제라……. 그게 뭘까. 키에르트가 알아서 말할 생각이 없으면 파낼 수밖에.
“사실 제가 티파티 잘 하나 보러 오신 거죠?”
“그건 아니야.”
“……아니에요?”
“그대가 어련히 잘할까.”
이 와중에도 신뢰의 표현은 감사하긴 한데……. 티파티가 목적이 아니라면, 그럼 리시스가 찍을 수 있는 답이 좁혀졌다.
“저 보고 싶어서?”
“아니.”
이번에야말로 정곡을 찔려버렸다. 키에르트는 놀라서 단박에 부정했다.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단호한 부정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부정할 일이야? 설마, 진짜, 자신과의 계약을 끝장내 버리려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그렇다 치기에는 키에르트가 냉정하거나 매몰찬 것도 아니었다. 리시스는 혹시 몰라 한 번 더 찔러 보았다.
“정말 아니에요? 진짜요?”
“아니야.”
키에르트가 결국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누가 보아도 아닌 게 아니었다. 슬쩍 붉어져 버린 얼굴, 더듬는 말투. 리시스가 얼굴을 바싹 들이대며 눈을 마주치는데, 견딜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리시스의 말에 동의하는 말이 나오지도 않았다. 자꾸만 그대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하루 종일 티파티 생각밖에 안 했다, 온갖 핑계를 다 떠올리다가 겨우 사냥이 떠올라 한달음에 달려왔다, 이런 말을 어떻게 하냔 말이다.
“왜 얼굴을 보고 말씀을 못 하세요? 네?”
그런 키에르트의 속까지는 알지 못했던 리시스의 눈에는 이상해 보이기만 했다. 에드린 사람의 기준으로 봤을 때, 키에르트는 일상적인 매너조차 지나치게 달달한 구석이 있었다. 예를 들어 아무렇지 않게 꽃을 선물해 준다든가, 상대가 좋아한다고 돈을 덥썩 줘 버린다든가 하는 것들. 받는 사람이 민망해질 짓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람이 고작 눈 마주치는 것도 못 하는 건 뭔가가 있다는 소리였다. 슬쩍 걱정이 올라왔다. 이론적으로 두 사람의 계약은 탄탄했지만 사람의 마음은 모르는 일이다. 리시스는 애교로 우리 사이 문제없다, 티내려던 작전을 철회했다.
“……폐하. 진짜 저, 보기 싫어지신 거예요?”
대신 동정심에 호소하는 작전을 채택했다. 이래도 키에르트가 굳건하게 자신을 외면한다면 외부적인 원인이 있다는 말이다. 리시스는 눈썹을 갸륵하게 모으며 눈에 힘을 주어 안구를 촉촉이 적셨다.
“뭐?”
다행히 이번 작전은 먹혔다. 키에르트는 다른 의미로 당황하며 리시스를 돌아보았다. 얼굴을 바싹 들이대고 있던 리시스와 코앞에서 눈이 딱 마주쳐버렸다. 물방울을 머금은 동그란 눈을 코앞에서 외면하는 것도 난관이었다.
“그렇잖아요……, 합궁 날에도 그냥 돌아가 버리셨고.”
“아니, 그건.”
키에르트는 그 물방울이 굴러 떨어질까 봐 조마조마했다. 그래서 일단은 리시스를 말려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 반응에 리시스는 한숨 놓았다. 적어도 완전히 마음이 틀어진 건 아닌 걸 확인했다. 그럼 이제 키에르트가 왜 이러는지 이유만 찾으면 되었다.
“혹시 합궁 날 제가 먼저 잠들어 있어서 화나셨어요?”
“……아니, 설마. 사람이 그런 걸 가지고.”
“아님 부담 때문에 긴장이 되셔서……?”
“부담은 무슨.”
그건 남자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발언이었다. 키에르트는 인상을 팍 썼다. 이것도 아니라면 대체 왜 자신을 똑바로 보지 않는 건가. 리시스는 진짜로 미궁에 빠졌다. 남은 이유는 없는데. ……아니지, 하나가 남아 있긴 했다. 앨린이 다시는 이상한 옷을 가져다 입히지 못하게 됐던 이유.
“……제 차림이 차마 눈 뜨고 못 볼 정도로 민망해서?”
키에르트의 눈썹이 가볍게 꿈틀거렸다. 그것만으로도 리시스는 답을 얻었다. 그게 맞았다.
“어…….”
설마 했던 그것이 정답일 줄이야. 그 순간 키에르트가 울컥 내질렀던 말이 떠올랐다.
‘그대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아!’
리시스는 작게 숨을 들이켰다. 그 말이 ‘리시스의 흉흉한 옷차림이 자꾸 떠올라서’ 미칠 것 같다는 말로 이어지는 것이었다면……? 키에르트는 그것이 바로 정답이라는 양 시선을 피했다. 리시스와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그날 밤의 차림이 생각나는 것처럼. 수줍음 타는 소년 같았다. 리시스는 띵 하고 충격을 받았다. 그저 매너가 좋아 리시스를 건드리지 않고 물러나 준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의 차림이 야해서, 참지 못할 정도라서 도망을 간 것이었다. 리시스의 얼굴에 불이 확 붙었다. 키에르트가 어떻게 느꼈을지까지 생각이 닿지 못했다. 그도 남잔데! 어찌 보면 남자에게 알몸을 보여준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어머.”
