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합궁 전날의 선물2021.10.17.
“어이구, 좋으시겠어요. 나리. 연인께 이런 선물도 받으시고요.”
옆에서 상인이 기분 좋으라고 부추겼다. 키에르트는 못 들은 척 헛기침을 했지만 리시스는 기분 좋게 흐흐흐, 웃었다.
“사실 부부야.”
“어이쿠, 그러셨습니까. 두 분 사이가 연인처럼 좋아 보이시는 게, 백년해로하시겠습니다.”
“백 년이나? 어머나, 세상에.”
리시스는 웃으며 가게를 벗어났다. 그러나 그 후로도 웃음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상인이 연인으로 오해한 것이 그렇게 기분이 좋았나? 하지만 부부라고 정정한 후에도 웃음이 사라지지 않은 걸 보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
“왜 그렇게 기분이 좋아?”
“저희가 은근히 합이 좋은 모양이에요. 처음 보는 사람이 봐도 연인 같으면, 누가 봐도 저희 사이, 좋아 보이겠죠?”
왜 그렇게 기분이 좋은가 했더니. 작전 성공을 기뻐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합동 작전. ‘최소한 남들 앞에서는 사이좋은 부부로 보이기’는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키에르트도 기분 좋게 웃었다. 적으로 만났을 때는 징글징글했지만 아군이 되니 함께 웃는 날도 왔다. ***
“이게 바로 그 비장의 한 수인가요?”
앨린은 수상쩍어 보이는 병을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단단히 밀봉된 병은 겉으로 보아서는 아무 단서도 얻을 수 없었다.
“응. 중독되지 않을 수 없을걸. 다들 이 매력에 빠지게 될 거야.”
“오오……, 궁금해요. 열어봐도 돼요?”
“아니, 절대 안 돼. 실내에서 열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어.”
리시스는 비장하게 앨린을 저지했다. 앨린은 덜컥 겁을 집어먹고 병을 얌전히 내려놓았다.
“그, 그렇게 위험한 걸 티파티에 내놓아도 될까요?”
“그래도 이게 또 한 번 맛을 들리면 벗어날 수 없다니까.”
“그러니까……, 죽든가 노예가 되든가 둘 중 하나네요.”
뭐 이런 극단적인 티파티가 다 있나. 혹시 리시스가 티파티 핑계를 대고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하려는 것인가 싶기까지 했다. 하지만 리시스는 그저 이 좋은 것을 세상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더 알리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순수함은 때론 악보다 지독했다.
“그럼 차도 준비되었고……, 슬슬 초대장을 작성하셔야겠네요.”
“벌써?”
“이게 은근 노동이에요.”
앨린은 책 한 권을 꺼냈다. 귀족 명부였다. 가문, 거주지역, 출생 연월, 결혼 여부 등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쉬란의 모든 귀족들을 적은 명단이니 양이 상당했다.
“이 중에서 수도에 거주하고, 가문도 좀 명성 있고, 나이도 적당하고, 그런 사람들만 꼽다 보면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리시스는 이름을 하나하나 새기며 책장을 넘겼다. 눈에 익은 이름도 있었다. 세니아의 경우는 맨 앞장에 떡하니 적혀 있어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명단은 권력 순이었다. 뒤로 갈수록 한미한 가문의, 멀리 사는 사람들이었다. 결국 앞장에서 골라야 한다는 말인데……, 그것도 아주 적은 수는 아니었다. 만찬에 참석했던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 분명 그중에서도 거르고 걸러야 했다.
“이건 임의로 표시해 놓은 건데요, 이쪽에 빨간색으로 표시된 이름들은 세니아 파라고 보시면 돼요. 몇 개의 파가 있긴 한데 이게 사실 고민이거든요.”
“왜?”
“같은 파 사람들만 초대하면 사실상 그 파에 들어가겠다는 항복 선언이 되고, 다른 파랑 섞어서 부르면 싸움 나거든요.”
“아이고오…….”
리시스는 머리를 싸쥐고 엎드렸다. 편먹고 싸우는 건 군대뿐만이 아니었다. 인간인 이상 어디에나 파벌은 생겼다. 병영에서도 이 장군 뒤에 서냐, 저 장군 뒤에 서냐로 신경전이 벌어지고는 했다. 그것이 사교계라고 없을 리 없는데. 아니, 오히려 칼 들고 싸우지 않으니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치열할 것이다. 리시스는 안일했던 자신을 반성했다.
“역사상 다른 황후 폐하들은 어떻게 했었어?”
