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손2021.10.14.
“어헉!”
후각을 마비시키는 강한 공격이었다. 키에르트는 신음하며 코를 틀어막았다. 멀리 숨어 있던 호위 중 하나도 비틀거렸다. 보일 듯 말듯 먼 곳까지 뚫고 나가는 파격적인 냄새였다.
“아이고, 그러게 마음이나 감각의 각오 둘 중 하나는 하시라니까.”
리시스는 얼른 뚜껑을 닫았다. 병을 내려다보는 눈빛이 아주 만족스러워 보였다.
“그, 그건 차가 아닌 것 같은데…….”
“예? 차예요. 발효차. 그래서 냄새는 좀 그래요. 익숙해지면 아무렇지도 않지만.”
“차라고? 설마 그걸 티파티에서 내놓을 생각이야?”
“이게 또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가 없거든요.”
리시스는 심지어 병을 쓰다듬기까지 했다. 만족을 넘어 자부심마저 보였다. 키에르트가 이제껏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상식이 완전히 해체되었다가 재조립되었다. 저런 것도 차라고 할 수 있다면 퇴비도 음식이다. 인류를 몰살시킬 최후의 물질 같은 걸 티파티에서 내놓겠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폐하도 궁금하시면 티파티에 와서 드셔 보세요. 초대해 드릴게요.”
“…….”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 원하던 물건을 산 리시스는 룰루랄라 신나는 발걸음으로 시장을 누볐다. 시장은 생각보다 거대했다. 비슷비슷한 가게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시장의 끝과 끝이 보이지도 않았다. 점점 갈수록 방향 감각을 잃었다. 그 와중에 사방에서 호객행위가 연이었다.
“구경하세요! 여기요, 여기!”
“멋진 신사분, 숙녀분! 여기 아주 좋은 물건들 있습니다!”
처음에 갔던 찻잎 거리는 아주 한적한 곳이었다. 시장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가게는 점차 작아져 다닥다닥 붙은 노점으로까지 이어졌다. 오가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밀려드는 인파에 통로가 꽉 막혔다. 겨우 비집고 지나가야 할 것 같이 좁았다.
“꺅!”
키에르트는 황급히 리시스를 등 뒤로 숨겼다. 부딪치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리시스를 보호할 수 있었다.
“괜찮나?”
“아, 네에. 감사해요. 너무 빨리 달려와서…….”
리시스도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을 보기는 했지만 그 사람이 리시스를 못 본 것이 문제였다. 오가는 사람들의 절반은 소매상들이었다. 한마디로 바빴다. 한가한 걸음의 관광객을 배려해 줄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키에르트는 한숨을 내쉬며 길의 앞뒤를 돌아보았다. 너무 붐비는 길이라 호위들도 겨우겨우 따라붙고 있었다. 차라리 왔던 길로 돌아갈까도 생각했지만 이미 온 거리가 더 길었다. 재빠르게 돌파해버리는 쪽이 나았다. 키에르트는 리시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손.”
“네?”
“이러다 흩어지기라도 하면 정말 큰일이니까 잡고 가지.”
“아아, 네.”
그러나 리시스는 선뜻 손을 잡지는 못했다. 필요에 의해 잠깐 잡았다 놓는 것이 아니라 손을 잡고 쭉 걷는 건 처음이었다. 남자 손을 잡고 길을 걷다니. 처음 해보는 일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키에르트가 손을 흔들며 재촉했다.
“얼른.”
그러는 동안에도 양옆으로 사람들이 분주히 오갔다. 미적거리는 두 사람을 향한 짜증어린 시선도 날아왔다. 리시스는 멈칫멈칫 손을 내밀었다. 마중 나온 키에르트의 손이 리시스의 손을 확 끌어당겼다. 손끝이 닿고, 손바닥이 붙었다. 키에르트의 긴 손가락이 리시스의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었다. 리시스가 흠칫 놀라자 긴 손가락이 손등을 지그시 눌렀다. 손바닥이 물샐 틈 없이 딱 붙었다.
“꼬물대지 마.”
“제, 제가 언제…….”
“방금. 간지러워.”
“네에…….”
그 이상은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대화를 나눌 여유도 없었다.
