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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대망의 티파티 (25/153)

25. 대망의 티파티2021.10.28.

1654935867744.png“음…….”

16549358677445.jpg“아아아……!”

피할 수 없는 위기에 직면했을 때, 사람의 진짜 성격이 드러난다. 리시스는 오히려 느긋해졌다. 인생에 위기가 찾아온 것이 처음도 아니고, 목숨이 위험한 상황도 아니다. ……장기적으로 보면 위험해질 수도 있긴 한데 당장 코앞에 닥친 일은 아니니까 괜찮다. 만회할 기회는 앞으로 얼마든지 생길 것이다. 반면 앨린은 머릿속과 얼굴 양쪽이 다 하얗게 질렸다. 아침 단장을 돕는 손이 부들부들 떨려서 빗으로 머리를 빗는 게 아니라 두피를 찍어댈 정도였다.

16549358677445.jpg“어떡하죠? 어떡하죠? 어떡하죠, 폐하?!”

티파티 당일까지 돌아온 편지는 단 한 통도 없었다. 거절 회신보다 더 안 좋은 상황이라며 앨린은 울어댔다. 이건 사교계에서 한 사람을 괴롭힐 때 쓰는 흔한 방법이랬다. 거절 회신을 하지 않았으니 초대장을 받은 사람 중 누가 올지 모르고, 간다는 회신도 하지 않았으니 안 가도 그만. 티파티 주인이 혼자 울음을 터뜨리면 기다렸다는 듯 와르르 몰려가는 수법이라고. 그렇게 되면 준비한 것이 부족해져서 또 이걸 탓하고 비웃을 수도 있게 되는 거란다. 어린 아가씨가 첫 티파티를 열 때 골탕 먹이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그리고 앨린도 같은 수법으로 똑같이 당했었다.

16549358677445.jpg“합궁 날 그 일만 일어나지 않았어도! 그럼 다섯 사람은 왔을 텐데……!”

이미 자신이 당했던 일을, 자신의 잘못으로 리시스가 겪게 될 수도 있다 생각하니 더욱 견딜 수 없던 모양이다. 앨린은 곧 죽을 것처럼 괴로워했다.

1654935867744.png“괜찮아, 황제 폐하의 총애 때문에 왔어도 그건 진짜 내 사람이 아니잖아?”

16549358677445.jpg“여기 황후 폐하만 보고 진짜 붙을 사람이 어디 있어요! 흐흐헝.”

1654935867744.png“너.”

우는 아이 입에 사탕 물린 듯 앨린의 울음이 뚝 그쳤다.

16549358677445.jpg“어, 어어…….”

맞는 말이긴 한데, 감동적이기도 하고,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웃으실 때가 아닌데 싶기도 하고, 죄송하기도 하고……! 겨우 잠시 멈췄던 눈물이 다시 왈칵 솟았다. 리시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픽 웃었다.

1654935867744.png“한 명이라도 있으면 됐지. 한 명도 쉬운 거 아니야.”

16549358677445.jpg“어, 흐어어, 제가, 진짜 잘할게요……!”

1654935867744.png“그래, 그래. 둘이서라도 재미있게 놀자.”

16549358677445.jpg“진짜 재미있게 놀겠습니다!”

앨린은 어제까지만 해도 괜찮겠냐며 노심초사, 불안초조의 극단을 달렸다. 하지만 더 이상은 불안해한다고 바뀔 것이 없었다.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마음뿐이었다. 그거라도 열심히 바꿔보겠노라고, 앨린은 굳게 결심했다. ***

16549358677445.jpg“……이거, 저희 둘이 괜찮을까요?”

그러나 산더미처럼 쌓인 고기와 세 사람의 요리사가 붙은 숯 더미를 보고는 금세 울상이 되었다. 리시스가 준비한 파격적인 티파티. 그 정체는 비비큐 파티였다. 비비큐 파티도 따로 있고, 이런 건 사냥대회 때에나 주로 하는 행사라고 앨린은 극구 말렸다. 그러나 리시스도 ‘내가 아는 차는 고기 먹을 때나 마신다.’며 거세게 드러누웠다. 그리하여 티파티 장소도 황궁 한구석에 버려져 있던 사냥터가 되었다. 답사를 나와 본 앨린은 ‘이건 노상이잖아요!’라며 기절하려 했지만, 리시스는 되레 좋아했다. ‘현장감 있어. 딱 이거야.’라며. 키에르트는 사냥을 즐기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선대 황제들이 만들어 놓았던 사냥터는 완전히 방치되었고, 그러는 동안 황궁 안의 작은 원시림이 되어버렸다. 아름답게 잘 꾸며진 조경을 자랑하는 것도 티파티의 한 부분이다. 이런 야생을 있는 그대로 내놓을 생각은 발상의 전환일까 발상의 포기일까. 그래도 시원하게 부는 바람과 펼쳐진 풀밭, 배경으로 깔린 짙푸른 숲이 청량했다. 무늬 없는 흰색 테이블보를 덮은 테이블도 잘 어울렸다. 여기에 딸기 뿌왕 레이스는 확실히 아니었다.

