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네가 반짝반짝해 보였다2021.09.19.
“맞……긴 한데요.”
“이거 한 권이면 돼?”
갑작스럽게 등장한 키에르트는 책 꺼내주는 도구를 자처했다. 황제를 그런 식으로 써먹어도 되는지는 모르지만 쓸 수 있을 때 쓰는 것이 좋다.
“그럼 그 옆에 ‘철제 병기의 강화법’도 부탁드려요.”
“음.”
“아, 거기 ‘근접 전투학’도.”
리시스가 찍은 책을 집어 올리며 키에르트의 눈썹이 미심쩍게 휘었다. 리시스도 숙연하게 조용해졌다. 두 사람의 관계를 위해서는 조금 다른 장르의 책을 골라봐야 할 것 같다.
“‘차의 종류와 유래’, ‘기초 역사학’도 보려고 했어요.”
리시스는 변명하듯 책 제목을 먼저 읊었다. 출신 때문에 책 고르는 것도 눈치를 봐야 한다니. 자신이 에드린 출신이라는 것이 원망스러웠다. 이것저것 고르다 보니 팔이 꽤 묵직해졌다. 키에르트가 들어 준 것까지 합치면 오늘 안에 다 읽을 수 있을까 싶을 양을 골라버렸다.
“끝인가?”
“어, 이거 하나만요.”
리시스는 에드린에 와서 새삼 자신의 욕심을 깨달았다. 꽃도 보면 볼수록 더 보고 싶고, 드레스도 보는 것마다 다 고르고 싶더니, 책도 다 읽어버리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고른 책은 『신학기, 친구와 친해지기』라는 책이었다. 키에르트는 책을 뽑아 표지를 보더니 잠시 침묵했다. 원예에, 전투에, 차, 역사, 이젠 어린애들이 읽을 법한 사교 생활정보서?
“책 고르는 기준을 알 수가 없군.”
“그냥……, 재미있을 것 같은 거, 호기심 생기는 거 고른 거예요.”
“신학기, 친구와 친해지는 법에도 호기심이 생기나?”
“그건 제가 쉬란에 온 것이 처음이니까. 쉬란은 혹시 친구들이랑 친해지는 방법도 다른가 싶어서요.”
사교계에 뛰어들 생각을 했으니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했다. 차나 역사에 대한 정보는 물론, 대인관계에도 방법이 있다면 알아두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누가 괴롭히면 나한테 일러.”
“……예?”
“감히 황후를 괴롭히는 친구를 황제로서 용서할 수 없지.”
“어……, 음…….”
그저 이 나라의 사교방식, 대인관계 패턴에 대해 궁금했을 뿐인데. 키에르트가 극성이 되어버렸다. 논리적으로는 맞는 말이었지만 사람 마음을 어떻게 권력으로 얻겠는가. 친해지는 데 왕도는 없다. 하지만 키에르트는 황제라서 그걸 모를 것 같았다.
“그냥 제 식대로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리시스는 설득을 포기하고 책을 원래 있던 서가로 돌려놓았다.
“그대의 식이 어떤 식인데?”
“호감 가는 사람에게 잘해주는 거죠, 뭐.”
어려울 것 없었다. 당연한 이치이기도 했다. 쉽게 대답하던 리시스는 문득 키에르트가 잔뜩 들고 있는 책에 눈이 가서 바라보았다.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키에르트는 자신에게 꽤 많은 것을 주고 있었다. 꽃도 주고, 드레스도 빌려주고, 이젠 책을 드는 노동력도 제공 중이다. 반면 자신이 키에르트에게 준 것은 뭐가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두 사람의 결혼은 계약이었다. 굳이 잘해주지 않아도 무방했다. 아무리 로구안을 의식해 잘 지내는 모습을 보여야 해도 사석에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 하지만 키에르트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도 리시스를 배려하며 잘해 주었다. 지금도 이렇게, 굳이 만날 약속이 없는 날에 만났음에도 자연스레 책을 빼주고 들어 주는 것처럼. 리시스는 반대로 자신은 뭘 해줬지, 생각하다가 떠오르는 것이 없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 받기만 하는 인생을 살아온 건 아니었는데. 앞으로 조금 더 살갑게 잘해줘야겠다는 각오가 새로이 섰다.
“여기는 어쩐 일로 오신 거예요?”
우선은 상대에 대한 관심부터.
“황후가 도서관을 향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소문 참 빠르네요.”
누군가가 자신을 감시하리라 생각은 했지만 키에르트의 귀에까지 들어가는 속도가 이렇게나 빠를 줄은 몰랐다. 감시당하는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이 살짝 수그러들었다.
“제가 국가 기밀이라도 빼내 갈까 봐 걱정돼서 달려오셨어요?”
“국가 기밀은 도서관에 두지 않지.”
“아까 전술서 손댈 때는 눈치 주셨으면서.”
