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먹이기 작전2021.11.04.
‘이 사람 갑자기 왜 이래?!’
리시스는 정말로 당황했다. 오늘의 키에르트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짓투성이였다. 시비를 거는가 싶더니 갑자기 열렬하게 고백했다. 어느 장단에 맞춰주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은 키에르트가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잔뜩 흥분한 것 같으니 가라앉히는 것이 먼저였다.
“어……, 자 일단 천천히 숨을 내쉬어 보시고요…….”
“……후.”
진정해. 침착해. 리시스의 지시에 키에르트도 조금씩 정신을 차렸다. 눈앞에 있는 것은 제대로 옷을 입고 있는 리시스다. 헐벗고 앞구르기 뒷구르기를 하는 리시스도 아니고, 자신을 들여다 볼 뿐이지 달라붙지도 않고 있다. 스스로에게 차근차근 설명을 하다 보니 리시스가 조금씩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침착함도 서서히 돌아왔다.
“오, 이제 좀 덜 미쳐 보이세요.”
“……다행이군.”
키에르트는 평소의 모습을 되찾았다. 이제야 리시스도 가슴을 쓸어내렸다. 일단 진정은 시켰으니 이제 남의 티파티에 괴한을 가장한 친위대를 투입시킨 사유를 들어 볼 차례였다.
“그래서, 갑자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그게.”
“그, 그, 저…….”
그때 둘 사이에 끼어들지 못하고 있던 친위대가 쭈뼛쭈뼛 나섰다. 이 사태의 처음 원인은 친위대의 설레발이었다. 처음에는 당연히 시종과 하녀들이 작당해 놀고먹는 것으로만 알았다. 황후도 알아보지 못했다. 웬 귀족 여자애 하나가 철없이 꼈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둘의 대화를 지켜보니 철없는 귀족 여자애는 바로 황후였다. 황후는 황실의 인원이다. 사냥터에서 사냥을 하고, 그걸 먹을 권리가 있었다. 지금까지 황후가 없던 기간이 길어서 황제 이외엔 아무도 없다고 깜빡 착각을 한 죄가 컸다.
“저희가 착각을 해서……, 그렇게 됐습니다. 송구합니다. 화, 황후 폐하.”
“……아, 아아…….”
갑자기 친위대의 사과를 받아버린 리시스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친위대와의 관계도 키에르트와의 관계만큼이나 껄끄러웠다. 친위대는 키에르트가 전쟁터에 직접 나가지 않았을 때 대신 전쟁에 나섰다. 그때마다 친위대는 리시스에게 된통 당했다. 키에르트보다 더 성대하게 당한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다. 리시스도 자신이 그렇게 맹렬하게 공격했던 사람들을 다른 입장에서 만나니 막막해졌다. 키에르트에게 했던 것처럼 죽이겠다고 집게를 들 수도 없고.
“어……, 오랜만이네.”
“예에……, 그, 맬드린 전투 이후 처음……이지요.”
“…….”
하필이면 마지막 만남이 전투였다. 그것도 친위대 전체가 어망에 긁혀 올라와 해삼 떼처럼 한방에 사로잡힐 뻔했던, 친위대에게 끔찍하게 치욕스러웠던 전투. 다시 서먹한 분위기가 흘렀다. 리시스는 조금 더 힘을 내기로 했다. 어차피 자신은 쉬란의 황후다. 이미 한 번 해 봤다. 키에르트와도 잘 하고 있지 않은가.
“고기 먹고 갈래?”
“예?!”
“많거든. 어차피 손님도 더 없으니까. 먹고 가.”
“예? 아, 그게 말입니다.”
친위대는 진땀을 뻘뻘 흘리며 키에르트에게 도움을 청했다. 리시스는 친위대가 키에르트만을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럼 간단했다. 키에르트만 잡으면 되니까. 마침 겸사겸사 잘됐다. 기왕 이렇게 된 것, 합궁 소박 사건도 잠재워버릴 수 있게 됐다.
“폐하도 차 한 잔 하고 가세요. 저번에 궁금해 하셨잖아요.”
“……아니, 딱히 궁금하지는…….”
키에르트는 냄새로 경험한 경악스러운 차를 떠올리며 주춤거렸다. 아무리 리시스가 귀엽게 꼬셔도 그 차만큼은 도전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리시스는 막무가내였다.
