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복근의 감촉2021.10.03.
키에르트의 마음속에서 수많은 키에르트들이 싸웠다. 평소에 가장 많이 활동하는 이성적인 키에르트가 딱 부러지게 선을 그었다.
‘당연히 안 되지. 지금도 황궁 안으로 첩자들이 들어오는 판에. 황궁 밖에서는 기다렸다는 듯 접선하려 들 텐데.’
이것이 마땅히 황제로서 그가 선택해야 할 방향이었다. 리시스와 별개로 에드린은 경계대상이었다. 지금은 리시스가 쉬란에 협조적으로 굴어도 에드린의 입김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정도는 중간에 제재할 수 있지 않나?’
그런데 두 번째 이성이 끼어들었다. 이 역시 사실이었다. 황궁 안만큼 철저할 수는 없어도 황후에게 접근하려는 미심쩍은 인물을 차단할 수는 있다. 아무렴, 리시스를 혼자 보낼까. 이중, 삼중 호위는 당연하다.
‘평범한 황후였어도 시장 가겠다는 말에 이렇게 고민했을까?’
세 번째 이성도 거들었다.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 쉬란의 황후가 어디를 가든 황제가 그걸 막을 권리는 없다. 황후는 노예가 아니니까. 이제는 에드린의 공주가 아니라 쉬란의 황후라고 본인 입으로 말했으면서 다른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
“아……, 역시 좀 곤란하겠죠? 죄송해요. 생각해 보니까 궁에 얌전히 있어도 모자랄 판에…….”
사실 네 번째 이성도 준비 중이었다. 애초에 황후가 외출을 하겠다는데 황제의 허락을 받으러 온 상황 자체가 이상한 것이다. 황후가 가겠다면 시장을 궁 안으로 옮겨서라도 재깍 준비부터 했어야지. 황제를 찾아오게 만들 일이냔 말이다.
“아니, 그대가 사과할 일이 아니야. 허락을 받을 일도 아니고.”
“그런가요……? 황후가 한 번 황궁 밖으로 행차하려면 이것저것 손이 많이 쓰인다길래요.”
“그런 것보다 황후가 가고 싶은 마음이 우선이지.”
뜻밖의 전폭적인 지지에 리시스는 활짝 웃었다. 내심 안 되겠지, 지레 포기하려던 마음이 절반이었다. 자신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적국의 공주니까. 리시스의 행동 하나하나가 꼬투리 잡힐 빌미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 조심해야 할지는 아직 기준이 잡히지 않았다. 마냥 조심만 하다 보면 끝이 없었다. 그래서 어디까지 되나 저질러 본 것이었는데.
“그럼 가도 되는 거예요?”
“물론.”
“꺅!”
리시스는 두 손으로 뺨을 감싸며 팔짝 뛰어올랐다. 꺅 소리를 듣는 순간 키에르트는 두 손을 벌렸다. 저번처럼 리시스가 달려들어 끌어안을 줄 알고 반사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리시스의 몸은 이미 공중에 떠 있었고…….
“…….”
“어…….”
착지한 후엔 어색한 분위기가 함께 내려앉았다. 뒤늦게 안겨들자니 이상하고. 내민 손을 무시하자니 그것도 무안 주는 행동이고.
“착지하다 넘어질까 봐.”
키에르트가 먼저 손을 거두며 좋은 핑계를 찾아 주었다. 목소리도, 거두는 손도 목각인형처럼 끼긱거렸다.
“아아, 친절에 감사드려요.”
“별말을.”
“네에…….”
리시스도 웃으며 이 순간을 모면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이 어색함은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우리 모두가 알았다. 이럴 때는 뭐다? 빠른 화제 전환이 최고다.
“그런데요. 제가 듣기로 황궁 주변에 있는 시장이 정말 크다던데. 정말이에요? 수도 오르탄이라 없는 것이 없다면서요. 한 번 길을 잃으면 일주일을 헤매도 못 빠져나올 수 있다고.”
“……그래?”
키에르트도 막상 시장 구경을 제대로 해 본 적은 없다. 상인 대표에게 인사를 받거나 행사가 있을 때 잠깐씩 들른 것이 전부다. 황제가 본격적으로 무언가를 사러 돌아다닐 일이 있었겠는가.
“폐하도 시장 안 가보셨어요?”
“음, 바빠서 그럴 시간이 없었군.”
“그럼 같이 가실래요?”
