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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공주가 해주는 군대 이야기 (16/153)

16. 공주가 해주는 군대 이야기2021.09.26.

16549356679277.png“그래도, 황후로서의 저를 증명하는 건 하고 싶어요.”

에드린의 공주인 리시스일 필요가 없어도 쉬란의 황후이긴 해야 했다. 쉬란의 황후로서 자리를 잡는 것은 생활의 안정을 위해서도 필요했다. 황후 후보였던 세니아가 아무 꿍꿍이가 없다면 모를까. 지금은 두 손 놓고 안심할 상황이 아니다. 거기에 쉬란의 귀족들이 리시스를 두 팔 벌려 환영하지도 않았다. 이대로 두 손 놓고 고립당하는 것은 사양이었다.

16549356679282.png“그대가 원한다면, 나는 환영해야지.”

리시스가 황후로서 뭐든 열심히만 해 준다면 키에르트로서는 뭐든 감사했다. 그래서 리시스의 사교활동에 드는 전액을 지원하겠다고도 한 것이다.

16549356679277.png“수학책은 실컷 봤으니 이제 티파티 책도 좀 볼까요.”

리시스는 마침 맨 위에 올려져 있던 티파티 책을 과장되게 넘겼다. 장난치듯 휘릭 책장을 넘겼을 뿐인데 유독 눈에 확 들어오는 글자가 있었다. 눈에 들어오는 건 일단 읽어야 직성이 풀렸다. 리시스는 걸으며 몇 줄을 읽어내렸다.

16549356679277.png“음, 티파티가 원래는 형식이 꼭 정해져 있는 게 아니었네요?”

걸으며 대충 훑어보던 리시스가 흥미로운 내용을 발견하고 책장을 멈췄다. 앨린이 말해준 것에 따르면 티파티의 형식은 꽤나 엄격했다. 그릇부터 찻잎, 테이블의 크기까지. 모든 것 하나하나가 파티 주인을 평가하는 항목이 되었다. 반대로 파티 주인의 자랑이 될 수도 있고. 그런데 책에 쓰인 티파티 문화는 그것보다 훨씬 자유로웠다.

16549356679282.png“원칙상으로는 그랬겠지. 모든 건 시간이 흐르며 변질되고 의미가 더해지기 마련이니.”

16549356679277.png“그렇죠. 일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고.”

수학문제를 풀 때는 어린아이처럼 단순할 수 있었는데. 수학문제를 벗어나니 다시 그들이 있던 복잡한 어른의 세계가 돌아왔다. 키에르트의 말처럼 관계란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었다.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눴던 둘이 지금은 이렇게 나란히 서서 한 곳을 향해 걷고 있는 것처럼. 문득 세니아가 떠올랐다. 오랜 시간 리시스가 지금 서 있는 자리에 서 있었을 사람. 앞으로도 내내 그 자리가 자신의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키에르트는 처음부터 세니아에게 주어졌던 자리는 없는 양 차갑게 굴었다. 그때 당시에는 자신을 편들어 주었던 키에르트가 고마웠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 보니 무서워졌다. 지금은 리시스가 황후이기 때문에 베풀어 준 친절이다. 상황이 바뀌면 곧장 거둬질. 그 생각을 하자 칼날을 맨손으로 잡은 듯 뱃속이 뜨끔했다. 친절은 지독한 맹독이다. 중독되는 것을 알면서도 뱉기가 싫다.

16549356679277.png“만약에 제가 다시 에드린의 공주로 돌아가게 되면……, 우린 다시 살벌하게 칼을 마주대게 되겠죠?”

그래서 리시스는 스스로 기대의 싹을 솎아내려 했다.

16549356679282.png“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생각할 필요가 있나?”

16549356679277.png“예측할 수 있는 변화는 대비해 두자는 거죠.”

키에르트가 마음도 피해로 쳐 줄지는 모르지만. 냉대는 의외로 오래 남는 상처가 되었다. 당장 한 끼 밥을 굶은 것은 다음 끼를 배불리 먹으며 잊을 수 있다. 하지만 밥을 던져주는 차가운 눈빛에 긁힌 시림은 오래 갔다.

16549356679282.png“대비가 필요할 만큼 극단적으로 원상 복귀되지는 않았으면 좋겠군.”

‘당연히 네 목숨은 황궁을 벗어나기 전에 내 손에 달아날 거다.’라는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다. 의외의 대답에 리시스는 키에르트를 돌아보았다. 세니아와 자신은 다른 사람이니 취급도 다른 것일까?

16549356679282.png“오늘 수학 문제 푸는 걸 보니 그대가 무서워졌어.”

16549356679277.png“제가 무서워요……?”

