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같이 먹는 맛2021.10.07.
“괜찮으세요?”
“그대는?”
“저는 땅 밟으니 괜찮아졌어요. 폐하는 안색이 안 좋으신데…….”
“나도 곧 괜찮아질 거야.”
리시스의 손이 풀렸으니까. 복합적인 이유로 두 사람은 멀미를 했다. 리시스는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잔뜩 긴장한 채 계속 흔들리다 보니 멀미를 했고, 키에르트는 복합적인 이유였다. 물론 말 때문은 아니었다. 다 리시스 때문이었다. 리시스의 팔이 허리에 꼬옥 감기자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거기에 달리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감은 팔 힘이 강해졌다. 저 조그만 몸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강했다. 혹시 허리를 졸라 부러트려 죽이려는 시도인가 싶을 정도였다. 다행히 키에르트의 허리는 리시스의 팔힘보다는 강했다. 염려처럼 부러지지는 않았다. 대신 호흡곤란이 왔다. 그래서 어지럼증이 더 심해졌다. 처음 겪어 본 강력한 멀미였다.
“어으……. 뭐 좀 마셔야 할 것 같아요. 어, 저기 음료수 판다!”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팔을 잡아끌었다. 시장 초입에는 잡다한 음식들을 파는 좌판들로 가득했다.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은지, 에드린의 시장과 초입의 먹거리는 똑같았다. 하지만 리시스가 보았던 작은 장의 좌판들과는 크기와 체계가 판이하게 달랐다. 음료를 파는 좌판들이 한쪽으로 끝없이 늘어섰고, 다른 쪽으로는 온갖 꼬치와 분식들이 이어졌다. 어느 쪽이든 끝이 보이지 않는 건 같았다.
“목마를 땐 사탕수수 주스죠! 한 잔 쭉 들이켜세요!”
“얼린 파인애플 갈아 드립니다! 진짜 시원해요!”
“수박 주스도 있어요!”
리시스가 관심을 보이자 좌판들이 일제히 벌떼처럼 호객을 시작했다. 다 맛있어 보였다. 특히나 대부분의 주스 재료가 다 과일이라 리시스의 눈을 사로잡았다. 에드린에서 유통되는 과일과는 품종이 다른 것들이었다. 지나갈 때마다 진하게 달큰한 향기가 확 풍겼다. 먹어보지 않아도 엄청나게 달 거란 예상이 갔다. 리시스가 키에르트를 돌아보았다.
‘한 잔만.’
키에르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암살 위험 때문에 식사도 바꿔먹는데, 노상에서 파는 음료라니. 가능할 턱도 없었다.
“저 목마른데…….”
에드린에 없는 과일주스를 먹고 싶은 마음에 목이 더 말랐다. 황궁의 식사 때에도 과일이나 주스가 나오기는 하지만 눈앞에서 직접 짜 주는 걸 보는 맛이라는 게 또 있었다. 시장에서 먹거리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건 리시스의 버릇이기도 했다. 전선은 워낙 먹을 것이 귀했다. 왕실에서 리시스의 식량을 따로 챙겨 준 것이 아니니 전선이 궁핍해지면 리시스도 굶어야 했다. 그래서 장이 서면 꼭 그냥 지나가지 못하고 뭐라도 하나를 입에 물고 싶어졌다.
“하나 드시지요. 아침마다 나무에서 딴 과일이라 아주 신선합니다. 즉석에서 갈아 드리니 위생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눈치 빠른 상인이 얼른 끼어들었다. 리시스가 거 보라는 듯 키에르트를 올려다보았다. 또, 또, 또 치사한 수법 쓰지.
“이 많은 과일에 다 뭘 넣을 수는 없을 거잖아요.”
그렇긴 했다. 과일은 독을 타기 어려운 음식이었다. 기껏해야 표면에 묻히는 정도. 눈앞에서 박박 씻어 바로 주스를 짜내면 독살의 위험은 확실히 낮아진다. 키에르트가 바로 안 돼, 라고 하지 않자 상인은 벌써 착즙기의 손잡이부터 잡았다.
“우선 과일부터 골라 보시지요, 아가씨.”
“어, 으음, 으으음…….”
리시스는 고심 끝에 향긋한 향이 나는 주황색 과일을 골랐다. 노란색과 붉은색이 섞인, 주먹만 한 과일이었다.
