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내 편2021.10.10.
‘세니아가 왜 여기 있지?’
시장과 가장 안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물론 이 찻잎 거리는 고급스러웠지만 세니아가 직접 찻잎을 사러 시장에 올 사람 같지는 않았다.
“두 분 폐하께 인사 올립니…….”
“인사는 생략하지.”
키에르트는 다가온 세니아가 황궁식으로 절을 올리려 하자 만류했다. 세니아도 시장 한복판에서 진심으로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지 생긋 웃으며 살짝 굽혔던 무릎을 폈다.
“저야말로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까지. 두 분을 함께 시장에서 뵐 줄은 몰랐습니다.”
“그대야말로. 용건이 있으면 알현을 요청하지 그랬나.”
키에르트는 무뚝뚝하게 답했다. 꼭 세니아가 두 사람이 이곳에 올 것을 알고 일부러 마주친 것처럼. 오늘 외출은 황제와 황후의 최측근 몇몇만 아는 비밀이었다. 세니아가 정보를 가지고 일부러 접근한 것이었다면 정말 무서운 일이었다. 리시스는 만만치 않은 전력에 긴장했다.
“폐하께는 용건이 없는걸요. 저도 일 때문에 이곳을 찾은 것이랍니다.”
“일?”
“아, 모르셨나요? 여긴 저희 집안이 소유한 찻잎 상단이에요.”
세니아는 자신의 뒤에 버티고 선 거대한 상단 건물을 가리켰다. 시장의 다른 작고 아기자기한 가게들과 달리 세니아가 가리킨 건물은 저택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쉴 새 없이 사람들과 짐이 들락거리는 것이 보였다.
“실제적으로 찻잎 상단은 제가 관리하고 있지요. 그러니 안 와 볼 수가 있나요.”
리시스는 놀랐다. 평생 황후 후보로 살아왔다는 말에 세니아도 당연히 자신처럼 ‘아가씨’로 자랐을 줄 알았다. 결혼을 하기 위한 인생. 그것을 위한 모든 준비. 여름 축제를 담당하는 건 그 과정의 일부 정도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뿐만이 아니라 진짜 본격적으로 사업을 맡고 있다니. 세니아는 정말 잘난 사람이었다. 놀라움과 부러움이 동시에 찾아왔다.
“아, 기왕 이렇게 만나 뵙게 되었으니 한 번 들어가 보시겠어요?”
세니아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 박수를 짝 쳤다. 리시스는 키에르트를 돌아보았다. 어차피 찻잎을 사러 왔으니 세니아를 만나지 않았어도 들어가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키에르트는 세니아를 피하고 싶을 수도 있었다. 허락이 필요했다. 키에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광입니다.”
세니아는 키에르트의 허락에 활짝 웃으며 가게 안으로 먼저 들어섰다. 가게 안에는 점원들이 일제히 늘어서서 세니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세니아 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귀하신 분들이 오셨어. 내가 직접 모실 거니 다들 물러나 있어.”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점원들은 세니아의 명령 한 마디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가게의 규모는 상당했다. 화려한 외장만큼이나 내부도 화려하고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곳곳에서 향긋한 찻잎 냄새가 흘렀다. 세니아는 두 사람을 깊숙한 안쪽 방으로 안내했다. 일반 손님들이 오지 않는 구역인 것 같았다. 그곳마저도 복도 구석구석 반닥반닥 닦여 거울처럼 모습이 비춰 보였다.
‘어?’
리시스는 복도의 흑요석 기둥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무심결에 보고 지나가다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얼비친 모습은 스스로도 낯설었다. 곁의 키에르트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세니아는 어떻게 지나가는 길에 바로 두 사람을 알아보았을까? ‘용건이 있으면 알현 신청을 하라’던 키에르트의 말이 떠올랐다. 세니아는 ‘우연’이라는 변명은 하지 않았다. 다시 한번 소름이 돋았다. 세니아의 손은 황궁의 어디까지 뻗쳐 있는 것일까. 황후는 리시스였지만 황궁의 두 번째 실권자는 아직 세니아라는 사실이 여실히 느껴졌다.
“이 방에 손님을 모시는 건 처음입니다. 제가 아끼는 방인데, 이렇게 두 분을 모시게 되어 다시 한번 영광이에요.”
