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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그대는 귀엽지 (17/153)

17. 그대는 귀엽지2021.09.30.

16549356882416.png“왜.”

키에르트는 익숙하게 질문했다. 이미 몇 번이나 중간에 이랬다. 말을 하는 도중에 다른 생각이 떠오르면 문장이 섞였다. 리시스는 손으로 찻잔을 들고 있는 모양을 만들어 쥐더니 키에르트를 올려다보았다.

16549356882421.png“이것도 차라면 차겠네요?”

16549356882416.png“차라면 차지.”

16549356882421.png“그럼 저도 차를 전혀 모르는 건 아니겠네요? 이것도 제 식대로의 차라고 생각하면 저만의 방식이 될 수 있는 거고?”

그럴싸하게 들리기는 하는데 일반적으로 알려진 티파티와 상당히 거리가 있기는 했다. 키에르트는 선뜻 맞다 틀리다 대답해주지 못하고 고민해야 했다.

16549356882421.png“……아닐까요?”

16549356882416.png“어렵다기보다……. 좀 생소해서. 들어도 잘 모르겠군. 나도 티파티에 마지막으로 간 것이 아홉 살 때라.”

16549356882421.png“앗. 아홉 살 때요?”

키에르트가 생소해 할 만하다. 유행은 눈 감았다 뜨는 사이에도 바뀐다. 티파티에도 유행이 있다고 했다. 이십 년 남짓한 세월이면 티파티가 뭔지 기억도 안 날 만큼 오랜 시간이었다. 황제면 모든 티파티에 얼굴을 비추느라 바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16549356882416.png“보통 티파티는 여성들의 행사라서 갈 일이 없지.”

16549356882421.png“그럼 아홉 살 때는요?”

16549356882416.png“세니아가 연 첫 티파티여서. 예의상 한 번 정도는 가 줘야 했거든.”

정말 예의로 한 번 가고 끝냈던 모양이다. 그 나이에 황태자가 벌써 예의를 차려 티파티에 참석했다는 것도 놀랍고, 그 나이에 자신의 티파티를 연 세니아도 놀라웠다. 자신도 공주로 태어났는데 태생부터 뒤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곧 떨쳐내고 턱을 치켜들었다. 이제 황후는 자신이고, 자신만의 방식이 있으니까.

16549356882421.png“그 티파티는 어땠어요?”

16549356882416.png“그 나이의 아이답지 않게 정석적으로 훌륭하게 잘해 낸 티파티였다고 칭찬이 자자했다던데, 나는 지루해서 겨우 졸지 않고 버텼던 기억만 나는군.”

리시스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16549356882421.png“지루해서 졸릴 만큼 정적인 티파티가 정석인 걸까요?”

잘 몰랐는데 오늘 세 사람을 기절시킨 걸 보면 잘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16549356882416.png“꼭 그래야만 하는 건 아닐 거야. 티파티는 주인의 취향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 들었어.”

잘 몰라도 리시스의 화술 같은 티파티는 아니라는 건 알겠다. 키에르트는 급히 만류했다.

16549356882421.png“그래도…….”

16549356882416.png“그대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자리라 생각하면 어때.”

16549356882421.png“저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자리…….”

티파티 하나에 참 많은 걸 생각해야 했다. 교양은 물론이요 역사에 ‘나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철학적 고찰까지. 평소에 생각 안 하던 것을 갑자기 생각해 내야 하니 머리가 복잡했다.

16549356882421.png“저는 어떤 사람인가요?”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자문을 구했다. 이런 건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타인의 시선이 더 정확할 수 있었다. 엉겁결에 키에르트가 리시스의 고민을 넘겨받았다.

16549356882416.png“그대는…….”

16549356882421.png“네, 저는.”

초롱초롱 자신을 향한 눈빛에 ‘모르겠다.’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뭐라도 하나는 답을 꺼내야 할 것 같아 리시스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키에르트는, 마침 떠오르는 대답 하나를 생각해 냈다.

16549356882416.png“……귀엽지.”

16549356943259.jpg

  ***

16549356882421.png“귀여운 티파티란 무엇일까.”

16549356943267.jpg“종류야 여러 가지죠!”

앨린은 박수를 치며 발을 구르고 벌떡 일어났다. 흥분한 앨린은 단어마다 힘을 주어 팔을 휘두르며 예시를 줄줄 풀어놓았다.

16549356943267.jpg“귀여운 드레스가 있겠고요, 아기자기한 소품도 있겠고, 음악도 뽀작하게 깔 수 있겠네요! 테이블보나 티코스터의 레이스에 딸기무늬 뿌왕뿌왕! ……그런데, 귀여운 쪽으로 방향을 트시게요?”

