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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그대 때문에 미치겠어 (26/153)

26. 그대 때문에 미치겠어2021.10.31.

오늘 키에르트의 집중력은 바닥을 쳤다. 가끔 피로가 쌓여 집중이 잘 안 되는 날은 있어도 딴 생각이 자꾸만 끼어들어 글씨가 안 읽히는 건 또 처음이었다.

16549358865119.png“하…….”

키에르트는 무거운 숨을 몰아쉬며 미간을 문질렀다.

16549358865124.jpg“어디 편찮으십니까?”

16549358865119.png“……아니.”

아픈 거면 숨길 필요도 없지.

16549358865124.jpg“생각이 복잡하신가 봅니다.”

16549358865119.png“……음.”

키에르트는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빨리 글씨라도 읽어서 머릿속에 든 생각을 지워버리려 했다. 『최신 에드린-로구안 삼메르 지역 동향 보고』 정략결혼을 통한 협약을 맺었다고는 하나 둘의 결탁도 예의 주시하며 경계할 대상이었다. 키에르트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글씨를 하나하나 읽어 내려갔다.

16549358865119.png‘에드린 측의 움직임, 크게……. 크게 움직였지. 침대에서. 온 사방으로 뒹굴며, 그러던 중에 내비치던 뽀얀 피부…….’

키에르트는 눈과 다르게 읽어버린 내용에 눈을 깜빡였다.

16549358865119.png“……뭐?”

16549358865124.jpg“예?”

16549358865119.png“아니, 아니야.”

키에르트는 고개를 휘휘 젓고 다시 눈을 부릅떴다. 이번에야말로 진짜로 집중, 집중을 할 것이다.

16549358865119.png‘……하여, 로구안의 황태자가 최근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음에 주목, 침실 수준까지 투입 가능한지에 대한 여부를 검토……, 침실. 침실……. 침……!’

쾅! 서류로 책상을 쪼개버릴 뻔했다. 키에르트의 주먹이 책상 위에서 부르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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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뭘 읽어도 다 어젯밤, 리시스의 파격적인 옷으로 연결되어버렸다. 그놈의 옷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쪼가리……! 도저히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눈을 감아도 리시스, 눈을 떠도 리시스만 떠올랐다. 모든 글씨가 리, 시, 스라고 쓰여진 것 같았다. 평소의 리시스면 이렇게 미칠 기분이라도 안 들겠지. 헐벗은 리시스, 침대를 뒹구는 리시스, 치덕거리며 달라붙는 리시스여서 돌아버릴 것 같았다. 일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16549358865119.png“……후.”

키에르트가 다시 내뿜는 긴 한숨에 제롬은 슬그머니 창문을 열었다. 아침부터 한숨을 너무 쉬셔서 창에 김이 서릴 지경이었다. 시원한 바람이 몰려 들어왔다. 덕분에 키에르트의 터지기 직전까지 과열되었던 머리도 조금은 가라앉았다. 심호흡을 하며 최대한 멀리, 온화로운 풍경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날이 유난히 좋았다. 새파란 하늘에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솜뭉치 같은 구름. 바람은 시원하게 솔솔 불어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야외에서 티파티를 열기엔 딱 좋은 날씨였다. ……티파티. 다시 한번 키에르트의 몸과 마음이 요동쳤다. 오늘은 리시스가 황후로서 첫 티파티를 여는 날이었다. 지독한 찻잎 냄새에 기절할 뻔했던 날, ‘초대해 드릴까요?’라며 운을 떼더니, 결국 초대장은 날아오지 않았다. 찻잎보다 지독한 배신이었다. 사람이 한 말은 지켜야지. 꼭 리시스의 티파티에 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신뢰의 문제다. 이번에는 불쾌감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16549358865124.jpg“폐하, 친위대가 도착했습니다.”

그때 친위대가 시기적절하게 등장했다. 전쟁이 끝난 뒤 포상휴가를 받았던 친위대가 휴가를 마치고 복직보고를 올리러 오기로 한 날이다. 친위대는 키에르트의 손과 발이었다. 호위는 물론이요, 키에르트 대신 전선을 오가며 사령관 역할까지도 수행했다.

16549358865119.png“오늘은 수행이 아니라 임무에 대한 얘기를 하는 날인데, 다들 복장이 왜 그런가.”

오늘은 회의만 하는 날이니 평범하게 입어도 된다. 모처럼 수도에 왔으니 남들처럼 멋도 좀 부려도 되련만, 친위대는 다들 무장을 한 채였다. 당장 전쟁터로 달려가도 무방할 만큼.

16549358865124.jpg“폐하의 검은 언제나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친위대장인 미하엘이 척, 하고 발소리를 내며 한 발 나서 보고하듯 대답했다.

