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심장이 와르릉 쾅쾅2021.10.24.
심장이 머리의 명령을 무시했다. 함부로 뛰지 말라고. 무섭게 경고했지만 심장은 제멋대로였다. 다섯 살배기 어린애처럼 천진난만하게 뛰었다. 와르릉 쾅쾅. 가슴 속에서 천둥이 치는 기분이었다. 키에르트는 눈을 질끈 감고 가슴을 꾹 눌렀다. 잠은커녕 내일 아침까지 심장이 무사히 버틸지나 모르겠다. 하지만 버텨야 했다. 초야 때와 마찬가지로 합궁은 황제 부부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공식 행사였다. 다른 공식 행사에서 아무리 정답게 얼굴을 마주해도 합궁을 안 하면 끝이다. 키에르트는 일단 침착하게 이불을 끌어와 리시스의 몸 위에 덮었다.
“후…….”
이제야 좀 숨돌릴 만했다. 대체 누구의 생각이었을까. 리시스도 동의를 했으니 저 옷을 얌전히 입은 것이겠지. 그렇다는 건……. 아니, 아니지. 만찬에도 거적때기 같은 드레스를 입고 등장한 사람이다. 그냥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드르렁드르렁 잘만 자고 있지. 급한 불을 덮어 놓았으니 자신도 눈을 붙여야 했다. 밤새 이렇게 옆에서 뜬눈으로 지켜볼 수만은 없으니. 키에르트는 최대한 침대가 흔들리지 않게 몸을 뉘였다. 리시스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으으음…….”
그러나 키에르트가 노력해 보았자 리시스의 잠버릇이 얌전해지지는 않았다. 키에르트는 초야 다음 날 아침, 두 사람이 엉겨서 자고 있던 자세의 비밀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리시스는 굉장했다. 침대의 모든 공간을 활용할 줄 알았다. 우로 굴러 좌로 굴러,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을 모두 했다. 그 과정에서 이불은 뻥뻥 걷어차였다. 키에르트가 아무리 이를 악물고 덮어주어도 소용없었다. 고지 하나를 두고 악착같이 싸웠던 전투 같았다. 그러면서도 리시스의 굉장한 복장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아…….”
키에르트는 지쳤다. 리시스가 걷어찬 이불이 침대 밑으로 굴러떨어지는 것을 망연자실 바라볼 정도로. 더 이상은 못 하겠다. 키에르트는 그냥 자리에 누워 눈을 감아버렸다.
“으응……, 츄어…….”
이불 다 차버려 놓고 춥다고? 키에르트는 코웃음을 치며 못 들은 척 완고하게 감은 눈에 힘을 주었다. 감기 좀 걸려도 안 죽는다. 리시스는 작아도 탄탄한 몸을 가졌으니 괜찮을 것이다. 탄탄한……. ……이런 젠장. 눈을 감아도 떠올라 버렸다. 키에르트는 억지로라도 잠을 청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그때 리시스의 팔다리가 척하니 휘감겨왔다.
“!”
제멋대로 날뛰던 심장이 이제는 멋대로 자리까지 이탈했다. 심장이 발치까지 뚝 떨어졌다. 키에르트는 이번에는 누운 석상이 되었다. 거기에 한 술 더 떠, 리시스의 곤히 잠든 숨소리가 귓가에서 나부꼈다. 온몸에 치덕거리는 보드라운 몸, 따끈한 체온, 혹혹 불어오는 숨소리.
“…….”
그는 아주 신체 건강한 남성이었다. 감정과 별개로 물리적으로 자극을 받으면 신체가 반응해 버렸다. 키에르트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추어어…….”
리시스는 잠깐 밀쳐졌다가도 다시 온기를 찾아 꾸물꾸물 다가왔다. 이걸 밤새 반복할 수는 없었다. 반복할 자신이 없었다. 그전에 이성이 끊어질 것 같았다. 원하지 않으면 손끝 하나 대지 않겠다는 약속을 잊어버릴 정도로. 키에르트는 침실에서 뛰쳐나왔다. 황후와의 관계를 외부에 보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리시스와의 신뢰가 더 중요했다.
“폐하, 무슨 일이십니까!”
“황후 폐하께 무슨 일이라도……!”