“황후 폐하들께서 파의 수장…… 이셨죠…….”
“……아.”
역사에서 답을 찾으려던 시도도 실패. 세니아를 생각해 보면 그게 당연한 것이었다. 리시스가 너무 특별한 경우였다. 명단에 답이 적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보다 보면 뭐라도 떠오를까 싶어 리시스는 열심히 이름을 읽었다. 앨린의 이름도 발견했다.
“앨린은 아무 표시가 없네? 이건 중립이란 소린가? 황후파?”
앨린은 서글픈 눈을 했다.
“쩌리요…….”
“……쩌리?”
“네, 아무 파벌에서도 초대장을 못 받아서 들어가지도 못했거든요.”
“아…….”
리시스는 숙연하게 입을 다물었다. 앨린도 험난한 세상, 제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었구나. 명단을 더 뒤져보니 앨린처럼 표시가 없는 사람이 꽤 많았다.
“좋아, 그럼. 표시가 없는 사람들은 일단 다.”
“……예에? 사교계에서 힘도 못 쓰는 사람들만 불러다 모아서 뭐 하시게요?”
“혹시 모르잖아. 앨린처럼 힘을 숨기고 있을지.”
“아……, 뭐……, 그럴 수 있기는 한데…….”
본인 칭찬 앞에 주춤했지만 그래도 앨린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 황후의 티파티를 유력인사 한 명 오지 않는, 변방의 티파티로 만들 수는 없다. 안 그래도 리시스가 하겠다는 파격적인 티파티 계획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이걸 어떻게든 살리려면 참가자 명단이라도 화려해야 했다.
“일단 세니아 양은 본인이 초대해 달라고 한 것도 있으니 무조건 넣으셔야 할 테고요.”
“음음.”
“세니아 양을 부르시면 다른 파의 입김 센 사람들도 안 부를 수는 없을 거예요.”
“이렇게 하다 보면 결국 다 부르게 되는 거 아냐?”
얘 불렀으니 쟤도 불러야 하고. 쟤 불렀으니 걔도 불러야 하고. 이런 식으로 가다 보면 끝이 없다.
“그냥 다 부를까?”
리시스는 발상의 전환을 꾀했다. 말하고 보니 괜찮은 것도 같았다. 나는 다른 사람과 달리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할 것이다. 선입견도 없으니 나한테 잘 보이려고 달려오는 사람한테 선착순 혜택 준다. 이런 느낌으로.
“오…….”
미친 생각 같은데 또 생각해 보니 괜찮은 것도 같았다. 앨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일단 동조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 초대장은 어떻게 다 쓰시려고요?”
“……어?”
“티파티 초대장……요. 티파티는 원래 완전히 개인적인 모임이라 자필로 쓰셔야 하거든요.”
조금 더 공적인 파티나 만찬의 경우는 시종들이 전담한다. 하지만 티파티는 설령 황후여도 본인의 손으로 초대장을 썼다. 그래서 보통은 손이 아파서라도 열 명 이상 부르지 않았다. 리시스는 명단을 천천히 다시 짚어 보았다. 손가락이 부러질 가능성이 농후했다. 하지만 티파티가 망해서 자존심이 부러지는 것보다는 나았다.
“쓰겠어!”
“와…….”
앨린은 순수하게 감탄하며 박수를 쳤다. 황후가 되려면 저 정도 독기는 있어야 되는 모양이다. ***
“황후 폐하. 황제 폐하께서 보내신 선물이 도착했습니다.”
“선물?”
청첩장 쓰기에 돌입한 지 오래되지 않았을 때였다. 식사 때 이외엔 볼 일 없는 시종이 웬일로 소식을 물고 찾아왔다. 키에르트에게 받을 건 저번에 박물관 이전 사건으로 웬만큼 다 받았다. 금전적 지원도 서류상으로 오가는 것이라 따로 보낼 필요가 없다. 받을 것이 없는데 보냈다 하니 의아했다.
“뭐지? 가져와 봐.”
“그게……, 그게 직접 가서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
얼마나 거창한 선물이기에 가서 보라는 건가. 리시스는 일단 펜을 내려놓고 중앙 로비로 나갔다.
“억?”
중앙 로비 한가운데에 산이 생겼다. 포장된 물건들로 쌓아 놓은 선물의 산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광경에 리시스는 눈앞이 아찔했다. 반면 뒤따라온 앨린은 환호했다.