“맛있는 걸 잘 고르셨습니다! 이걸로 해 드릴까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리시스의 반짝반짝한 눈빛에 키에르트는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원칙은 원칙이나 쓸모없는 원칙은 가끔 무시할 수도 있는 거다. 키에르트의 역사상 거의 없는 일이 또 일어났다.
“이거, 이거, 이거! 이거랑 이걸 섞어도 되나?”
“어유, 물론이지요. 드실 줄 아시는군요!”
리시스는 신이 나서 이것저것 골라댔다. 키에르트는 상인이 깨끗이 세척을 하는지, 중간에 뭘 넣지는 않는지 매의 눈으로 노려보았다. 상인이 허튼짓을 하지는 않았다. 알록달록한 과즙 주스가 곧 리시스의 손에 쥐어졌다.
“으음~!”
리시스는 한 입 삼키기가 무섭게 시원한 감탄성을 쏟아냈다. 처음 먹어보는 새콤달콤한 맛이었다. 입안에 단맛과 향기로움이 싹 퍼졌다. 거기에 얼음까지 섞여 시원했다. 멀미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거북하던 속이 편해지니 눈이 다 트였다. 이 좋은 맛을 혼자 맛보긴 아까웠다.
“드셔보실래요?”
“괜찮아.”
“제가 먹었던 거잖아요. 자.”
리시스는 웃으며 키에르트의 입술 앞에 빨대를 내밀었다. 자신이 마시던 것이니 빨대에 독이 묻었을 리도 없다. 키에르트는 빨대를 내려다보며 갈등하다가, 결국 한 입 쭉 들이켰다. 그만큼 갈증이 심했다. 땅에 내려서서 멀미도 슬슬 가라앉았는데 왜 시간이 갈수록 더 눈앞이 어질어질한지 모를 일이었다.
“맛있죠.”
한입이 컸다. 컵의 절반이 비어버렸다. 거부하던 것과 달리 시원하게 마시는 키에르트를 향해 리시스가 방긋 웃었다. 과연, 리시스의 권유만큼 다디달았다. 절로 기분이 상쾌해졌다.
“하나 더 먹을까요?”
키에르트는 에라 모르겠다, 하고 이번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한 번 먹어버렸다. 두 번은 어렵지 않았다. 선은 살금살금 밟아 넘는 것이 아니라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키에르트로서는 평생에 없던 사고를 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사고의 결과는 입안을 맴도는 달콤함이었다. 이것이 독이라면 과연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겠구나 인정할 만큼. 눈치 빠른 상인은 동작도 빨랐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잔이 더 나왔다.
“하나 더라고 했는데…….”
“어이쿠, 이런. 제가 실수를 했네요. 한 잔씩 더 드신다는 줄 알고 그만. 어떻게, 한 잔만 드릴까요?”
뻔한 상술이었다. 기왕 만들어 놓은 거 버리게 할래? 하는 나쁜 상술. 하지만 한 잔을 둘이 나눠 먹는 것보단 각자 한 잔씩 들고 돌아다니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리시스는 속아주기로 했다.
“제가 한 잔 그냥 다 먹을게요. 폐하도 한 잔 다 드시면 좋죠?”
이걸 사기죄, 협박죄로 넣어, 말아 고민하던 키에르트의 맥이 탁 풀렸다. 리시스의 해맑음에 슬그머니 올라오던 화가 자취를 감췄다.
“……그러지.”
“하지만.”
그러나 그때 갑자기 리시스가 눈에 힘을 주며 상인을 돌아보았다. 웃으며 좋게좋게 넘어가 주는 건 넘어가 주는 거고. 따질 건 분명히 따져야지.
“버릴 뻔한 거 사 줬으니 좀 깎아 주셔야죠?”
“아이쿠……, 귀족분인 것 같은데 아주 야무지십니다. 에이. 좋습니다. 원래 세 개 해서 백오십 라일인데 깎아서 백사십 라일.”
“백이십.”
“백삼십.”
리시스는 들고 있던 주스잔을 계산대 위에 탕 내려놓았다. 상인이 이것 봐라, 하며 노려보았다. 리시스도 지지 않았다.
“좋습니다. 백이십오.”
“백이십.”
“아유, 정말 못 이기겠네. 알겠습니다. 백이십 주십시오.”
결국 리시스의 승리였다. 상인은 웃음을 터뜨리며 두 손을 들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키에르트는 박수를 치고 싶은 심정으로 감탄했다. 전쟁과 장기만 이기는 것이 아니라 흥정도 이기는구나, 이 여자는…….
“거슬러 줄 수 있나?”