16549358865124.jpg“마음에 드시지 않는다면 시정하겠습니다.”

16549358865119.png“아니야, 됐어. 앉아. ……아니.”

바로 회의를 시작하려던 키에르트가 문득 스친 생각에 손을 들어올렸다.

16549358865119.png“그 차림으로는 앉아서 얘기하기 힘들지.”

16549358865124.jpg“괜찮습니다.”

16549358865119.png“사냥이라도 하면서 얘기하는 건 어때.”

사람의 머리는 때로 기가 막히게 돌아갈 때가 있다. 지금의 키에르트가 그랬다. 리시스. 티파티. 사냥터. 친위대. 무장. 사냥. 사냥이라는 공통점을 발견해 버린 것은, 운명이 분명했다. ***

16549358865124.jpg“폐하? 사냥터는 이쪽 길이 더 빠르지 않습니까?”

16549358865119.png“가는 김에 이쪽도 둘러보려 한다.”

16549358865124.jpg“아, 알겠습니다.”

벌써 세 번째다. 충직한 친위대는 폐하의 명대로 따를 뿐, 이유를 따지지 않는다. 하지만 속에서 피어오르는 의문은 어쩔 수 없었다. 키에르트는 황궁 안에 먹을 것이 없는 것도 아닌데 굳이 왜 사냥터에 일부러 동물들을 몰아 넣냐며 사냥터 관리 예산마저 끊어버린 사람이다. 사냥터는 원래는 사냥 대회를 위해 조경도 예쁘게 꾸며 놓고 사냥당하는 동물들도 종류별로 풀어 키웠었다. 그러나 지금은 곰이 나오느니 표범이 나오느니 하는 황궁전설만 생산되는 곳이 되었다. 사냥터를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 사냥을 가자며 먼저 나선 것도 이상한데, 괜히 이래저래 길을 돌아가는 것도 이상했다. 그렇다고 말처럼 진짜 둘러보는 것도 아니었다. 친위대는 고개를 기울이며 서로를 마주보았다. 하지만 정답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이라도 키에르트의 마음속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당장 태풍 경보를 내렸을 것이다. 키에르트의 마음은 휘몰아치고 있었다.

16549358865119.png‘사냥하러 왔다가 우연히 마주쳤다고 해도 괜찮으려나? 티 나지 않을까? 초대장은 왜 안 보냈지? 역시 껄끄러운 건가? 괜찮다고 말해줘야 하나? 그냥 모른 척이 나으려나? 내가 지금 가는 게 맞나? 안 봐도 미치겠고, 생각 안 하려 해도 생각이 나면 그냥 보는 쪽이 낫겠지? 그러다 더 터지면 어쩐다?’

이리 쓸리고, 저리 쓸리고. 낙엽처럼 팔랑팔랑 흩날리는 마음처럼 발길도 사냥터로 직진하지 못하고 사방을 맴돌았다. 그러나 아무리 방황해도 결국은 도착하게 되었다. 저 멀리 사냥터를 빙자한 밀림이 보이기 시작했다. 키에르트의 걸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16549358865124.jpg“어? 웬 고기 냄새가 나지 않습니까? 이쪽엔 요리장이 없지 말입니다.”

16549358865124.jpg“그렇습니다. 사냥터뿐입니다만……. ……음?”

친위대가 예민하게 반응했다. 아무리 방치되고 있었다한들 황궁의 사냥터다. 황궁의 모든 것은 황제의 것. 사냥터의 짐승도 황제의 것이다. 허락도 없이 사냥을 하고 잡아먹기까지 하는 것은 황실모독이었다. 거기에 맨손으로 사냥하지는 않았을 테니 황궁 내 불법 무기소지까지. 이건 역모였다.

16549358865124.jpg“감히! 저희가 한 놈도 빠짐없이 잡아들이겠습니다!”

키에르트가 채 말리기도 전, 뼛속까지 충성심인 친위대는 검을 빼들고 사냥터를 향해 달려갔다.

16549358865119.png“아니! 멈춰!”

키에르트가 명령했을 때는 이미 사냥터의 초입이었다.

16549358865124.jpg“꺅! 뭐야!”

16549358865124.jpg“왜, 왜 이러세요!”

16549358865124.jpg“으아아!”

한참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사람들은 칼 든 무리의 등장에 질겁했다. 황궁 한가운데에서 칼을 빼어들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예 무기를 소지하는 것조차 아주 극소수의, 특별한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일이었다. 그런 사람이 아니면 괴한이었다. 사람들은 친위대를 알아보지 못해 괴한이라고 여겼다.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앞으로 리시스가 나섰다.

