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그도 남자였다2021.10.21.
리시스는 고지식한 사람은 아니었다.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빨랐다. 패션에 한해서는 느린 면도 있지만 최대한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앨린의 표현을 빌리자면 평소의 ‘하녀도 안 입을’, ‘거적때기 같은’, ‘옷 같지도 않은’ 옷들은 그 느림의 한계였다. 무관심 쪽이기도 했다. 그래도 주는 옷은 곧잘 받아입었다. 쓸데없는 고집을 피우지도 않고, 괴상한 패션 철학으로 코디를 망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최소한 옷이라는 건 면적이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선과 점으로만 이루어진 잠자리 옷에 리시스는 겨우 정신을 부여잡았다. 이것은 속옷이라 지칭하기에도 민망한 ‘쪼가리’였다. ‘쪼가리’. 천 쪼가리, 실 쪼가리. 티파티 초대장을 언제 다 쓰나 고민하며 멍하니 있던 죄였다. 어쩐지 앨린이 신이 났더라니. 입혀주는 대로 입고 보니 이 꼴이 되어 있었다. 부끄러워서 온몸이 다 빨개질 지경이었다. 어디까지 빨개졌는지 알아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입었지만 다 보여주는 이것을 옷이라 지칭할 수 있는가. 리시스의 근원적인 질문에 앨린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걸쳤으면 옷이죠.”
“이걸 걸쳤다고 할 수 있어? 붙인 거지?!”
“아무튼, 이번엔 이걸 입으셔야 해요! 초야에 입으셨던 건 거의 사제복이던데요! 폐하께서 무덤까지 함께 가자며 선물을 보내셨는데 어떻게 그런 성의 없는 나이트 드레스를 입으실 수 있어요?”
한 달 새에 변한 건 키에르트와 리시스의 관계뿐만이 아니었다. 앨린의 담력도 변했다. 처음엔 그래도 황후 폐하라며 쩔쩔 매더니, 이제는 아닌 건 아니라고 단호하게 소리도 쳤다. 특히 옷에 관해서. 옷에 특별히 관심도 없고 안목도 없는 리시스는 지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건……!
“이 정도도 안 입으시면 너랑 자기 싫다고 등 돌려 자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사실 그게 맞는데……! 차마 사실대로 얘기하지는 못하고. 리시스는 혼자 끙끙 앓으며 입을 다물어야 했다. 결국 옷이 되다 만 선과 점의 임의적 형태를 걸친 채 리시스는 침실에 앉혀졌다.
“아, 이게 뭐야!”
침실의 거울로 다시 봐도 미쳤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말세였다. 리시스는 불안한 걸음으로 방 안을 서성서성거렸다. 키에르트가 올 때까지 시간은 아직 남아 있었다. 침대에 들어가서 꽁꽁 싸매고 있을까? 잠든 척해 버릴까? 그러나 그 모든 고민을 끝낼 때까지도 키에르트는 찾아오지 않았다. 긴장이 극에 달했다가 어느 한순간 탁 풀렸다. 뇌가 생각을 놓아버린 것이다. 고민한다고 황제 폐하가 안 오는 것도 아니고. 옷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키에르트는 리시스가 원하지 않으면 손끝 하나 대지 않기로 약속했다. 꼴이 이래도 자신이 한 약속을 어길 사람은 아니었다. 이제 최소한 그 정도의 신뢰는 생겼다.
“할 일이나 하자.”
키에르트가 와도 밤새 장기나 칠 예정이었다. 긴장하며 어떡하지 고민하느니 시간을 쪼개 할 일이나 하는 쪽이 스스로를 위해서도 나았다. 그래도 영 보기가 숭하니 시트를 끌어다 몸에 두르고 테이블에 앉았다. 아직도 써야 할 초대장이 산더미였다. 초대장에 매달리기 시작한 리시스는 곧 키에르트도 잊어버리고 완전히 집중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피곤이 몰려와 잠깐 엎드렸다가 잠이 들어버렸다.
*** 똑똑. 노크를 했으나 안에서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키에르트는 제롬을 돌아보았다. 제롬도 황후의 침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알 수는 없었다. 분명히 황후궁의 시녀에게서 준비를 마치고 침실에 드셨다는 이야기를 전달받았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무슨 수로 알겠는가.
“혹시 잠드신 것 아닐까요……?”