리시스가 마침 잘됐다는 듯 박수를 짝, 쳤다. 박수가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듯 키에르트의 마음이 다시 한번 휘청 흔들렸다. 괜찮은 제안이었다. 안 그래도 지금까지 전쟁에 집중하느라 민심을 살피는 것에 소홀했다. 시장은 민심을 살피기에 마침 좋은 장소다. 더구나 리시스와 동행하기까지 한다면 첩자 접근 방지와 호위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게 된다.
“그러지.”
키에르트는 흔쾌히 리시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가만 생각해보니 리시스의 제안을 모두 흔쾌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은데. ……잘못된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니, 상관없나. 키에르트는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떠올랐던 생각을 떨쳐버렸다.
***
“정말요? 이렇게요? 둘이서요?”
시장에 가기로 약속한 날, 리시스는 약속장소에 홀로 서 있는 키에르트를 보고 주춤했다. 곁에 늘 우르르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딱 한 명, 제롬만 멀찍이 서서 묵례했다.
“호위는 보이지 않게 따라붙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리고 로브를 걸치는 게 좋겠군.”
팔에 걸치고 있던 로브를 내미는 키에르트도 로브를 머리끝까지 뒤집어 쓴 채였다. 리시스는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기분으로 키에르트가 내민 로브를 드레스 위에 걸쳤다. 앨린은 황후 폐하의 행차니 화려하게 꾸며야 한다고 박박 우겼다. 하지만 시장에 물건을 보러 가는 거지 황후 행세하러 가는 게 아니니 대충 입었는데, 그것마저도 로브로 가리라고 시킨다.
“설마, 정체를 숨기고 돌아다니는 건가요?”
“대놓고 다니면 그건 퍼레이드 아닌가? ……아, 그걸 하고 싶었어?”
“아뇨! 아뇨! 이게 더 좋아요!”
그럴 수 있다는 걸 몰랐을 뿐이다. 에드린 성에 있을 때는 감시가 심해서 꼼짝도 못했고, 전선에서는 모든 사람이 리시스가 공주란 걸 알아서 숨길 필요가 없었다. 황후라는 명칭은 아직도 어색하다. 황후라는 것을 알리지 않고 편하게 돌아다닐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시장 초입까지는 길이 좁아서 말로 이동해야 하는데, 탈 줄 알지?”
“아뇨?”
키에르트가 준비해 온 말은 두 마리였다. 너무 당연하게 탈 줄 아는 것을 전제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춤처럼 대충 눈짐작으로 배운 걸 한다고 할 수는 없었다. 승마는 목숨이 달아날 수도 있으니까.
“……못 탄다고?”
“안 배웠으니까요.”
“전선에 있었잖아.”
“제가 선두에서 칼 휘두르며 싸운 건 아니잖아요.”
몸만 있으면 시간을 쪼개 배울 수 있는 체술이나 검술과 달리 마술은 일단 말이 있어야 했다. 말은 전선에서 귀한 자원이다. 안 그래도 전투에 지친 말을 리시스의 연습용으로 뺄 수 없었다. 리시스가 반드시 말을 타야 하는 일이 있었으면 모를까. 전술을 짜는 것은 선두가 아니어도 가능했다.
“……그럼 나와 같이 타지. 괜찮겠나?”
“네, ……아마요? 타 보면 알지 않을까요?”
말에 누군가와 같이 타 본 적도 없다. 그러니 미리 괜찮을지 아닐지도 알 수 없었다. 키에르트는 한 마리의 고삐를 제롬에게 넘기고 리시스 가까이로 다가갔다. 리시스는 다가온 말을 올려다보며 콧잔등을 쓸었다. 말을 타지는 못하지만 다룰 줄은 알았다. 여차하면 리시스도 나서서 말 관리를 도운 덕이었다. 말은 얌전히 콧잔등을 내어주었다. 시내에서 타고 다닐 승용마라 그런지 군마보다는 체격이 작고 온순해 보였다.
“올라탈 수 있겠어?”
“그냥 올라가 앉으면 돼요?”
“응. 안장에.”
“해볼게요.”
리시스는 키에르트가 가르쳐 준 대로 갈기를 쥐고 등자에 한쪽 발을 걸었다. 거기까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 발로 지면을 뻥 차며 몸을 안장 위에 얹듯 올려야 하는데……, 생각보다 말의 체고가 높았다. 말이 그렇게 크진 않았지만 리시스가 작았다.