사람들이 물살처럼 두 사람을 스쳐 지나갔다. 앞서가는 키에르트의 등이 유난히 넓어 보였다. 그의 등 뒤에 숨어 걸으니 세상 다른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한때는 저 등에 칼을 꽂기 위해 그렇게나 아등바등했는데. 세상일은 역시 아무도 몰랐다. 인파를 헤치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었다. 아무리 키에르트의 몸이 다부져도 떼로 몰려오는 사람들을 다 상대할 수는 없었다.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다 보니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를 곳까지 와 버렸다. 겨우 숨을 돌리며 주변을 돌아보니 웬 농기구 파는 곳까지 와 있었다. 다른 곳들보다는 한산했지만 구경할 필요가 없는 곳이었다.
“여기도 빨리 지나가야겠…… 응?”
그런데 리시스가 홀린 듯 상인들의 말에 빠져들고 있었다.
“지게가 아주 튼튼합니다! 지게!”
“50년 뒤를 바라보고 지팡이 미리 쟁여두시는 건 어떠세요!”
“스치기만 해도 도랑이 파지는 호미입니다!”
지게, 지팡이, 호미 판다는 소리를 왜 들어주고 있는가. 혹시 마음이 약해 뿌리치지 못하는 건가 싶어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앞을 막으려 했다.
“쓸데없는 말 들어 줄 필요 없어.”
“어, 아뇨, 잠깐만요. 정말 튼튼한가, 이 지게? 벽돌 몇 장까지 나를 수 있지?”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보호를 거절하고 본격적으로 관심을 표현했다. 상인은 얼씨구나 신이 나서 달라붙었다.
“어이쿠, 어서 오십시오. 벽돌쯤이야 수십 장도 올라가지요! 백 장도 올릴 겁니다!”
“그 정도까진 안 되어 보이는데? 벽돌 삼십 장이면 보통 지게가 감당을 못하지.”
“아닛, 귀족 아가씨께서 지게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시는지…….”
“한 번 져 봐도 되나?”
“무, 물론입니다!”
리시스는 손수 지게를 짊어져 보기까지 했다. 키에르트는 자신이 보고 있으면서도 뭘 보고 있는 것인지 혼란스러워졌다. 지게 지는 공주라니. 이게 무슨 일인가. 상인도 비슷하게 현실감 없는 눈을 하고 있었다.
“음, 가볍고 어깨에 부담도 덜 주네. 탄탄하기도 하고.”
“알아보시는군요! 이거, 정말 좋은 물건입니다!”
“그러게, 좋아 보이네.”
그러나 리시스는 지게를 만지작거리다 내려놓았다. 사지는 않고 다음 가게로 이동해서 또 한참 만지작거리다 내려놓고.
“이 삽으로 말할 것 같으면! 삽자루가 수백 년 먹은 고령수라서 절대 부러지지 않습니다. 여기 보십시오. 이음새마저도 명인 대장장이가 나사 한 개, 한 개 정성으로 해 붙였습니다. 그 어떤 삽질도 견뎌낼 수 있는 튼튼함!”
삽 앞에 선 리시스의 눈빛이 이전보다 더욱 예리하게 빛났다.
“한번 잡아봐도 되나?”
“물론입니다! 자, 여기. 그런데, 드실 수는 있겠습니까?”
리시스는 상인의 염려에 코웃음을 치며 삽자루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익숙하게 삽질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상인도, 키에르트도 입을 쩍 벌렸다. 삽질을 안 해 본 사람이 보아도 완벽한, 교본 같은 자세였다. 안정적으로 삽질 시범을 보인 리시스는 애정 가는 눈으로 삽을 들여다보았다.
“……좋네. 탐난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냥 내려놓았다. 키에르트는 리시스가 삽질을 잘한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 삽을 탐내는 것도 놀라웠다.
“농기구 모으는 취미가 있었나?”
“아, 아뇨……. 그냥 필요해서요. 아니, 필요했었어서요.”
지금이 아니라 과거형이다. 키에르트는 그게 언제를 말하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전쟁터였다. 리시스가 공주 대우를 받지 못했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직접 지게를 지고 삽질까지 하며 산 건 의외였다. 만약에. 진짜로 만약에 리시스가 황후 자리에서 내려와 다시 에드린의 공주로서 전장에 가게 된다면. 그때 이 물건들을 가지고 가는 것은 국고 반출이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어도 적군에게 물자를 주는 것이 된다. 하지만 이깟 것. 그런 생각이 더 컸다.