리시스는 방을 둘러보며 익숙한 느낌에 보이지 않는 한숨을 내쉬었다. 황후궁과 똑같았다. 배치나 크기는 달랐지만 벽지나 커튼의 색, 가구의 모양, 그릇 무늬 등등. 전체적인 분위기를 보면 황후궁의 한 부분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세니아 양은 취향이 한결같은가 봐.”
“제가 좀 꾸준한 편입니다.”
세니아는 농담 받듯 웃으며 대답했다. 웃기지는 않았지만 리시스도 답하듯 입술을 억지로 끌어올렸다.
“두 분께 먼저 저희 상단에서 유통되는 찻잎을 설명드리겠습니다.”
방의 한쪽 면 전체가 찻잎 통을 진열해 놓은 장식장이었다. 세니아는 그것 중에 몇 가지를 골라 와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다. 그리고 그릇을 진열한 곳에서 다구도 챙겼다. 모든 것을 직접 챙기는 것이 익숙해 보였다. 움직임 하나하나가 물속을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우아했다. 거침없으면서도 느릿하고, 하지만 정확하다. 저런 움직임마저도 교육받은 것일까. 리시스는 넋 놓고 세니아를 바라보았다.
“이쪽은 북쪽, 가장 높은 산지에서 재배된 찻잎입니다. 이쪽으로 갈수록 남쪽이고요. 가장 북쪽은 에드린, 가장 남쪽의 것은 로구안에서 왔습니다. 여기까지는 쉬란 내에서 생산된 것들, 여기부터 여기까지는 외국에서 들여온 것들입니다. 각각 맛과 향이 다르니 하나씩 즐겨 보시지요.”
세니아는 찻잎 하나하나에 대한 지식도 풍부했다. 설명을 들으며 맛을 보니 또 새로운 맛이 느껴지기도 했다. 실무를 보는 사람의 느낌이 물씬 났다. 전쟁 중인 나라의 찻잎까지 구비해 놓았다. 뿐만 아니라 정식으로 국교를 맺지 않은 나라의 찻잎도 있었다. 저력이 느껴졌다. 국경을 넘나드는 인맥, 유통망, 그 모든 것을 관리할 수 있는 재력까지. 그 힘을 황실에 보탠다면 더할 나위 없이 강력한 황권이 완성될 터였다. 그야말로 준비된 황후였다. 리시스는 세니아가 내어 준 차를 한 모금 홀짝였다. 썼다.
“쉬란의 모든 귀족들은 다 세니아 양의 손님이겠네.”
“부끄럽습니다만, 거의 그렇다 할 수 있지요. 아주 극소수의 특별한 취향을 가진 분을 제외하고서는요.”
귀족들의 인맥과 사교는 티파티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그 티파티에서 사용되는 찻잎을 세니아가 모두 거머쥐고 있다. 어느 귀족이든 세니아에게서 찻잎을 사야 한다. 그 말은 즉 좋은 찻잎을 사려면 세니아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말이 된다. 결국 티파티는 세니아의 손바닥 위에서 벌어지는 판이었다. 리시스가 어떤 티파티를 열든 세니아보다 못하다는 평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었다. 남의 집 정원에서 벌이는 싸움이지만 땅굴을 파서라도 상대할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황후 폐하께서도 저의 고객이 되어 주신다면 그 이상의 영광이 없겠습니다.”
그때 세니아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한마디로 리시스에게 내 밑으로 들어오라는 소리였다. 그럼 이번 티파티만큼은 잘 넘어가게 해 주시겠다고? 아님 앞으로도 내내 뒤는 봐주겠다고? 당장은 편하겠지만 당연히 거절이었다. 그렇게 기생하는 삶의 고통을 지긋지긋하게 아는데 홀랑 넘어갈 리가 있겠냔 말이다. 리시스는 픽 웃었다.
“내가 그 몇 안 되는 특이한 취향의 사람일 수도 있네.”
“취향은 언제든 바뀔 수 있으니까요. 언제든 찾아 주십시오.”
세니아는 끝내 웃으며 응대했다. 리시스도 마주 웃었다.
“그러지. 언제든.”
“네에, 언제든.”
“하하하.”
“호호호.”
그렇게 웃는 얼굴로 세니아의 가게를 나섰지만, 몇 걸음 가지 않아 리시스의 얼굴은 단단히 굳었다.
“……티파티. 성공하고야 말겠어요.”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갑작스러운 표정변화에 흠칫 놀랐다. 리시스가 저런 표정을 지을 때는 죽기 아니면 살기로 덤빌 때였다. 지금은 자신에게 덤비지 않으니 안심해도 되지만 섬뜩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응원하지.”