16549356679282.png“그대는 내 인생에서 만난 존재 중 가장 무서워.”

16549356679277.png“…….”

농담인가 싶었지만 키에르트의 표정은 진지했다. 무서우면 피하고 싶을 수 있지. 누군가에게 무서운 존재가 되어 본 것은 처음이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애매한 기분이었다. *** 키에르트는 종종 도서관에서 휴식을 취했다. 책을 읽으며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그의 휴식법이었다. 도서관은 서가가 높고 구조가 복잡해 암살을 시도하기 어렵다는 장소적 이점도 있었다. 거기에 주로 출입하는 사람들은 우연히 마주친 황제에게 아부를 하기보다는 자신의 학문적 궁금증을 해소하는 것에 더 열심이라 번거로울 일도 적었다. 황후, 리시스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16549356679277.png“음?”

16549356679282.png“어.”

리시스는 키에르트와 부딪치기 직전에야 고개를 들었다. 한 팔에 책을 한아름 들고 책상으로 걸어가는 도중에도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16549356679277.png“오늘도 도서관에 오셨네요?”

저번에 도서관에서 만난 지 삼 일 만이다. 길지는 않은 간격이었다. 리시스는 삼 일 만에 도서관이 아주 익숙해졌는지 걷는 자세부터가 편해 보였다. 책더미를 든 팔도 안정적이고. 제 집에 온 손님 맞듯 하는 리시스의 태도에 키에르트는 짧게 웃음을 흘렸다.

16549356679282.png“삼 일 만인가.”

16549356679277.png“네, 저는 삼 일 내내 왔고, 폐하는 삼 일 만에 오셨고.”

16549356679282.png“삼 일 내내 도서관에서 뭘 했나?”

리시스는 읽던 책을 들어 보였다. 『쉬란과 에드린: 백 년의 전쟁사』  

16549356679282.png“전쟁사? 이것도 티파티 준비의 일환인가?”

16549356679277.png“기원으로 찾아 들어가다 보니 여기까지 왔는데…… 혹시 흥미가 드시나요?”

16549356679282.png“……응? ……아. 궁금하긴 하군.”

티파티 준비에서 어디서 어떻게 흘러가면 전쟁사까지 갈 수 있지? 살짝 궁금했을 뿐이다. 그런데 키에르트의 말에 리시스의 눈이 심상치 않게 빛났다.

16549356679277.png“오, 잘됐어요. 제가 하나하나 차근차근 설명해 드릴게요!”

16549356679282.png“……응? 아니, 차근차근 설명할 필요까지는…….”

16549356679277.png“아뇨! 폐하야말로 가장 잘 알아두셔야 하는 분이니까요. 이쪽으로 와서 앉아 보세요.”

뭔가 낚인 기분인데. 키에르트는 찜찜한 기분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암살자가 숨어 있는 기척도 없는데 왜 이렇게 당하는 기분일까. 하지만 팔을 잡아 끄는 리시스의 손길을 뿌리칠 수 없었다. 리시스는 볕이 잘 드는 창가 옆 의자에 키에르트를 앉히고, 자신도 옆에 앉았다.

16549356679277.png“자, 보시면요…….”

차근차근 설명을 하려 했는데 급한 마음 때문에 말이 자꾸 빨라지고 단어도 꼬였다. 벌써 세 번째인데도 그랬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앨린과 허멀 후작이었다. 앨린은 처음엔 흥미진진해 하다가 ‘그래서요?’만 반복하더니 질린 표정으로 도망갔고, 허멀 후작도 처음엔 마찬가지로 흥미진진해 하다가 ‘길군요. 바빠서 이만.’ 하며 도망갔다. 리시스는 자신이 새로이 습득한 지식이 너무나도 재미있고 흥미로워 견딜 수가 없었다. 이 재미있는 것을 왜들 듣지 않으려는 것일까. 기원조차 기억나지 않는 쉬란과 에드린의 전쟁, 그 시작부터 티파티라는 문화가 생긴 배경까지. 심지어 차와 전쟁이 이어져 있다는 것까지도 신기하고 놀라웠다. 혼자만 알기 아까운, 너무나도 재미있는 이야기들이다. 한 사람에게라도 더 이야기하고 싶어 안타까워하던 그때 마침 키에르트가 나타났다.

16549356679277.png“예전에는 에드린에서도 차 농사가 잘됐대요. 그때는 오히려 쉬란의 차보다 더 맛이 있었다는데, 저는 쉬란의 차를 제대로 안 먹어봐서 모르겠어요. 맛있을까요? 그런데 차의 맛을 결정하는 건 일조량과 건조한 기후, 찻잎의 품종이…….”