지금까지 실컷 짜고 있던 방향은 ‘황후답게! 우아하게! 화려하게!’였다. 이것도 뭔가 아니다 싶어 헤매고는 있었지만……. 갑자기 이렇게 노선을 틀어버리는 건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원망스러워하는 앨린의 눈빛에 리시스는 한숨을 폭 쉬며 대답해 주었다.

16549356882421.png“황제 폐하가 귀엽대.”

16549356943267.jpg“아, 황제 폐하의 의견……. 네?”

16549356882421.png“티파티는 나를 알리는 자리니까……, 나는 어떤 사람인가부터 알아야 하잖아. 근데 생각이 잘 안 나서 물어보니까 귀엽대.”

티파티 얘기를 나누고 있던 중인데, 왜 갑자기 커플의 염장질을 듣고 있게 된 거지? 자연스럽게 염장을 지르는 게 수준급이었다. 앨린은 정신을 차리고 본래의 목적을 찾았다.

16549356943267.jpg“그건 티파티에 대한 의견이 아니라 황제 폐하의 고백 아니에요?”

16549356882421.png“무슨 고백?”

16549356943267.jpg“황후 폐하가 귀여우시다는…….”

16549356882421.png“그냥 내가 귀엽다는 사실 그대로를 말씀하신 거겠지.”

키에르트는 초야에도 같은 말을 했다. 암살자를 숨겨둔 것 아닌가 의심을 하면서도 리시스가 귀엽다는 건 인정했다. 리시스도 자신의 외모가 다른 사람의 눈에 귀여워 보인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외모 덕을 본 적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손해였다. 귀엽다는 건 무해하고 제압 가능하다는 약함을 내포하는 평가다. 겉보기에 귀여우니 은연중에 무시하고, 무능한 취급을 당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리시스는 그래서 귀엽다는 말을 그렇게까지 좋아하지는 않았다. 키에르트가 무시하려고 말을 한 건 아니지만 귀엽다고 특별하다는 말 역시 아닐 것이다.

16549356943267.jpg“그러……려나요?”

16549356882421.png“폐하가 특히나 감정 표현에 섬세한 사람이면 모를까, 그건 아니잖아?”

16549356943267.jpg“하긴 그래요.”

키에르트의 무감정한 면모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앨린도 그 점은 순순히 인정하며 수긍했다.

16549356882421.png“그러니까 그냥 객관적으로 귀엽다, 그 말씀을 하신 걸 거야.”

16549356943267.jpg“아……. 그렇다면 뭐……. 굳이 타인의 외적인 평가에 맞춰 티파티를 준비하실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16549356882421.png“그건 그렇네. 역시 초안으로 가야겠다.”

16549356943267.jpg“초안요?”

리시스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16549356882421.png“응. 군대식.”

16549356943267.jpg“……네?”

앨린은 머리를 싸매 쥐고 엎드렸다. 한 번은 염장질로, 한 번은 황당함으로. 앞뒤 양옆 골고루 때려주신다. 물리적인 충격이었다면 혹으로 머리둘레가 늘어날 정도로 얼얼했다.

16549356943267.jpg“……그건 뭘까요?”

16549356882421.png“전쟁터에서 했던 것처럼. 화로에 고기 구워 먹고, 그 불에 주전자를 올려서 물 끓이고, 거기에 내키는 대로 찻잎 넣어서 그때그때 다른 차를 마셔 소화시키고. 그런 것?”

앨린은 충격에 부들부들 떨었다. 아니, 박물관을 통째로 들어 옮기는 짓까지 해 놓고서. 대체 왜 그렇게 파격적인 전환을 시도하시냔 말이다.

16549356882421.png“내가 이제 와서 익숙하지도 않은 콘셉트로 티파티를 열어봤자 그건 그냥 흉내 내기잖아.”

16549356943267.jpg“흉내를 잘 내시면 되죠!”

16549356882421.png“뭐 하러 흉내를 내? 황제 폐하도 공주인 내가 아니라 전쟁터의 리시스를 더 탐내셨대. 그럼 내 진짜 매력은 그거 아냐?”

16549356943267.jpg“아니……, 그건……, 황제 폐하의 취향인데……, 아니 그게 중요하지 않단 말은 아니고……. 초대받는 건 보통 티파티에 익숙한 귀족가 여성분들인데요…….”

그걸 좋아하시는 건 황제 폐하 하나뿐 아닐까요? 그러나 리시스의 마음은 이미 굳었다.

16549356882421.png“듣도 보도 못한, 특이하고 특별한, 나만의 티파티. 내 인생은 다 전쟁터였으니 그렇게 나라는 사람을 알리는 게 좋을 것 같아.”

16549356943267.jpg“…….”

차라리 딸기 레이스 뿌왕뿌왕을 해 주세요……. 하지만 리시스는 이미 군대식에 꽂혀버린 눈치였다.