“많은 금전적 응원, 잘 부탁드려요.”
“……물론.”
키에르트는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았다. 삥뜯기는 기분을. 결과적으로 키에르트에게 손해는 없었다. 리시스와 세니아가 신경전을 벌이는 이 상황은 오히려 득이었다. 에드린 출신의 리시스가 황후로서 모든 권력을 장악해 버리는 것도 문제, 세니아가 황후를 완전히 무시할 수 있는 권력을 쥐는 것도 문제였다. 둘이 아웅다웅하면 적어도 한쪽으로 권력이 몰려 황권을 위협할 일은 없게 된다.
“폐하는 제 편 맞으시죠?”
몇 걸음 걸어가던 리시스는 갑자기 뭐가 생각났는지 홱 돌아보며 물었다. 키에르트는 벙쪘다. 편……이라니.
“부부는 한 편이잖아요!”
기어이 확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듯, 리시스는 발까지 구르며 대답을 강요했다.
“……굳이 따지자면 그대 편에 조금 더 가깝지.”
“음…….”
리시스의 눈이 매섭게 내려앉았다. 키에르트는 항복했다. 따지고 보면 리시스와의 전투에서 이긴 적도 별로 없었다. 이러나저러나 리시스에게는 지는 인생인 모양이다.
“그대 편.”
키에르트는 웃으며 패배했다. *** 세니아가 자신만만했던 이유가 있었다. 차에 조예가 깊지 않은 리시스가 보아도 세니아에게 대접받았던 찻잎 같은 건 시장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리시스가 노리는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리시스는 최대한 허름하고 인적이 드문 가게를 찾아다녔다. 세니아의 찻잎을 누를 수 있을 만큼 고급스러운 차를 낼 것이 아니면, 아예 다른 극에 있는 맛을 노리는 것이 나았다. 그 맛은 리시스만이 알았다.
“뭐 찾으시는 거 있슈?”
리시스가 고르고 고른 가게는 골목 깊숙이 처박혀 있었다. 잔뜩 먼지 쓴 물건들이 길에까지 쌓여 있고, 주인은 가게 앞에 노숙자마냥 앉아 물었다. 안색이 영 퀭한 것이 대낮부터 취해 장사를 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키에르트가 경계하며 리시스의 앞을 막아서려 했다. 그러나 리시스가 나섰다.
“찻잎을 좀 사려는데.”
“거, 보아하니 귀한 댁 아가씨 같은데, 이런 데서 찾으실 건 없을 거요.”
“아냐, 여기에만 있어. 나는 그냥 찻잎이 아니라 ‘그걸’ 찾아 왔거든.”
그제야 가게 주인이 부스스 고개를 들어 리시스를 올려다보았다. 잔뜩 충혈된 눈에도 리시스는 꿈쩍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보았다.
“‘그거’요.”
리시스의 주문에 가게 주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거’가 뭔데? 키에르트도 리시스를 돌아보았다.
“……진짜 ‘그걸’ 찾아 왔슈? 아가씨 ‘그게’ 뭔지는 아오?”
“아니까 찾지. 처음엔 지독하지만 맛을 알게 되면 빠져나올 수 없는, 아주 ‘쑝가는’ 것.”
주인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제법이신데. 그럼 아주 제대로 센 걸 드릴까?”
“최대한 센 걸로.”
“잠시 기다리슈.”
주인은 비틀비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우당탕퉁탕 무언가가 뒤집히고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다시 나온 주인의 한 손에는 단단히 밀봉된 병이 들려 있었다.
“아주 귀한 거요. 나도 아껴두고 있던 건데.”
“확인해도 되나?”
“저어기 가서 하고 오슈.”
주인은 인적이 드문 길 한 귀퉁이를 가리켰다. 리시스는 병을 들고 최대한 깊숙이 들어갔다.
“어……, 옆에 있으시게요?”
병마개를 잡은 리시스가 키에르트를 염려스럽게 돌아보았다. 기껏해야 찻잎을 확인하는 것 아닌가. 왜 이렇게 수상쩍게들 구는 것인지 키에르트는 이해하지 못했다.
“마음의 준비나 감각의 준비, 둘 중 하나는 하세요.”
신신당부를 한 리시스는 병마개를 열었다.
“!”
키에르트는 갑작스러운 공격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