회의가 너무 길어졌다. 이미 자정을 넘기고 있는 시각. 피곤함이 극에 달했지만 일정을 취소할 수는 없었다. 황제의 빡빡한 일정은 조정하기가 아주 어려웠다. 일정이 한 번 엉키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밀릴 수도 있었다. 안 그래도 리시스와의 갑작스러운 만남과 약속들로 엉킨 일정이 몇 있었다. 오늘 회의도 도저히 미룰 수 없게 된 세 번의 일정을 한 번에 처리하다 보니 이리 되었다. 키에르트는 문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히 문을 열게 지시했다. 시종들이 숨을 멈추고 문을 열었다. 키에르트는 발소리를 죽여 문 안으로 들어섰다. 침실 안은 초야 때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일렁이는 촛불과 하늘거리는 천, 아롱지는 향기. 리시스가 촛대를 들고 파랗게 노려보는 대신 테이블 위에 엎드려 잠들어 있다는 점만 달랐다. 혹시 암살자가 들어서 봉변을 당한 것은 아닌가, 오늘이야말로 죽이려고 날을 잡았나, 짧은 순간 스쳤던 많은 생각들이 잠잠히 가라앉았다. 키에르트는 테이블로 다가가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래도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는지 리시스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황후.”
한 번 불러 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신 도로롱, 하고 작은 코울음이 돌아왔다. 어떻게 코 고는 소리마저도 본인답게 앙증맞나. 키에르트는 빵 터질 뻔한 웃음을 겨우 삼키고 정색했다. 뭘 하다 이렇게 곤히 잠이 들었나 궁금해서 테이블 위를 보니 초대장이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쥐고 있는 종이에는 글씨를 쓰다가 잠들었는지 지이익 긴 선이 가로질렀다. 준비하는 게 티파티가 아니라 연회였나? 키에르트는 초대장의 무시무시한 양에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황후가 하는 일이다. 참견할 수 없었다. 거기다 이렇게나 열심히 일해주는데 뭐라 하겠나. 돈만 빼먹고 놀고먹는 황후로 자리 잡아도 어쩔 수 없었다. 사실 그것도 각오는 했다. 어차피 실무를 맡길 수는 없기에 목숨만 붙여놓는 계획안도 있었다. 열의를 가지고 동분서주하는 리시스 덕분에 완전히 폐기되었지만.
“으응……. 흥…….”
한참 기다렸더니 리시스가 몸을 뒤척이며 잠꼬대를 했다. 깨어나려나 지켜봤는데, 움찔움찔거리다 고개를 휙 다른 방향으로 돌리고 다시 도로롱 소리를 울렸다. 테이블에 엎드려 자니 얼굴이 눌려서 입술이 뽁 튀어나왔다. 병아리 주둥이 같은 것이 색은 또 빨개서 톡 터질 것 같다. 잠꼬대를 웅냥거리는 것이 꼭 체리 두 개가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모양이다. 예쁜데 신기하고 귀여워서 키에르트는 홀린 듯 쳐다보았다. 그냥 자는 얼굴을 쳐다보기만 하는데 시간이 훌쩍 갔다. 그 어떤 놀이보다 재미있었다.
“으으응…….”
그런데 시간이 너무 지났나 보다. 리시스가 인상을 쓰며 다시 목을 반대방향으로 돌리려 했다. 그러나 잠든 새 굳어버린 목은 뻣뻣했다. 리시스는 엎드린 채 꿈지럭거리며 끙끙 앓았다.
“황후? 침대 가서 자.”
“웅으응…….”
말을 거니 대답을 하긴 하는데 눈은 안 뜬다. 이제는 일어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저러고 자다 목 부러지는 것 아닌가 걱정이 됐다.
“황후?”
“으흐응…….”
“황후. 침대 가서 자라니까?”
“히으응…….”
깊이 잠든 리시스는 꽤나 막강했다. 웬만한 소리에는 깰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키에르트는 문득 그답지 않게 장난을 떠올렸다.
“황후.”
“잉…….”
“리시스.”
“힝…….”
“……하하.”
이름 한 번 불러봤을 뿐인데 이렇게 재미있다니. 키에르트는 혼자 소리죽여 웃었다. 물론 그러는 동안에도 리시스는 깨지 않았다. 덕분에 실컷 즐거웠으니 이제 그만 푹 재워야겠다. 키에르트는 살그머니 다가가 리시스의 어깨를 톡 건드렸다.