16549356882421.png“말 나온 김에 바로 찻잎부터 찾아볼까?”

앨린은 그냥 울고 싶었다. ***

16549356882421.png“이건 아니야.”

16549356943267.jpg“이게 가장 정제하지 않은 찻잎인데요…….”

16549356882421.png“이렇게 단순하고 고운 맛이 아닌데.”

리시스는 맑은 빛깔을 빛내는 액체를 내려다보며 실망감어린 투정을 부렸다. 옆에서 차를 내린 앨린의 어깨와 정신이 동시에 무너져 내렸다. 군대식이라고 쉽게 볼 일이 아니었다. 리시스는 거칠고, 싼 맛 나고, 잡다한 향이 나는 차를 찾았다. 더 고급스러운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찾아 헤매야 하는 이 사태는 대체 무언가.

16549356943267.jpg“이것보다 더 거칠려면 나무뿌리를 캐서 넣든가 잡초를 뜯어 넣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16549356882421.png“아, 그럴까?”

16549356943267.jpg“아닙니다!”

황후 폐하의 몸에 무슨 일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앨린은 기함했다.

16549356882421.png“괜찮을 것 같은데…….”

그러나 리시스는 진지하게 고민하는 눈치였다. 안 돼. 이대로라면 황후의 첫 티파티를 군대식으로 여는 걸 말리지 못한 무능한 신하에, 황후에게 잡초를 먹인 역적까지 될 수도 있었다.

16549356943267.jpg“차라리 제가 시장에 가서 열심히 뒤져보겠습니다!”

16549356882421.png“시장?”

16549356943267.jpg“예, 여긴 쉬란의 황도, 오르탄이니까요. 오르탄의 시장엔 없는 것이 없으니 뒤져보면 황후 폐하의 마음에 드는 거칠고, 싼 맛 나고, 잡다한 차도 찾아낼 수 있을 거예요!”

엘린은 마지막엔 거의 울부짖었다. 그러나 리시스는 시장이라는 단어에 마음을 빼앗겨 보지도 못했다.

16549356882421.png“없는 게 없는 시장이라니. 구경하고 싶다.”

리시스는 시장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아왔다. 전선 근처의 마을에도 장이 서기는 했지만 리시스 개인이 돈을 만지지를 못하니 구경만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나마도 식재료, 생필품 몇을 너저분하게 깔아놓은 것에 불과한 시장이었다. 수도에는 늘 물건과 상인이 바글대는 시장이 있다고 들었지만 성에 갇힌 공주님이 나가 볼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16549356882421.png“내가 직접 가서 고르고 사는 것이 시간 절약도 되고 좋지 않을까?”

16549356943267.jpg“황후……, 폐하께서……, 시장을……, 직접요……?”

오늘은 충격으로 기어이 머리가 터져버릴 날인가. 리시스는 하는 것마다 ‘역사상 최초’를 달고 있었다. 그 ‘역사상 최초’에 직접 시장에서 장을 보는 황후까지 추가될 생각을 하니 앨린의 정신이 아찔했다. 황후가 아니라 보통의 귀족만 해도 시장에는 절대 직접 발을 들이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상인을 집으로 불러들여 구매한다. 앨린이 직접 시장에 가겠다고 외친 것도 거한 희생정신이었다. 상인을 불러서 사는 정도로는 리시스의 입맛에 맞는 걸 도저히 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서.

16549356882421.png“응, 아무래도 그편이 빠르고 편하지 않겠어?”

16549356943267.jpg“그……, 호위 문제도 있고……, 그……. 일단 황제 폐하께 확인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자신의 선에서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였다. 앨린은 키에르트에게 책임을 던졌다.

16549356882421.png“일단 여쭤는 봐야겠지? 하지만 뭐. 못 갈 이유도 없지 않을까?”

못 갈 이유가 열다섯 가지는 되겠지만, 그걸 설명하는 것도 키에르트의 몫이다. ***

16549356882416.png“……시장? 시장이라고?”

무도회도, 파티도, 나들이도 아닌 시장? 키에르트는 생소한 단어에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16549356882421.png“네, 사람 시키면 시간도 더 들고 물건도 많이 못 보니까요. 그냥 제가 가서 보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앨린은 호위니 뭐니 복잡할 수 있다고는 하는데…….”

‘당연하지.’ 키에르트는 리시스가 가서는 안 될 이유를 동시에 열다섯 개 정도는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보안 문제도 있고, 리시스는 에드린의 공주다. 지금도 에드린에서 숨어들어오는 밀정이 잡히고 있는 상황에 어딜 그렇게 막 돌아다니겠단 소린가. 키에르트의 표정이 딱 봐도 안 될 것 같았다. 리시스가 눈알을 굴리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16549356882421.png“……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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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356882416.png“…….”

치사한 수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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