리시스는 두 손으로 뺨을 감쌌다. 부끄러워서 자신이야말로 도망가고 싶었다. 머릿속에 열이 올라 핑핑 돌았다. 그 와중에도 키에르트가 자신을 팽해버린 것이 아니라는 걸 확인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저는 또……, 폐하께서 제게 등을 돌리셨나 해서…….”
“내가 그대에게 이유도 없이 왜.”
둘의 협정은 깨야만 할 사유가 있지 않는 이상 무너뜨릴 이유가 없다. 키에르트 쪽에서도 그랬다.
“아무래도 합궁 날 그냥 나가신 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떠드니까…….”
“그건, 그대가 너무 곤히 자고 있어서.”
“제 차림이 너무 취향이 아니셔서 정나미 떨어져 도망가신 건 아니죠?”
“취향이 아닌 건 맞지만 그런 걸로 마음이 돌아설 리가 없잖아.”
국가의 안녕이 걸린 문제다. 손바닥 엎기처럼 가벼울 리 없었다. 어렵사리 서로의 결속을 확인했다. 키에르트도 국가와 관련되니 머릿속을 맴돌던 합궁 날의 리시스가 옅어졌다.
“합궁도 중요하지만 그대의 몸이 더욱 소중해 자리를 피해주었던 거야.”
“역시 그렇죠?”
리시스는 거 보라는 듯 시종들과 하녀들을 죽 돌아보았다. 그들 중 리시스가 소박맞았다는 소문을 안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상황이 너무 명백한 탓이었다. 입단속을 시켜도 소문은 먼지 같은 것이다. 아무리 가라앉히려 해도 풀풀 날아가 사방으로 퍼진다. 소문을 가라앉힐 가장 확실한 방법은 ‘보여주는’ 것이다.
“제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 건 절대 아니시죠? ……아, 옷은 마음에 안 드셨을 수도 있고요.”
“그 옷은……, 자칫하면 감기에 걸리기 십상이니 앞으로는 굳이 그런 걸 입지 않아도 돼.”
“폐하 좋으시라고 입은 거긴 했어요.”
“……마음은 고맙지만.”
“싸매는 쪽이 취향이신 거죠?”
“……굳이 따지자면 그런 것 같군.”
어쩌다 보니 키에르트는 스스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싸맨 여성을 좋아하는 취향이 되어버렸다. 리시스가 먼저 이야기를 끌어가게 더 놔뒀다가는 스스로도 모를 이상한 취향이 쌓일 판이었다. 키에르트는 얼른 다른 쪽으로 이야기를 돌렸다.
“그런데, 초대장도 받지 못한 사람이 이렇게 앉아 있어도 될까?”
키에르트의 뒤끝이었다. 시장에서는 키에르트에게도 초대를 한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앨린의 조언으로 키에르트는 초대하지 못했다. 미리 언질이라도 해 놨어야 했는데. 티파티 준비로 너무 정신이 없어 미처 연락을 하지 못했다.
“폐하는 언제든, 어디든 가실 수 있는 분이잖아요. 그러니까 오실 수 있으면 당연히 오실 거라 생각하고 안 보냈어요. 초대장 보내면 안 그래도 바쁘신데 부담스러우실까 봐.”
“초대장을 받든 안 받든 어차피 내 마음이라면, 기왕이면 초대받는 쪽이 나았을 뻔했군.”
“그래도 결국 이렇게 앉아 계시잖아요.”
리시스는 배시시 눈웃음을 쳤다. 제가 이렇게까지 비위 맞춰 드리니, 초대장 안 보낸 것에 대해서는 그냥 넘어가 주세요, 하는 반쯤 협박이었다.
“흐음…….”
초대장을 받지 못한 것이 어지간히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다. 키에르트의 얼굴은 쉽게 펴지지 않았다. 키에르트 본인은 모르는 것 같은데, 지켜보고 있는 황후궁 사람들은 그의 표정 하나에 심장 위치를 바꾸고 있었다. 이것보다 더 확실하게, 알콩달콩한 모습을 보여 줘야 하게 생겼다.
“그러지 말고, 한 입 드셔보세요. 아.”
“…….”
“아.”
키에르트가 쉽게 입을 벌려주지 않자 리시스는 에잇, 하고 막무가내로 입술 사이로 고기를 밀어넣었다.
“!”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고기를 입에 물고 있었다. 뱉어내면 분위기가 그대로 곤두박질치겠지. 키에르트는 잠깐 고민하다가 그냥 고기를 우적, 씹었다. 벌써 두 번째다. 리시스의 손을 거쳐 검사도 안 한 음식을 넙죽 받아먹은 것이. 이제는 설마 독으로 죽이겠냐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큰일이다. 이렇게 방심하면 안 되는데. 그러면서도 냄새만큼 맛이 있어 씹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차도요.”
자포자기에 가깝게 마음을 내려놓은 키에르트는 순순히 리시스가 따라 준 차를 받았다. 의외로 끓이니 그 살인적인 냄새가 꽤 가셨다. 친위대들이 맛있게 마시는 모습이 영 이해가 안 갔는데, 궁금해서라도 더 마셔보고 싶었다.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가 목으로 넘긴 키에르트는 눈썹을 들어올리며 차를 내려다보았다.
“의외로 괜찮죠?”
“괜찮군.”
키에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시스는 그 사이에도 쉴 새 없이 고기를 키에르트의 접시에 나르고 있었다.
“그대는 좀 먹었어?”
“아, 먹어야죠.”
사람들 챙기느라 정작 리시스의 입으로 들어간 것은 많지 않았다. 키에르트가 자신의 접시를 앞으로 밀어주려는데, 리시스가 천연덕스럽게 입을 벌렸다.
“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