황후의 방에 불이라도 났나 싶을 정도로 다급하게 뛰어나오는 키에르트를 보고 문밖에서 대기하던 제롬과 호위들이 황급히 놀라 따라붙었다. 오늘도 훈훈한 밤을 보내시겠지 흐뭇하게 대기하던 차였다.
“오늘은 이만 돌아간다.”
키에르트는 구구절절 말하지 않고 쌩하니 황후궁을 벗어났다. 제롬은 침실 문과 키에르트를 번갈아 보다가 후다닥 키에르트의 뒤를 따랐다. 지나는 길에 마주친 황후궁 시종들에게 잊지 않고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오늘 밤 일로 소문이 퍼져나갈 건 불 보듯 뻔했다.
“폐하, 마차를…….”
“걷겠다.”
키에르트는 황후궁을 벗어나서도 한참을 성난 걸음으로 질주했다. 덕분에 호위들은 아닌 밤중에 체력훈련이었다. 제롬은 더했다. 안 그래도 슬슬 무릎이 안 좋아지는 나이로 접어들었는데, 폐하는 무지막지하셨다. 하지만 함부로 말을 걸 수도 없는 흉흉한 분위기라 찍소리 못 하고 따라 걸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저러시는 걸까, 시종장의 두뇌는 민첩하게 굴러갔다. 오늘 회의 때까지만 해도 빨리 끝내라는 무언의 압박으로 사람들의 입을 꿰매 놓으시더니, 막상 들어가서는 다시 뛰쳐나와 버렸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늦게 왔다고 바가지라고 긁히셨나? 하지만 황후의 방 안은 조용했다. 그리고 싸워서 튀어나왔다기엔 시간이 꽤 지났다. 점점 더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제롬의 머릿속이 이유를 찾아 끓고 있을 때, 키에르트의 몸속은 빠지지 않는 젊은 남성의 열기로 끓고 있었다.
“헉, 헉…….”
온몸에서 땀을 뚝뚝 흘렸다. 그래도 다 빠져나가지 못한 열기가 몸 안에서 절절 끓었다. 미칠 노릇이었다. 키에르트는 결국 황제궁까지 뛰었다. 그러고도 밤을 샜다. 어린 소년처럼 혈기왕성한 밤이었다. ***
“죽여주시옵소서!”
리시스는 앨린의 통곡으로 기상했다. 요 며칠 티파티 준비로 잠까지 줄이며 과로를 한 덕분에 한 번 눈을 붙이면 세상모르고 잤다.
“왜……, 역모라도 했어……?”
앨린이 죄를 지어봤자 더한 잘못일 수는 없다. 끽해야 드레스에 문제가 생겼다 정도일 테니 오늘도 또 별것 아닌 일로 호들갑일 것이다.
“그, 그 정도의 엄청난 일이 저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어헝…….”
“어엉?”
리시스는 그제야 제대로 눈을 뜨고 앨린을 돌아보았다. 그제야 리시스는 앨린의 눈물 콧물이 평소와 조금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평소에 리시스의 복장 때문에 울 때는 스스로의 능력 부족과 설득하지 못한 속상함이 섞여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진짜로 목 잘리기 직전의 죄수 같았다.
“무슨 일?”
“황후 폐하께서 합궁 날 소박맞는 일이!”
리시스는 멋쩍게 뒷머리를 긁었다.
“바쁘면 뭐 어쩔 수 없지…….”
“아니요! 오셨다가 바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 황제 폐하가 오셨었어?”
전혀 기억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초대장을 쓰다 깜빡 졸았던 게 마지막 기억인데, 눈을 뜬 지금은 침대였다. 키에르트가 왔다 간 것이 맞긴 한가 보다.
“제, 제가 골라드린 잠자리 옷 때문에……! 분명 그게 황제 폐하의 심기에 거슬려서! 엉헝헝! 분노에 가득 차서 밤길을 한참이나 걷다가 들어가셨다 합니다!”
“아아…….”
“아아가 아니지 않습니까! 합궁 날 그냥 돌아가 버리시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음…….”
앨린이 뭘 생각해도 절대 키에르트가 리시스의 복장이 마음에 안 들어 돌아갔을 리는 없다. 갑자기 어쩔 수 없는 일이 생겼겠지. 혹시 만약에 진짜로 복장 때문이라면 당황해서 그랬을 법은 했다. 앨린이 입힌 옷은 놀라서 도망갈 수준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대외적 이미지를 중요하게 챙기던 건 키에르트다. 합궁이야말로 무슨 일이 있어도 챙겨야 하는 중요 이벤트. 분명히 급한 용무가 있었을 것이다. 두 사람의 계약이 있으니 리시스는 느긋했다. 그걸 모르는 앨린만 속이 탔다.