“가요오.”
리시스는 호객하듯 키에르트의 팔을 직접 잡아끌었다. 끽해 봐야 고양이가 소매 물고 가는 수준이었지만 키에르트는 속절없이 끌려갔다. 그가 끌려가니 친위대도 덤으로 딸려왔다. 초대장 없는 어색한 손님들이 섞였다. 아무리 초대장이 없어도 이들은 황궁 최고의 권력자, 황제와 친위대다. 이들의 등장에 신나게 먹고 떠들고 즐기던 사람들은 싹 조용해져 도망치듯 제자리로 물러갔다.
‘앗…….’
사람들이 다시 일하던 자리로 돌아가 버리자 겨우 띄워놓았던 분위기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친위대와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도 중요하고, 키에르트와의 불화설을 잠재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티파티를 성공시키는 것도 중요했다. 티파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초대했던 귀부인들은 오지 않았어도 모든 사람이 즐겁게 준비한 재료를 소진시키면 그건 성공한 파티다. 리시스는 조금 전까지 열심히 먹어치운 고기의 힘으로 반짝반짝 웃음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사람이라면 풀어지지 않을 수 없는 절대적인 한 방이 리시스의 손에는 있었다.
“자, 일단 먹어.”
그것은 먹을 것. 친위대는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레 한 점씩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처음으로 눈을 뜬 사람처럼 휘둥그런 눈을 했다.
“아니, 이 맛은?!”
“어때?”
“이게 이런 맛이었습니까! 끝내줍니다!”
역시 맛있는 것 앞에 풀어지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리시스는 흐뭇하게 웃으며 불판을 향해 서두르라는 손짓을 은밀히 보냈다. 고기는 끊기면 안 된다.
“오! 이게 이런 맛이었구나!”
“와……, 냄새가 그냥 냄새가 아니었네. 냄새는 프롤로그였네.”
“저희가 사실 이 냄새 때문에 엄청 괴로웠지 말입니다. 하……, 적진에서 맛있는 냄새가 풍겨 올 때마다 얼마나 미쳐버릴 것 같은지 아십니까.”
“아니, 쉬란 요리사는 왜 이걸 못 알아냈냐.”
그냥 알아내면 비법이 아니지. 두 나라가 사이가 좋아서 교류가 활발했던 것도 아니니 제조법은 비법으로 묻혀 있었다. 사는 사람 기준에서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정말 간단하고 별것 아닌 것이어도 사소한 차이는 컸다. 리시스가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먹이기’ 작전은 친위대에게도 여지없이 통했다. 안 그래도 혈기왕성한 나이의 청년들이니 보통 사람들보다 식욕도 컸다. 다들 공작이니 백작이니 한가락 하는 귀하신 분들이지만 먹을 것 앞에서는 평범한 청년의 모습이 불쑥 튀어나왔다. 전쟁터에서 굴렀던 사람들이니 보통 귀족들보다 더 털털한 면도 한몫했다. 그것이 리시스와 잘 맞았다.
“지금이니까 여쭤보는 거지만, 노락 고지에서 후면을 친 건 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허리끈이 느슨해지면 마음도 느슨해진다. 급기야 질문까지 던졌다. 질문을 던진 사람은 친위대장인 미하엘이었다. 공교롭게도 질문은 초야에 키에르트가 내기 조건으로 걸었던 것이었다.
“그게 그렇게 궁금한가?”
키에르트에 이어 친위대까지 같은 질문이라니.
“황후 폐하의 존재를 제대로 알게 된 첫 전투였으니까요. 그때 정말 황제 폐하까지 다 함께 몰살당하나 싶었는데……. 아직도 그 순간을 떠올리면 자다가도 소름이 돋아서 깹니다.”
리시스는 킥 웃었다. 지난 일이니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그때엔 욕깨나 먹었을 것이다.
“그땐 살려줬던 거야. 작정하고 죽이려면 다 죽일 수 있었어. 산 채로 잡으려다 놓쳤던 거지. 목숨 빚진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 빚진 게 맞긴 합니다만……, 갚으라 하실 겁니까?”
“그럼, 악착같이 받아낼 건데.”
농담이 오가는 현장이었지만 리시스가 황후라 마냥 웃을 수 없었다. 미하엘의 입가가 서서히 내려앉았다.