1654935867744.png“즐겁게 먹으면 다 들어가.”

리시스는 시원하게 부는 바람을 즐기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흔한 귀부인들의 티파티와 다른 분위기에 맞춰 리시스도 과하지 않게 꾸몄다. 머리카락은 자연스럽게 풀고 간단한 머리핀으로 옆머리만 고정했다. 드레스는 다행히 초라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번쩍번쩍 화려하지도 않았다. 박물관에 이런 것도 있었구나 싶은 소박한 드레스였다. 하지만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시절을 누린 황후의 드레스라 의미가 깊었다. 리시스의 자유로운 분위기와 썩 어울리기도 했다.

16549358677445.jpg“……진짜요?”

그냥 즐겁게 놀자는 말이었는데 앨린이 그리 물어보니 살짝 궁금해졌다. 리시스는 고기의 양을 대충 가늠해 보았다.

1654935867744.png“……잘만 하면…….”

배는 부르겠지만 못 먹을 것도 없을 것 같고……. 워낙 굶주리고 자라서 그런지 리시스는 한 번 먹을 때 꽤 많이 먹는 편이었다. 오늘 준비한 양은 초대장을 보낸 손님 수의 반 정도. 반이나 올까 싶었지만 남는 것이 모자라는 것보단 나을 테니 넉넉하게 준비했다. 어차피 돈은 키에르트 주머니에서 나가기도 했고.

1654935867744.png“남으면 싸가서 내내 먹자. 황후궁 사람들이랑 같이 먹어도 좋고.”

16549358677445.jpg“네에? 황후 폐하께서 드신 음식을 어떻게 시종들이랑 같이…….”

1654935867744.png“같은 입인데 뭐, 다른 게 들어가야 하나?”

리시스는 가볍게 생각했다. 전선에서는 위아래 없이 겸상하는 경우도 많았다. 여기서는 오히려 리시스의 식사에 독이 들었을까 봐 함부로 주지 못할 뿐이지, 리시스 본인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주인이자 손님이 등장하자 요리사들이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숯 위에 걸쳐 놓은 불판에 미리 저며놓은 고기가 올라갔다. 지글지글 익는 고기 냄새가 금방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고민으로 찌푸려져 있던 앨린의 안색도 고기 냄새에 차츰 펴졌다.

16549358677445.jpg“와……, 진짜 냄새는 좋네요.”

고기에 쓴 양념도 리시스가 직접 지시했다. 향신료도 몇 개 쓰지 않았는데 풍기는 냄새부터가 굉장했다. 고기는 무슨 짓을 해도 고기라서 맛있지만 특히 더 맛있는 고기도 있다. 요리사들도 자신들이 만들면서 킁킁거렸다. 리시스는 한쪽에서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흰 장갑을 끼고 라벤더가 양각된 도자기에 손톱만 한 은수저로 찻잎을 담아 우려내는 일반적인 풍경과는 많이 달랐다. 웬 솥단지에 여물 같은 풀더미들을 와르르 쏟아 넣고 사람 키 반만 한 주걱으로 휘휘 저었다. 그중에는 ‘실내에서 함부로 뚜껑을 열었다가는 사망에 이를 수도 있는’ 수상쩍은 찻잎도 포함되었다. 장작불 화력이 꽤 좋아 찻물이 곧 끓어올랐다. 다만 솥단지 안의 내용물이 죽인지 차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았다. 퀴퀴하고 꼬릿한 냄새가 나는데, 또 한참 맡고 있자니 구수하고 향긋한 것 같기도 하고……. 그게 고기 냄새랑 섞였다. 원시림을 등지고 고기를 굽는 요리사들과 정체불명의 액체를 쑤는 황후. 티파티는 점점 더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것이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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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35867744.png“대충 된 것 같은데. 한 입 먹어 봐.”

리시스는 고기를 들여다보더니 적당히 익은 걸 골라 접시에 덜었다. 접시에 얼룩지는 고기 기름도 티파티와는 거리가 멀었다. 아무렴 어떠랴. 보는 사람도 없는데. 눈앞의 고기에 눈이 먼 앨린은 홀랑 받아먹었다. 그리고 눈을 떴다.

16549358677445.jpg“!”

늘 먹는 그런 고기 맛이 아니었다. 이것은 자연과 함께하고, 바람으로 시즈닝 된 그런 맛인가?

1654935867744.png“이것도 마셔 봐.”

여물 푸는 국자 같은 것으로 퍼 주는 차의 외관에 앨린은 겁먹었다. 이름도 모를 풀잎이 둥둥 떠다니는, 녹색과 회색이 제멋대로 섞인 액체를 차라고 부르는 것이 맞을지부터가 문제였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 앨린은 사약을 받아들듯 비장하게 컵을 받아들었다.

16549358677445.jpg“그럼, 이제부터 마시도록 하겠습니다.”

1654935867744.png“……? 그런 말 안 해도 돼.”