“물론이지요.”
황궁 금고에는 잔돈이 없어서 큰돈뿐이었다. 상인은 능숙하게 거스름돈을 세어 잔돈을 계산대 위에 올렸다. 어지간히 큰돈이었는지 반짝반짝한 동전들과 알록달록한 지폐들이 잔뜩 쌓였다. 리시스는 돈을 보고 입을 헤 벌렸다.
“그대가 들고 다녀.”
키에르트는 잔돈을 챙기더니 지갑째로 리시스에게 넘겼다.
“어, 그래도 돼요?”
“돈, 좋아하는 것처럼 보여서.”
“아……, 사실 저 돈 처음 봐요.”
“……응?”
리시스에게 돈이란 숫자였다. 에드린 성에 있을 때는 주는 대로 먹고 입었으니 돈이 뭔지도 몰랐다. 전선에서야 비로소 ‘예산’, ‘군비’라는 것을 알게 되며 돈의 존재를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개념으로만 스쳐 지나갔다. 장에 갔을 때에도 리시스가 필요한 것을 가져가면 나중에 군으로 청구서가 날아오는 식이었다. 그 청구서는 장군들이 처리해 주었다.
“돈을 다루는 사람은 늘 따로 있으니까. 제가 직접 돈을 만져 볼 일이 없었어요.”
“하긴, 그렇겠군.”
키에르트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아마 대부분의 귀족들이 그럴 것이다.
“그런데 흥정은 잘하던데.”
“제 돈은 아니어도 아낄 건 아껴야 하니까요.”
“에드린 전선의 사정이 그렇게 궁핍해?”
“여유는……, 없죠.”
쉬란의 군대는 재정적 지원을 풍족히 받는 편이었다. 먹고 생활하는 데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그런데 공주마저 아껴 써야 할 정도로 궁핍한 군대를 상대로 그렇게나 고전했다니. 자괴감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목이 타서 들고 있던 주스를 쭉 들이켰다.
“음?”
그런데 아까와 맛이 달랐다. 분명히 같은 과일, 같은 비율, 같은 방식으로 만드는 걸 눈앞에서 봤는데.
“왜 그러세요?”
“맛이 다르군.”
“어? 정말요? 제 건 똑같은데.”
리시스는 자신의 주스를 다시 한번 쪼록, 마셔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했다.
“폐하 거 마셔봐도 돼요?”
“자.”
리시스는 자신의 빨대를 키에르트의 컵에 꽂아 쭉 한 입을 마셨다. 그러나 별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 처음 마셨던 거나, 자신의 것이나, 키에르트의 것이나. 다 똑같은 과일, 똑같은 맛이었다.
“모르겠는데요. 똑같은 것 같은데……. 제 거 마셔보실래요?”
키에르트는 리시스가 내민 주스를 한 입 맛보았다. 놀랍게도 자신의 것을 마셨을 때는 느껴지지 않았던 달콤한 향긋함이 돌아왔다.
“그대 것이 더 맛있는 것 같아.”
“엥. 진짜요? 그럼 제 거 드세요.”
리시스는 대수롭지 않게 컵을 바꾸어 들었다. 남은 양도 비슷했으니 바꿔먹어도 상관없었다. 컵을 바꾼 뒤 다시 한 입을 마셨다. 비슷했지만 아까보다는 조금 덜 맛있어진 느낌이었다. 키에르트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주스를 바라보았다. 주스엔 문제가 없었다. 그럼 뭐가 문제인 걸까.
“아, 찻잎은 이쪽인가 봐요.”
먹거리들이 늘어선 시장 초입은 정말 입구에 불과했다. 본격적으로 시장 안으로 들어서는 길에 접어드니 끝이 보이지 않는 점포들이 이어졌다. 머리 위쪽에 물건 종류를 분류해 놓은 표지판이 있어 보고 따라갈 수는 있었다. 리시스는 찻잎 상점을 가리키는 화살표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몸을 틀었다. 차는 귀족들이 주로 향유하는 문화였다. 찻잎 상점들이 모인 쪽으로 가니 가게의 모습부터가 크고 화려했다. 거리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옷차림도 고급스러워 보였다. 귀족이면 키에르트와 리시스를 알아볼 수 있다. 두 사람은 눌러 쓴 후드를 더욱 꼼꼼히 눌러썼다.
“어머? 폐하?”
그러나 무의미하게도 바로 들켰다. 둘을 알아본 사람은 전혀 뜻밖의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