16549358957091.png“감히! 뭐 하는…… 어?”

리시스는 말로만 듣던 암살자들이 자신에게도 찾아온 것인가 싶었다. 하지만 칼 든 무리를 제대로 본 순간, 키에르트의 친위대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암살자도 아닌 키에르트의 친위대가 왜 자신을 노리고 돌격하는가. 리시스는 어리벙벙해 소리를 지르던 것도 잊고 친위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뒤에서 등장한 키에르트.

16549358957091.png“……폐하?”

자신의 티파티에서 칼 들고 설치는 친위대와 뒤따라 등장한 키에르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리시스는 어이를 상실해 넋이 나갔다. 더 기가 막힌 건, 당장 해명하고 사과해도 모자랄 키에르트가 리시스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몸을 돌려 반대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16549358957091.png“폐하? 폐하!”

리시스는 몇 걸음 따라가다 점점 더 빨라지는 키에르트의 걸음에 결국 소리를 빽 질렀다. 그냥 화를 못 이겨 지른 소리였지만 놀랍게도 먹혀들었다. 키에르트는 덜컥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바로 돌아보지는 않았다.

16549358865119.png“……잠깐.”

그 말에 리시스도 걸음을 멈췄다. 키에르트는 무거운 숨을 반복하며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모습이었다. 화가 났던 리시스는 점차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안 그런 사람이 갑자기 이상한 짓을 하면 그럴 이유가 있어서겠지.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길래 사람이 저렇게 이상해지지? 리시스는 그 원인이 자신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16549358865119.png“다가오지 말고. 거기서 잠깐.”

16549358957091.png“예? 왜요?”

16549358865119.png“기다리라고.”

리시스는 눈썹을 찌푸렸다. 이유를 말하지도 않고 무작정 명령만 하는 건 달갑지 않았다. 심술이 솟았다. 키에르트와 자신은 동맹관계지 일방적으로 명령을 들어야 하는 상하관계가 아니었다. 그 관계를 다시 숙지시켜 줄 필요도 있었다.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말을 무시하고 다가갔다. 그런데 다가간 키에르트의 얼굴이 평소보다 붉었다. 리시스는 다시 한번 걱정되는 마음이 솟아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16549358957091.png“어디 편찮으세요?”

16549358865119.png“!”

키에르트는 다가오지 말라는 말조차 하지 못하고 펄쩍 놀라 몇 걸음 물러섰다. 머릿속에만 남아있던 리시스의 얼굴이 실제로 훅 다가오니 견딜 수가 없었다. 한꺼번에 수만 가지의 망상이 머릿속에 쏟아져 들어오는 기분. 정신이 없는 와중, 키에르트는 자신의 입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모르고 막무가내로 내뱉고 말았다.

16549358865119.png“그대 때문에……!”

16549358957091.png“네? 저 때문에 편찮으시다고요?”

리시스는 황당했다. 무장 괴한들을 앞세워 남의 티파티에 쳐들어오더니, 갑자기 도망가서 한다는 소리가 너 때문에 편찮으시다, 라니. 함께 티파티를 즐기던 시종과 하녀들이 힐끔힐끔 이쪽을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키에르트의 말도 안 되는 시비에 웃어줄 수는 없었다. 어차피 티파티도 망했는데, 아주 화끈하게 더 망해보지!

16549358957091.png“그게 말이 될 씨도 없는 소리세요? 좀 차근차근 말이 되게 얘기를 좀 해 주세요.”

리시스가 대차게 몰아붙이는 말에 키에르트는 머리를 휘저었다. 남들 보기에 지금 자신들은 부부싸움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키에르트는 자신과의 싸움 중이었다. 스스로의 저속함이 믿기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와중에도 리시스의 그 모습이 떠오르고 만단 말인가.

16549358957091.png“왜 찾아와 놓고 다가오지 말래요? 뭐가 저 때문인데요?”

매섭게 몰아붙이는 리시스의 말에 키에르트는 울컥 터지고 말았다.

16549358865119.png“그대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아!”

16549358957091.png“?!”

리시스는 놀람을 표현할 여력도 없이 굳어버렸다. 그리고 그 말을 쏟아버린 키에르트는 굳은 채 활활 탔다. 내가 지금 내 입으로 무슨 말을 한 거지?

16549358865124.jpg“어머어머.”

16549358865124.jpg“꺄아아……”

16549358865124.jpg“엄마야.”

황제 부부의 아웅다웅을 뒤에서 숨죽여 지켜보던 사람들의 입에서 절로 감탄사가 터졌다. 우리 황제 폐하, 아주 화끈하셨다. 소박맞은 황후설을 일축시키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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