“황후?”
“…….”
이젠 대답도 안 한다. 조금 더 세게 건드렸더니 인상을 팍 쓰며 어깨를 흔들어 팔을 떨쳐낸다. 인상 쓰는 것도 귀엽긴 했다. 옹알대는 것보다 인간미도 느껴졌다. 키에르트는 푸근한 마음으로 다시 깨웠다. 이번에는 조금 더 길게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황후……. 침대 가서 자라고.”
리시스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드디어 눈을 뜨나 했는데…….
“아이, 씨…….”
욕이 터졌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 것 같았다. 발음이 그렇게 찰질 수가 없었다.
“…….”
키에르트는 어깨를 잡은 채로 돌기둥이 되었다. 우리 황후가……, 뜻밖의 면모를 많이 가지고 있었구나…….
“아이, 씨……, 내가 잘 때는 건드리지 말랬지……, 아, 진짜…….”
리시스는 잡혀 있는 어깨조차 참을 수 없이 짜증이 났는지 누군가를 향한 협박성 말을 잔뜩 쏟아냈다. 심지어 발음조차 분명했다. 저렇게 내내 옹알거리고 자다가 갑자기 성대와 혀에 힘을 줘서 말할 정도면 진심이란 소리다. 깨워서 침대에 재우는 건 포기해야 할 모양이다. 키에르트는 팔짱을 끼고 리시스를 내려다보았다. 그냥 두고 자신만 침대에 가서 눕기도 그렇고……. 또 깨울 용기는 나지 않고. 리시스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다시 신음하기 시작했다.
“으으으…….”
여기저기 결리고 뻐근한 것도 깨우는 것만큼이나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하룻밤 정도 불편하게 잔다고 죽는 건 아니지만 혼자 침대에서 편히 자는 것은 마음에 걸렸다. 키에르트는 결단을 내렸다. 깨우는 대신 그냥 옮겨주자. 어차피 한 톨만 한 리시스를 드는 데는 힘도 들지 않는다.
“옮겨 줄게.”
혹시 몰라 예고도 남겼다. 리시스는 그새 깊은 잠에 빠졌는지 대답이 없었다.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겨드랑이와 무릎 뒤에 팔을 넣어 안아들었다. 너무 가벼워서 한 손으로도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품에 안긴 리시스는 건드려 깨울 때와는 달리 얌전했다. 키에르트는 소리를 죽여 조심조심 걸었다. 그러나 질질 끌리던 침대 시트가 다리에 감겨버렸다.
“엇.”
키에르트가 황급히 중심을 잡으려 비틀거렸다. 그러나 치렁치렁한 천은 움직일수록 더욱 치덕치덕 다리에 감겨들었다. 중심을 잃은 키에르트의 몸이 기어이 기우뚱했다. 그나마 다행히 두 사람의 몸은 침대 위로 쓰러졌다. 푹신한 침대에 두 사람의 몸이 겹쳐 풀썩 무너져내렸다.
“응……?”
그 결에 리시스가 살짝 깼다. 고개를 흔들며 몸을 뒤척였다. 키에르트는 화들짝 놀라 겹쳐진 몸을 떼어냈다. 두 팔로 몸을 지탱해 상체를 들어 올리자마자 굉장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옷을 입은 건지 붙인 건지 구분할 수 없는 복장이었다. 야하다라는 걸 느낄 새도 없이 충격적이었다.
“추어엉…….”
리시스는 꼼지락거리며 침대 위에서 몸을 말았다. 그 바람에 몸에 간신히 걸쳐져 있던 시트가 흘러내렸다. 조금이나마 가리고 있던 최후의 방어선이 무너졌다. 육성으로 헉 소리가 나왔다. 리시스는 다시 순진무구한 얼굴이 되어 웅냥웅냥거렸지만 더 이상 그것은 귀엽기만 한 웅얼거림일 수 없었다. 심장이 파랗게 얼었다 빨갛게 날뛰며 요동을 쳤다. 건드리지 말라며? 그런데 이 복장은 뭐란 말인가. 떠보는 건가? 놀리는 건가? 아니면 맘 바뀌었으니 건드리라고 유혹하는 건가?
“……하…….”
키에르트는 깊은 탄식을 흘렸다. 그도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