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혈통의 비밀2021.09.23.
“흠, 축하드리고……,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런데 도서관에서는 아무리 부부사이여도 적당한 거리를 좀…….”
허멀 후작은 축하할 건 축하하고 지적할 건 지적했다. 델리안 난제를 푼 건 기뻐서 뛸 만한 일이지만 도서관에서 지나친 신체접촉은 타 이용자를 불편하게 한다. 황실 도서관은 황립교육원 학생들도 이용이 가능하다. 어린 학생들이 모이다 보니 별일이 다 있다. 키 큰 학생이 작은 학생의 책을 빼주다가 눈이 맞는다든가, 책을 들어주며 알콩달콩 가까워진다든가, 같이 문제 풀이를 하다가 신이 나 끌어안는다든가 하는 경우가 왕왕 발생한다. 허멀 후작은 도서관의 분위기 조성을 위해 지나친 신체접촉은 금지하는 방침을 고수했다. 아무리 법 위에 있는 황제 부부라 할지라도 적당히 해 주길 바랐다.
“앗.”
리시스는 허멀 후작의 제재에 정신을 차리고 후다닥 키에르트에게서 떨어졌다. 너무 기쁜 나머지 키에르트를 얼싸안아 버렸다. 첫날밤엔 손끝 하나 대지 말라고 질색해 놓고선 자신이 먼저 덤벼서 끌어안았으니 키에르트는 얼마나 황당할까. 머쓱해서 키에르트를 돌아볼 수도 없었다.
“그, 나머지 책은 황후궁에 가져가서 읽어도 될까?”
리시스는 얼른 이 자리를 피하고 싶어 허겁지겁 책을 챙겼다. 문제 풀이를 한 소중한 종이도 꼭꼭 챙겼다.
“그러십시오. 시종을 통해 보내드리겠습니다.”
“아냐, 내가 들고 갈게.”
“황후 폐하께서요?”
도서관을 제 발로 찾아 온 황후도 처음이지만 책을 스스로 나르겠다는 황후도 처음이다. 자고로 황후란 앉은 자리에서 산을 움직이는 존재였다. 스스로 삽질을 하겠다고 나서는 황후의 행동에 허멀 후작은 적잖이 당황했다.
“든 김에 내가 가져다 주지.”
“황제 폐하께서요??”
황제 폐하가 짐꾼을 자처하는 일도 처음이다. 허멀 후작은 이번엔 몹시 당황했다. 허멀 후작의 당황과 별개로 키에르트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전쟁터를 누비던 튼튼한 몸으로 책 몇 권 나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 제가 해도 되는데…….”
“가지.”
리시스가 어물어물 책을 받아들려 했지만 키에르트는 단호하게 턱짓했다. 거절은 거절한다는 단호함에 리시스는 얌전히 입을 다물고 길을 나섰다.
“살펴 가십시오.”
허멀 후작은 함께 도서관을 나서는 황제 부부의 뒷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황제 부부가 공식 석상이 아닌 자리에서 저렇게 함께 있는 모습은 봐도 봐도 신기한 광경이었다. 역사상 거의 없었던 일이니까. 에드린의 공주가 황후로 들어온 것부터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 후로도 역사적인 장면이 줄줄이 이어지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 오붓하게 도서관 문을 나선 것과 달리 걷기 시작한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는 호위와 시종들도 멀찍이 떨어져 있어 더욱 적적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리시스는 뭐라도 먼저 말을 걸어 보아야 하나 싶어 주변을 돌아보았다. 둘러보다 보면 눈에 걸리는 것이라도 있을 테니까. 도서관에 가는 길에도 잘 꾸며놓은 화단이 있었다. 만찬장이나 황제의 정원에 비하면 소소했지만 귀여운 맛이 있었다.
“이쪽 꽃들은 자그마한 맛이…….”
“줄까?”
“아뇨, 아뇨. 잠깐만.”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키에르트는 꺾으려 들었다. 리시스는 다급히 키에르트의 팔에 매달렸다. 키에르트의 동작이 워낙 빨라 말리려면 그래야 했다.
“관심 있어서 쳐다본 것 아닌가?”
“꽃 받는 연습은 그만 해도 될 것 같아요!”
“아니…….”
관심이 있어 보이길래 꺾어주려 한 건데. 리시스가 연습이라는 말을 꺼내니 키에르트도 말이 궁색해졌다.
“그럼 저대로 황후궁에 옮겨…….”
“제가 꽃에 관심은 많지만 그냥 피어 있는 꽃을 보는 쪽이 더 좋아요!”