“필요한 거면 사. 쓰고 싶은 곳에 쓰라고 준 돈이야.”
이 정도 소소한 반출은 눈감아줄 수 있었다. 그러나 키에르트의 친절에도 리시스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지금은 필요도 없어요.”
“사고 싶으면 사는 거지, 꼭 필요해야 사나?”
“낭비예요.”
“낭비 해.”
“아이, 진짜.”
리시스는 도망치듯 자리를 떠 버렸다. 가게에 있는 모든 삽을 다 사도 푼돈이다. 그걸 왜 아끼나 모르겠다. 키에르트는 불만스럽게 리시스의 뒤를 따랐다.
“아까 준 돈은 오늘 다 못 쓰면 다시 가져갈 거야.”
“……치사해요. 한 번 준 걸.”
“그러니까 다 쓰라고.”
내심 비자금을 챙기려던 생각이 없지는 않았는지 리시스는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었다. 그렇게 애교 잔뜩 섞인 표정을 해도 소용없다. 황제의 발언은 지엄하다. 진짜로 남은 돈은 다시 가져갈 생각이었다. 리시스는 돈 쓸 곳을 찾아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시장을 누볐다. 다음으로 이어진 곳은 장식과 관련된 물품들이었다. 가게들은 굉장히 세분화되어 있었다. 방금 지나친 농기구를 파는 구역이 지게, 호미, 삽을 파는 곳이 달랐던 것과 마찬가지로 장식 가게들도 제각기 파는 물건이 달랐다. 단추, 머리장식, 레이스, 테이블장식 등등을 파는 가게들이 붙어 있었다. 단추만 해도 속옷용 납작한 단추, 코트용 큰 단추, 망토용 조각 단추 등을 다 따로 팔았다.
“이쪽도 보고 가십시오! 꽃 모양 머리핀은 저희 집이죠!”
“별 모양 머리핀을 보시려면 저희 집으로!”
이곳에서도 여지없이 호객행위는 이어졌다. 평소 꾸미는 것에 큰 관심이 없던 리시스도 눈앞에서 반짝거리는 것을 보니 눈이 갔다. 하지만 삽을 고를 때보다는 열정이 덜했다. 그러다 한 가게 앞에서 리시스의 걸음이 문득 멈추었다. 커프스단추를 파는 곳이었다. 리시스는 유심히 구경하다가 하나를 골라들었다. 키에르트는 별생각 없이 리시스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드디어 뭔가를 살 생각이 들었나, 그뿐이었다. 그런데 리시스가 고른 커프스단추를 키에르트에게 불쑥 내밀었다.
“선물이에요.”
“?”
키에르트는 너무 뜻밖의 선물이라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다. 손을 내밀어 받아야 한다는 생각까지도 못 했다.
“……거절하실 거예요?”
“아니 잠깐. 본인이 사고 싶은 걸 사야지, 이건.”
“제가 사서 선물해 드리고 싶은데요. 사고 싶은 것 맞아요.”
“반칙이야.”
리시스는 키에르트가 더 막기 전에 냉큼 가격을 묻고 값을 치러버렸다. 그리고 멋대로 키에르트의 소매에 달려 있던 커프스단추를 빼고 자신이 산 것을 끼워 넣었다. 원래 하고 있던 것이 더 고급이긴 했지만 어쩐지 리시스가 달아준 것이 더 반짝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키에르트는 자신의 소매를 한참 내려다보다가 볼멘소리를 했다.
“왜 하필 내 선물이야.”
“사실 생각은 계속했어요. 이것저것 많이 받기만 하고 드리지는 못했던 것 같아서.”
리시스는 헤헤 웃으며 어깨를 추어올렸다. 키에르트는 인상을 찌푸렸다. ……뭘 해줬다고? 세상에 하나뿐인 보석을 사다 준 것도 아니요, 땅을 준 것도 아니다. 리시스가 부른 티파티 비용이 세기는 했지만 키에르트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도 아니고, 그건 자기 배 불리려고 쓰는 돈도 아니었다. 갑자기 소매가 무겁게 느껴졌다. 한참 거슬러 줘야 할 것을 받아버렸다. 이런 선물까지 줘 버리면 지금까지 해 준 것보다 더, 더더, 더더더 잘해줘야 할 것 같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