“이렇게 이불까지 꽁꽁 싸놓고 가신 걸 보면 정말 꼴 보기 싫으셨었나 봐요! 흐흐흑.”
어쩐지 자는데 답답하더라니. 이것도 키에르트의 작품일 것이다. 리시스는 돌돌 말린 이불을 해체하며 다시 드러난 흉흉한 복장을 내려다보았다. 스스로의 눈에도 끔찍한데, 키에르트가 봐도 식겁했겠지. 혹시 남이 볼까 봐 가려주고 가기까지 하고. 사실 흉흉하지만 야했다. 어떻게 한번 해 볼 생각이 들 수도 있었을 복장. 리시스가 유혹하는 걸로 착각할 수도 있었다. 그래도 키에르트는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매너 좋네.’
약속도 잘 지키고. 키에르트의 점수가 조금 상승했다. 리시스가 전혀 여자로서 취향이 아니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그건 알 바 아니다. 두 사람의 관계에 필요한 부분은 아니었다.
‘합궁 도중에 나갈 일이 뭐였으려나.’
모쪼록 큰일이 아니기를. 리시스는 자신 못지않은 키에르트의 과로에 심심한 위로를 보내며 앨린을 진정시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
“괜…….”
아니, 아니지. 이건 기회였다. 또다시 이런 허튼 옷을 입히지 못하게 막을 수 있는 기회.
“황제 폐하 취향은 신관복처럼 꽁꽁 싸매는 거였나 봐.”
“역시 그랬을까요! 으헝헝!”
“응, 앞으로는 꼭 그렇게 준비해 줘.”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어떡하죠? 영영 황후궁을 안 찾으시면…….”
앨린의 걱정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리시스는 여유 넘치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는 없어.”
“왜요……?”
“폐하는 날 좋아하시거든.”
적어도 로구안을 영영 물리칠 때까지는. 아직 로구안이 침략을 포기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키에르트와의 계약은 유지되고 있었다.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둘은 친해 보일 것이다. 리시스의 자신만만한 발언에 앨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리 황후 폐하께서 놀라울 정도로 귀여우셔도 그 자신감은…….”
“귀여우면 이미 끝난 거랬어.”
“그건 그래요……. ……그래도. 그치만.”
앨린이 믿든 말든 상관은 없지만 불안 초조해 하는 사람을 옆에 두면 불편하다.
“그럼 티파티에 황제 폐하도 초대하면 되지 않을까?”
키에르트도 리시스의 티파티에 흥미를 보였었다. 남자는 티파티에 초대받으면 안 된다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황제 폐하가 직접 티파티에 모습을 드러내면 오늘의 일은 싹 가라앉을 것이다.
“어……, 그건 좀……, 생각을 해 보셔야 할 것 같아요.”
“왜?”
그런데 당장 좋다고 나설 줄 알았던 앨린이 서먹하게 물러섰다.
“황제 폐하께서 티파티에 등장하시면 물론 감사할 일이긴 한데……, 그럼 두 분만의 티파티가 되어버릴 수도 있잖아요.”
리시스가 티파티를 여는 목적은 여름 축제를 도울 편을 만들기 위해서다. 키에르트가 등장한다면 성황리에 치러지겠지만 대신 리시스의 편에 붙을 사람들을 섭외하기도 힘들어질 것이다.
“음……, 일단 황제 폐하께 초대장 보내는 건 미뤄두자. 같은 황궁 안에 사니 정 급하면 당일 보낼 수도 있고.”
“예. 그러세요.”
“그럼 남은 초대장은 이만큼인가.”
리시스는 다시 테이블 앞에 앉아 쌓여 있는 빈 초대장과 목록을 헤아리며 한숨지었다. 부디 이렇게 생고생하는 보람이 있기를 바랐다. *** 그러나 며칠 뒤, 리시스는 들려온 소문에 처음으로 티파티에 대한 걱정을 하게 되었다. 이미 준비는 상당 부분 진행되었다. 무를 수도 없고 돈도 많이 썼다. 이제 와서 안 합니다, 하고 덮어버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으, 음…….”
리시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거, 진짜로 망할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