16549358677445.jpg“제가 각오가 필요해서 그래요.”

그 순간만큼은 고기를 굽느라 바쁜 요리사들도 불에서 눈을 뗐다. 그들도 태어나 처음 보는 차의 시음이 궁금했다. 물론 보통 사람보다는 음식 문화를 잘 알아 그것이 에드린의 극히 일부 지역의 백성들 사이에 퍼진 차라는 것까진 알았다. 하지만 그걸 먹어 볼 기회는 없었다. 앨린은 크게 한 숨을 들이마셨다가, 일단 고기부터 한 점 먹었다.

1654935867744.png“그렇지, 그거야.”

리시스의 칭찬에 얼른 온 입안에 고기 향이 배게 열심히 씹고, 삼키기 직전에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16549358677445.jpg“어?”

1654935867744.png“맛있지?”

16549358677445.jpg“어라? 네.”

앨린은 진짜로 놀랐다. 예의상이 아니라 정말 맛있었다. 냄새는 금방 사라졌고, 고기와 함께 먹으니 오히려 더 조화롭게도 느껴졌다. 그새 익숙해졌는지 차 냄새만 킁킁 맡아도 구수하고 시원하기만 했다. 용기 내 한 모금 홀짝 마셔 보았다.

16549358677445.jpg“!”

다시 한번 앨린의 눈동자에 느낌표가 떴다. 정말 괜찮았다. 리시스는 거보라는 듯 뿌듯하게 차를 더 따라주었다. 이번에는 앨린도 기꺼이 받아들었다. 더 달라며 보채기까지 하며. 리시스는 후하게 따라주고 자신도 즐겁게 입에 넣었다. 여름 축제에 쓸 인재를 발굴하려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즐겁기라도 하니 반은 건졌다.

1654935867744.png“어차피 더 이상 사람들은 안 오겠지?”

16549358677445.jpg“……그럴 것 같아요.”

입이 즐거워도 자신이 보좌한 첫 파티가 실패로 돌아가게 된 앨린은 다시 축 처졌다.

1654935867744.png“핀잔주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어차피 고기도 많겠다, 다 같이 먹을까 해서.”

16549358677445.jpg“다 같이요?”

1654935867744.png“응, 있는 사람들끼리 즐거우면 좋잖아?”

리시스가 말한 ‘있는 사람들’은 엄숙하게 대기하고 있는 황후궁의 시종, 하녀들과 요리사들이었다. 오늘 일하고 있는 요리사들은 총 다섯. 황후궁의 요리사 둘과 만찬 때만 일하는 요리사 셋을 빌렸다. 다들 황후의 경악할 만큼 열린 제안에 표정이 무너졌다.

16549358677445.jpg“화, 화화, 황후 폐하, 말씀은 감사하오나…….”

1654935867744.png“응, 이건 또 여럿이 같이 먹으면 더 맛있거든.”

리시스는 듣지도 않고 쑥 하녀장에게 먹여버렸다. 하녀장은 기절할 것 같은 안색으로 우물거렸다. 일단 고기가 들어왔으니 씹기는 해야 했다.

16549358677445.jpg“!”

그리고 앨린의 표정이 거쳐 갔던 길을 그대로 따라갔다. 리시스는 다시 한번 씩 웃었다.

1654935867744.png“맛있지?”

16549358677445.jpg“……네…….”

하녀장은 굴복했다. 궁에서 오랜 시간 일해 온 그녀는 콧대가 높았다. 웬만한 귀족들은 무시할 정도로. 그런데 갑자기 모시게 된 황후가 적국의 공주였다. 거기에 황후 후보였던 세니아에 비해 너무 보잘것없어 보이기까지. 내심 불만은 있었다. 내색하지 않고 조용히 일만 해서 드러나지 않았을 뿐.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멍청한 편견이었던가. 아무리 황후궁의 하녀장이어도 이렇게까지 자신을 대해 주는 귀족은 없었다. 그동안 리시스는 한 번도 이상한 요구를 하지도 않고, 까다롭게 굴지도 않았다. 오히려 처음 봤을 땐 잘 부탁한다며 웃어주기까지 했다. 하녀장은 코끝이 시큰해 고기와 함께 눈물을 삼켰다. 그 모습에 리시스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1654935867744.png“울 정도로 맛있어?”

16549358677445.jpg“예!”

그런데 진짜 맛있긴 했다. 투박한 맛인데 한 번 입에 넣으니 또 먹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결국 위아래고 뭐고 인간도 먹고살아야 하는 동물이었다. 하녀장이 무너지자 다른 사람들도 우르르 달려들었다.

16549358677445.jpg“잘 먹겠습니다, 황후 폐하!”

16549358677445.jpg“감사합니다!”

1654935867744.png“응, 맛있게들 먹어. 차도 같이 마시고.”

16549358677445.jpg“예!”

리시스는 더 기분이 좋아져 뽀얗게 웃었다.

1654935867744.png“어?”

그런데 사냥터 저쪽에서 뜻밖의 인물이 등장했다. 키에르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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