리시스는 신이 나서 설명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음, 음. 하며 열심히 듣던 키에르트가 어느 한 순간부터 대답이 없었다.

16549356679277.png“그러니까……, 듣고 계세요?”

16549356679282.png“듣고는 있는데……. 쉬란 말로 다시 좀 해 주겠나?”

들어도 이해가 안 돼서 말이야. 언제부터 에드린과 쉬란의 말이 이렇게까지 달라졌던가. 들어도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리시스의 설명은 충격적일 정도로 이기적으로 산만했다. 본인만 아는 말을 끝없이 덧붙이는데, 원래 뭘 말하던 건지 잊을 만하면 본론으로 돌아가고, 그러다 또 곁가지로 빠지고를 반복했다. 키에르트는 열심히 듣다 듣다 그만 꾸벅 졸 뻔하기까지 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말. 그런데 목소리는 모래알이 햇살에 바스러지는 것처럼 보드랍고 영롱하다. 등에 닿는 따스한 햇살까지 더해지니 잠이 안 올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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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순간 리시스의 목소리가 끊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키에르트는 눈을 번쩍 뜨면서 자신이 눈을 감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16549356679282.png“아니, 안 잤어.”

16549356679277.png“많이 피곤하신가 봐요…….”

리시스는 어느 순간부터 입을 다물고 키에르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 또렷하니 날 서 있는 키에르트가 이렇게 풀어진 모습은 처음 보았다. 물론 자신의 탓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16549356679282.png“내가 지금 잔 건 아니지?”

16549356679277.png“주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눈을 감고 꽤 한참 계시긴 했어요.”

16549356679282.png“…….”

16549356679277.png“피곤하시면 그냥 주무세요.”

16549356679282.png“아니, 아니야. 깨야지.”

키에르트는 머리를 저으며 남아 있는 잠기운을 쫓아버리려 애썼다. 하지만 한 번 달라붙어버린 따뜻한 기운은 좀처럼 떨궈지지 않았다.

16549356679277.png“음……, 혹시 많이 졸리시면 제가 잠 깨게 군대 얘기 해 드릴까요?”

16549356679282.png“……뭐?”

16549356679277.png“군대 얘기 하면 사람들 보통 잠 잘 깨던데.”

키에르트는 솔깃해 눈을 바짝 떴다. 그 말만으로도 벌써 눈이 떠졌다. 키에르트는 황제로서 가끔 한 번씩 전선에 나서 전투를 지휘했다. 황제니 아무리 전선이어도 병사들보다는 편히 지냈다. 하지만 리시스는 병사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며 늘 전선에 붙어 있었다 들었다.

16549356679282.png“듣고 싶군.”

16549356679277.png“음, 뭐부터 얘기하지…….”

16549356679282.png“보통 식사는 어떻게 했나?”

키에르트가 먼저 물었다. 앞선 두 나라의 역사와 찻잎에 대한 진득한 고찰보다 훨씬 호기심이 생겼다. 첫날밤의 내기에 걸었던 작전의 비밀은 조건을 걸고 걸고 걸어서 일 년 뒤, 두 사람이 같이 그 장소에 갈 수 있게 되면 알려주기로 합의했다. 사실상 알려주지 않겠다고 발을 뺀 셈이었다. 그건 전투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지형의 문제라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전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의식주라면 대충이라도 알려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16549356679277.png“별건 없고요. 각 영지에서 보내오는 식량으로 해결하기도 하고……, 모자라면 사냥해서 구워 먹기도 하고. 아무래도 식량이 많이 부족하니 사냥을 많이 했어요.”

리시스는 의외로 쉽게 이야기해 주었다. 경계가 풀어진 것인지, 이 정도 이야기는 해 줘도 된다 판단한 것인지. 처음에는 군사적 목적이 더 컸던 키에르트도 리시스가 일상 이야기하듯 하는 이야기를 계속 듣다 보니 느슨해졌다. 큰 정보라면 큰 정보였지만 머릿속에서 이어 붙여지는 장면은 전선으로 보내진 리시스의 ‘일상’이었다. 군사적으로 어떻게 이용해 볼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책 이야기보다는 나았다. 여전히 두서는 없지만 깡총거리는 리시스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즐거운 광경이었다. 키에르트는 턱을 괴고 재촉하듯 리시스의 조잘거리는 입술을 응시했다.

16549356679277.png“근데 그 주변 지대의 문제인지 고기가 하나같이 기름져서요. 배탈 안 나는 비법이라고 들어서 주전자에다 이런저런 풀잎들을 우르르 넣어서 끓여 마시기 시작했는데…… 어?”

키에르트의 적극적인 경청에 신이 난 리시스는 혼자 와다다다 달리듯 이야기를 잇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말을 멈추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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