리시스도 이제는 키에르트라는 사람을 조금 알 것 같았다. 처음에는 지나친 친절에 어쩔 줄 몰랐지만 그건 뭘 노리고 그런 것이 아니었다. 습관처럼 배어 있는 것이다. 여자가 꽃을 바라보면 꺾어주는 습관. 문 앞에 있으면 먼저 나서 문을 열어주고-대부분 시종이 열어서 그럴 일이 잦지는 않겠지만-, 구두를 신어 걸음이 불편하면 그 걸음걸이에 맞춰 걷고. 부끄러워할 상황엔 눈을 돌려 못 본 척해 주는 배려 깊은 습관. 리시스가 그런 걸 많이 받아보지 못해서 몰랐을 뿐이다. 전쟁터에서 누가 그런 사소한 배려를 해 주겠는가. 날아오는 화살을 쳐 내주면, 늦잠 자느라 놓친 식사를 챙겨 주면 눈물 나게 감사할 정도였다. 키에르트의 이런 사소한 배려는 습관이다. 그걸 깨닫자 조금은 대처가 쉬워졌다. 리시스의 딱 자른 거절에 키에르트도 두 번 권하지는 않았다. 그저 습관적 배려였더라도 기분은 좋아져서 리시스의 걸음은 조금 더 가벼워졌다.
“제가 수학에 의외의 재능이 있었나 봐요.”
가벼운 마음에 입도 가벼워졌다. 평소였다면 꺼낼 생각도 못 했을 수다가 술술 나왔다.
“나도 놀랐어. 처음 수학을 접한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니, 그대가 전쟁터에서 보였던 모습을 생각하면 그리 놀랍지는 않은 일인가.”
“……그랬나요?”
“그대의 작전 때문에 내가 몇 번이고 정신이 번쩍 들었는데.”
리시스는 잠시 헷갈렸다. 사과를 하란 소린가, 그냥 칭찬인가.
“솔직히 말해서 에드린 왕이 이렇게 머리가 좋은 것 같지는 않은데, 그대는 참 신기해.”
다행히 칭찬이었다.
“……아, 그대의 부친을 모욕하려고 한 말이 아니라.”
키에르트는 정정의 말을 덧붙였다. 머리를 많이 써서 그런가. 내심 생각하고 있던 것이 그대로 튀어나와 버렸다. 에드린 왕이 무능한 왕인 건 익히 알려진 이야기다. 그래서 전선이 치열해진 것이 의외이기도 했다. 그만큼 잘 이끌어 나갈 인재가 에드린에는 없었다. 한참 뒤에야 그 모든 작전들이 공주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황당했는지. 그나마도 제대로 전술을 배워 지휘한 것이 아니라 ‘이건 어때?’, ‘저건 어때?’ 하며 한 마디씩 거들다가 종국엔 무시무시한 전략까지 만들어 냈다는 것까지가 첩자를 통해 알아낸 부분이었다. 믿기지 않는 사실이었다. 에드린 왕도, 왕비도 못난 인물들인 것이 분명한데. 그 소생인 왕자들도 어중이떠중이로 못난 놈들인데. 어떻게 공주인 리시스 하나만 그렇게까지 잘날 수가 있는가. 그때부터 키에르트는 리시스가 궁금했다.
“알아요. 에드린 왕이 멍청하고 이기적인 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제 피의 반이 거기서 온 것이 불만스러울 정도인데.”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말에 부정하지 않고 투덜투덜 쌓아놓았던 불만을 터뜨렸다. 자신의 몸에 흐르는 피의 반이 거기서 왔다는 건 불만스럽지만 혈통은 꼭 아버지 쪽만 잇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저는 엄마 피를 많이 받았으니까요.”
아주 어릴 때의 짧은 기억이지만 엄마와 함께 살았던 숲속의 오두막을 기억한다. 엄마가 밝은 미소의 소유자였던 것도, 사냥을 할 때 활을 당길 때면 찬란한 금발이 매의 깃털처럼 흩날렸던 것도. 밤이면 아롱이는 촛불 아래에서 눈이 시리다면서도 책을 놓지 않고, 깨알 같은 글씨로 펜을 굴리던 모습도 기억났다. 너무 어려서 엄마가 뭘 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도 엄마가 영리하고 멋진 사람이라는 기억은 가지고 있었다. 리시스는 미소를 지으며 기억에 젖어 들었다.
“엄마……?”
키에르트가 리시스의 말을 되새기며 의아한 눈을 했다.
“네, 엄…….”