“잠, 깐만요. 한 번만 더.”
리시스는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신체적 한계는 뛰어넘기 어려운 벽이었다. 등에서 깔짝대는 인간이 성가셔진 말이 투레질을 하며 따닥따닥 발굽으로 재촉했다. 긴장한 리시스가 허공에서 발을 버둥거렸다. 그대로 옆구리를 차기라도 했다간 큰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다. 키에르트는 얼른 리시스의 허리를 잡아올렸다. 가벼운 몸은 크게 힘을 주지 않아도 붕 떠올랐다. 리시스가 뒤늦게 놀라 몸을 틀었을 땐 이미 말 허리 위에 올라앉은 뒤였다.
“새, 생각보다 높아요.”
생전 처음 경험하는 낯선 눈높이에 리시스가 바싹 얼었다. 리시스의 뒤에 올라타려던 키에르트가 리시스를 뒤쪽으로 고쳐 앉혔다. 원래는 리시스를 뒤에서 감싸듯 앉으려 했으나 높은 시야가 무섭다면 달리면 더 무서울 것이다. 키에르트는 날렵하게 몸을 날려 리시스의 앞쪽에 앉았다. 리시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키에르트의 등이 눈앞을 가로막았다.
“이러면 좀 괜찮나.”
“어……. 네.”
당장 눈앞에 키에르트의 등밖에 보지 않게 되었다. 일부러 양 옆을 돌아보아 높이를 느끼지만 않으면 무섭지 않았다. 리시스는 긴장으로 굳었던 어깨를 내렸다.
“천천히 몰겠지만 위험하니 내 허리를 꽉 잡아.”
“이렇게요?”
리시스는 살그머니 키에르트의 옷 양쪽을 쥐었다.
“……그건 좀 간지럽고. 제대로, 꽉.”
“이렇게……?”
리시스는 키에르트가 말한 대로 옷을 더 힘주어 꽉 잡았다. 양 옆으로 옷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키에르트는 제대로 잡지 않고 손가락만 꼬비작대는 리시스의 손을 잡아다 자신의 배 앞으로 끌어당겼다.
“어머! 꺅!”
“쉿. 말 위에선 소리 지르는 거 아냐.”
“그, 그래도……. 손이…….”
두 손이 키에르트의 복근 위에 착 붙어버렸다. 키에르트가 숨쉬고 말할 때마다 단단한 복근이 꿈틀거리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눈높이 대신 손바닥의 감촉 때문에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하지만 키에르트는 안전이 최선이라며 손을 더 꽉꽉 끌어다 붙였다. 키에르트의 몸통은 보기보다 두툼했다. 리시스의 두 팔로 아슬아슬하게 감겼다. 때문에 바싹 당겨진 몸이 키에르트의 등에 달라붙듯 닿아버렸다. 두 손 안에서 꿈틀거리는 복근만으로도 감당하기 힘든데, 몸 전체로 끌어안는 모양이 되어버렸다.
“으아아아…….”
눈앞이 팽팽 돌았다. 이리저리 조금이라도 몸을 떼어 보려 바르작거리는 리시스의 움직임은 키에르트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당연하지만 조그맣고 부드러운 생물이 등에 달라붙어 꾸비작거리면 느낌이 이상하다. 키에르트가 끙, 낮게 신음하며 퉁을 놓았다.
“자꾸 움직이지 말고.”
“그게 맘대로 되는 게…….”
“출발한다.”
이대로 시간을 끄느니 차라리 달리며 편한 자세를 찾는 것이 낫겠다. 키에르트는 리시스가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말을 출발시켰다. 말은 다각, 다각 천천히 걸음을 딛기 시작했다. 느린 걸음이지만 몸이 앞뒤로 흔들흔들했다. 키에르트의 말대로 꽉 잡지 않으면 뒤로 훌렁 넘어가 떨어질 것 같았다. 낙마의 위험이 코앞에 닥치니 키에르트의 몸을 부둥켜안고 있다는 자각도 희미해졌다. 뭐든 손에 잡히는 거면 다 움켜쥘 기세가 되었다.
“이제 달릴 거야.”
리시스가 안정적으로 매달리자 키에르트가 슬슬 박차를 가했다. 말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반동도 점차 커졌다. 키에르트의 몸을 끌어안은 리시스의 팔에도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키에르트가 숨이 막힐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