“……진심이십니까?”
“왜 진심이 아닐 거라 생각해?”
리시스의 입가는 지그시 올라갔다.
“……뭘로 받으시게요?”
“원래 목숨 값은 목숨으로 받는 거라 평생 노예로 두잖아.”
“억.”
황후라면 할 수 있다. 그래서 농담이시죠?라고 되물을 수도 없었다. 서서히 얼어붙는 미하엘에게, 리시스는 관대하고 인자하게 선언했다.
“하지만 노예는 필요 없고, 대신 내 일을 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무슨 일 말씀이십니까?”
“여름축제 관련된 건데……, 보니까 친위대 역할도 꽤 있더라고.”
도서관에서 자료집과 씨름한 결과 알아낸 것들이다. 친위대는 기마 퍼레이드를 하기도 하고, 간단한 훈련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시시때때로 전쟁터를 오가는 중이었으니 뭐든 간단하고 형식적이었다. 가벼운 여흥 정도에 그쳤다.
“이제 에드린과 전쟁을 하지는 않으니 다들 힘 쓸 데 없잖아?”
“……그렇……, 긴 하지요.”
“그럼 여름축제에서 일 좀만 더 하자.”
“무, 무슨 일 말씀이십니까?”
갑자기 불길함이 스산하게 바람을 일으켰다. 리시스는 여전히 반짝반짝 소녀처럼 웃고 있고, 물방울 같은 목소리도 가벼웠다. 하지만 저 목소리로 죽으라고 내칠 수도 있는 사람이다. 리시스가 짰던 작전들을 생각해 보면 그러고도 남았다.
“음, 그건 구체적으로 정해지지는 않았는데. 사람들 앞에서 친위대가 이렇게 멋있었다, 이걸 알리려면 연습도 하고 열심히 잘해야 할 거야.”
“응? 절벽에서 뛰어라가 아니네요?”
“아, 그거 좋네.”
“아뇨, 아뇨, 아뇨!”
“왜? 진짜 괜찮은 것 같은데. 절벽은 구하기 어려우니 성벽은 어떨까.”
부디 리시스의 생각이 저쯤에 멈춰주기를! 친위대원들의 간절한 눈빛은 급기야 키에르트를 향했다. 황후 폐하를 막을 분은 황제 폐하뿐이시지 않습니까! 그러나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초대에 기분이 좋아진 상태였다. 그는 이렇게 열의를 가지고 황후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리시스의 꿈과 희망, 열정에 찬사와 응원을 보냈다.
“신선하고 재미있겠는걸.”
“정말요? 성벽에서 뛰어내릴 때는 역시 망토와 창이 필요하겠죠?”
“좋군.”
“자, 잠시만……, 뛰는 사람의 의사도 한 번만 물어봐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미하엘이 눈물어린 항의를 던졌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채권더미를 쥐고 있는 사채꾼 같은 냉정한 웃음이었다.
“정 뛰기 싫으면 강요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사실 전쟁터에서 살려 준 게 노락 고지 한 번뿐만은 아니지 않아?”
그렇게 치면 목숨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세 번, 네 번, 젠장! 셀 수도 없이 빚졌다. 반대로 리시스는 전선에서 직접 칼을 휘두르지 않았으니 빚진 적도 0이다. 리시스는 진영 가장 깊숙한 곳에서 가만히 지켜보며 지시만 하든가 도저히 찾아낼 수 없는 곳에 숨어 함정을 조정했다. 전쟁 막바지에 악에 받쳐 잡아보려고 해도 실패했다. 전적으로 따지면 완패를 한 노예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
“그럼, 열심히 해 줄 걸로 믿어도 되지?”
“예…….”
전쟁터가 아닌 곳에서 만났다고 사람이 바뀌는 건 아니었다. 비록 보고 있으면 다른 사람을 손끝으로도 못 찌르는 무해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쉬란의 군대를 송두리째 가둬놓고 인질로 잡을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폐하.”
친위대를 여름 축제의 일원을 끌어들이는 작업을 마친 리시스가 이번엔 키에르트에게 화두를 던졌다. 키에르트는 느닷없이 자신을 향해 날아든 관심에 허리를 곧추세웠다. 리시스는 생긋 웃으며 키에르트에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