무심결에 대답하던 리시스는 뒤늦게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얼굴에서 피가 빠지는 느낌이 났다. 너무 놀라 헉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아직은 이걸 말하면 안 되는데. 정략결혼이기 때문에 혈통은 중요한 조건이었다. 여차하면 결혼 취소까지도 갈 수 있는, 에드린이 배상을 해야 할 수도 있는 문제다. 리시스는 자신이 불어버린 혈통의 비밀에 목이 바짝 말라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에드린 왕비가 그대의 친모가 아닌 건가?”
키에르트가 한 번 더 확인했다.
“에드린 왕이 제 친부인 건 확실해요. 그러니까 엄마가 돌아가시자마자 바로 절 궁으로 들였겠죠. 처음부터 제가 있는 걸 알았대요. 그런데 엄마랑 같이 있어서 그냥 두었다가…….”
목구멍 안까지 바싹 타들어 간 리시스가 겨우 변명했다. 키에르트는 반응이 없었다. 더욱 조바심이 난 리시스의 변명은 더욱 길어졌다. 혹시 출생을 문제 삼아 공주로서의 자격에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었다.
“제가 에드린의 유일한 공주인 건 맞아요. 제가 이복 출생인 공주라 보내진 건 아니고……, 정말 공주가 저 하나뿐이라서.”
“잠깐 기다려.”
리시스의 우려와 달리 키에르트는 생각을 정리하느라 얼른 답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이제야 이상하다 여겼던 부분들이 하나로 모여 이해가 되었다. 하나뿐인 공주를 전쟁터로 내돌린 것, 그 공주를 타국에 결혼시켜 보내면서도 빈손으로 보낸 것, 허름한 옷차림 등등. 에드린 왕이야 무책임한 아비라 그랬다손 쳐도, 왕비까지 그렇다는 것이 의외였는데. 왕비의 자식이 아니면 미움받는 존재로 내몰리고 내몰리며 이리될 수도 있겠다고 이해가 됐다. 생각을 정리한 키에르트는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입장을 정리했다.
“황후. 그대의 혈통에 대해 그대 스스로가 책임감을 가지고 변명할 필요는 없어.”
“……예?”
“그대가 누구의 소생이든 나는 그대, 리시스를 요구했을 거야.”
사랑받는 공주가 아니었다 해서 리시스의 가치가 변하는 것도 아니었다. 나중에 에드린과 법적으로 공방을 주고받을 때에야 언급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리시스에게 따질 문제는 아니었다. 키에르트에게는 하나도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대의 가치는 이미 전쟁터에서 증명되었어. 내가 원했던 것은 나를 전쟁터에서 실컷 물 먹였던 ‘리시스’라는 여자였으니.”
“‘에드린의 공주’가 아니라 ‘리시스’를 요구하셨을 거라고요?”
“그대가 에드린의 공주라서 이 결혼이 조금 더 수월했던 건 맞지. 명분도 분명히 섰고. 하지만 내 입장에서 조금 더 이득인 건 ‘리시스’와의 결혼이었어.”
본인 스스로는 그 위력을 잘 의식하지 못하는 모양인데, 전쟁터에서 리시스는 몹시 골치 아픈 존재였다. 리시스 하나만 없으면, 이라는 말을 기도문처럼 외게 될 만큼. 오늘 수학 문제를 풀어냈던 것처럼, 집요하고, 두서없고, 변칙 가득한 작전들. 그걸 상대하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던가. 더구나 에드린 왕이 노렸든 안 노렸든, ‘공주’가 전선에 함께한다는 것 자체가 사기진작에 큰 역할을 했다. 지켜야 할 대상이 먼 곳의 성에 틀어박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과 늘 함께 먹고 마시며 숨 쉬고 있다. 에드린 군이 강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나는 그대가 쉬란의 황궁에 있다는 것, 그리고 나와 원만한 관계를 대외적으로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이 결혼에 만족해. 그러니 그 이상의 조건을 채우기 위해 안달복달할 것까진 없어.”
키에르트의 담담한 말에 리시스는 잠시 숨과 말문이 동시에 막혔다. 자신의 존재가치를 이렇게 쉽게 결정해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공주여도 쓸모없는 왕족, 전쟁터에서도 쓸모없는 존재라 생각했다. 그 가운데 어떻게든 자리 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런데 키에르트는 더 이상 증명할 필요가 없단다. 노력할 필요가 없다 말해주었다. 목구멍을 꽉 틀어막은 것은 아마도 안도감일 것이다. 리시스는 겨우 그것을 꿀꺽 삼키고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