“내일 합궁 날이잖아요! 어머 어머, 합궁 전이라고 황제 폐하께서 선물을 보내셨나 봐요!”
“아……?”
그러고 보니 쉬란에 온 지 벌써 한 달이다. 죽이고 도망갈까 고민까지 했던 초야에서 한 달이 흘렀다. 세상에서 딱 한 명만 죽일 수 있다면 고르고 싶던 키에르트와 이제는 같이 시장을 돌아다니고, 선물까지 주고받게 되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 모든 것이 급변하고 있었다. 에드린은 어떨까. 자신이 떠나온 이후로 많이 변했을까.
“폐하, 얼른 풀어보세요!”
쌓인 선물을 보며 감상에 잠기던 리시스는 앨린의 재촉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건 둘이서 주고받기로 사전에 약속도 되어 있지 않은 선물이었다. 즉 키에르트의 진짜 순수한 선물이었다. 정말 웬일일까. 자신에게 뭔가를 바라고 이러는 건 아니겠지. 선물은 크고 작은 상자에 포장되어 있었다. 작은 것은 손바닥만 했지만 큰 것은 리시스 몸통만큼 커다랬다. 리시스는 기대감 어린 사람들의 눈빛을 받으며 가장 앞쪽에 놓인 상자의 포장을 풀었다.
“어……!”
“엥?”
“엉?”
리시스의 눈에는 익숙한 물건이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몹시도 생소했으며, 황당한, 이질적인 물건이었다. 호미였다.
“호, 호미? 호미를 왜 보내셨을까요?”
앨린은 당황하며 이유를 찾으려 들었다. 황제가 황후에게 선물할 품목으로는 절대 상상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리시스는 픽 웃었다. 뇌물 같은 것일 줄 알고 슬쩍 긴장했는데, 그런 걱정은 덜어도 되겠다. 리시스는 호미를 내려놓고, 다른 상자의 포장을 풀었다. 이번 물건도 눈에 익은 것이었다. 삽이었다. 심지어 삽은 한 자루도 아니었다. 색깔별로 일곱 개나 보냈다.
“아하학!”
리시스는 삽을 붙잡고 속절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허리를 꺾으며 웃는 리시스를 앨린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폐하……, 좋은 의미일 거예요……. 무덤 파고 들어갈 때까지 당신만을 사랑해, 뭐 이런 의미일 수도 있잖아요.”
필사적인 해석이었다. 그러나 그 뒤에 차례로 나온 지게, 솥, 구둣주걱 같은 것들에 대해서는 해석을 붙이지 못했다. 리시스만 선물에 담긴 키에르트의 관심과 존중을 읽고 해맑게 웃을 수 있었다. 시장에서 눈도장만 찍고 내려놓았던 물건들이었다. 개중에는 들어보지도 않고 시선만 주고 슥 지나갔던 것도 있었다. 그걸 다 어떻게 기억하고 사 오라고 지시했는지, 신기했다.
“응, 폐하의 애정과 관심의 선물 맞아.”
신뢰의 표현이기도 했다. 키에르트가 선물해 준 것이니 만일의 어느 날, 에드린으로 리시스가 돌아가게 되어도 이것들은 가지고 갈 수 있다. 전선에 풀리는 물자가 될 수 있음에도 선물을 해 주었다는 것. 그 자체가 키에르트의 과감한 호의였다.
“저는 이런 건 배운 적이 없어서 그러는데요……. 삽이랑 지게가 어떻게 애정과 관심의 표현이 돼요?”
“내가 이걸 좋아해.”
리시스는 간단히 답해주며 씩 웃었다. 발보다 빠른 궁내의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황후 폐하께서는 삽 애호가셔서 삽을 모으는 취미가 있으시다고. 삽 자체보다 삽질을 좋아하시는 건 아니냐, 밤마다 사람 하나씩 파묻겠다는 선전포고가 아니냐는 기타 의견도 분분히 오갔다. ***
“황후 폐하, 슬슬 합궁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어어, 어.”
책상에 코를 박고 초대장을 쓰던 리시스는 목과 허리를 뿌득거리며 일어났다. 일어나서 잘 때까지 초대장만 쓰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났다. 아무리 바빠도 합궁을 건너뛸 수는 없었다. 리시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합궁은 특별한 날이니만큼 준비도 특별했다. 하지만 리시스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어차피 키에르트와는 아무 일도 없을 예정이었다. 괜히 힘 뺄 필요 없었다. 그래서 완전히 손을 놓고 다 맡겨버렸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꺄악!”
리시스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기절할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