리시스가 삐죽대자 키에르트는 지나가다 보이는 전술서 한 권을 얹었다.
“그대가 내내 황후라면 열 권이든 백 권이든 마음껏 읽어도 돼.”
하지만 에드린의 공주로 돌아갈 거라면 압수. 키에르트의 은근한 협박이었다. 지금 당장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리시스는 자신 있게 한 권을 더 얹었다.
“백 권 채울게요.”
곧 죽어도 지지 않는 리시스의 대거리에 키에르트는 결국 먼저 픽 웃고 말았다. 전쟁터에서 졌을 때는 눈앞이 빨개지도록 화가 났는데 이렇게 얼굴 마주보고 하는 신경전에는 관대해진다. 져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럼 이것도 해 보지?”
“이게 뭐예요?”
“전략수학.”
역시나, 리시스의 눈이 기대대로 빛났다. 만약에 리시스와 끝장이 나게 되면 유능한 적장에게 칼 하나를 더 쥐여주는 셈인데도 저 눈빛을 보니 즐거웠다.
“수학이 뭐예요?”
기초 교육과정이 없는 에드린에서는 모든 학문을 주먹구구로 배워야 했다. 키에르트는 수학의 정의를 내릴 수 없어 잠시 당황했다가 테이블로 자리를 옮겨 숫자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이 공식에 넣으면…….”
“아, 아하!”
리시스는 몇 자 적지 않았는데도 바로 공식을 이해하고 감탄성을 질렀다. 키에르트는 신기하게 돌아보았다. 진짜 이해하고 놀란 것이 맞을까.
“그럼 이 문제 풀 수 있겠나?”
“해 볼게요.”
황실 도서관은 학자들에게는 상시 오픈이 되어 있어 책상마다 펜이 놓여 있었다. 리시스는 펜을 들고 방금 배운 공식에 숫자를 넣어가며 열심히 풀었다.
“143?”
“정답이야.”
키에르트는 경이로운 눈빛으로 리시스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사람이 이럴 수가 있지? 리시스는 수학에 흥미를 붙였는지 책을 뒤적거리다 맨 마지막 페이지를 열었다.
“이게 제일 어려운 문제인가 봐요.”
“음…….”
마지막 페이지의 문제는 키에르트도 한 번에 답이 나오지 않았다. 암산으로는 안 될 것 같아 펜을 빌려 적어 봐도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리시스가 기대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슬쩍 자존심이 자극됐다. 키에르트는 인상을 쓰며 부지런히 펜을 놀렸다. 그래도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제가 한번 해 봐도 돼요?”
리시스가 지켜보다가 끼어들었다. 키에르트는 펜을 넘겼다. 이쯤 되니 그냥 결과값이 궁금했다. 리시스는 한참 펜 꼭지를 물고 웅, 웅 고민했다.
“음……. 안 풀리네요.”
“음……, 이건가?”
다른 문제와 달리 문제 뒷장에 답도 적혀 있지 않았다. 재미 삼아 시작했던 문제 앞에 두 사람은 진심이 되었다.
각자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답이 나오지 않으니 결국 머리를 맞대게 되었다. 누가 푸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게 되었다. 두 사람이 합심해서 고민해도 답은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델리안 난제를 푸십니까.”
책 정리를 하며 다가오던 허멀 후작이 슬쩍 들여다보더니 물었다.
“델리안 난제?”
“예, 비교적 최근에 발견된 난제입니다.”
“답은 찾았고?”
“예, 답은 나와 있습니다만 풀면 그것이 답이기 때문에 따로 적지 않게 되었다 합니다.”
그렇다면 답에서 거꾸로 문제 풀이 방법을 유추하는 식으로 접근할 수도 없다. 풀면 자연히 알게 되는 답. 어떤 방식으로든 풀기만 하면 그것이 답이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꼭 땅따먹기처럼 사람 마음을 슬슬 건드렸다. 두 사람의 눈은 조금 더 선명히 불탔다.
“허멀 후작은 풀었나?”
“저도 몇 년 전에 도전해 봤습니다만 실패했습니다.”
“다시 한번 해 보겠나? 지금 풀면 될지 혹시 아나.”
“……해 볼까요?”
허멀 후작도 열의를 보이며 달라붙었다. 두 사람이 풀어 놓은 부분에 이어 몇 가지의 방향으로 시도해 보았지만 답까지는 가지 못했다.
“저는 나이를 먹어서 머리가 예전만큼 안 구르는군요.”
허멀 후작은 가장 치사하고 확실한 핑계를 대며 물러났다. 허멀 후작보다 젊은 황제 부부는 물러날 길이 더욱 막혀버리고 말았다. 이제는 반강제로 문제의 답을 찾아내야 할 판이었다.
“여기서는 이걸 대입해 보면…….”
“아니, 아니지. 그럼 이 숫자가 비지 않나.”
“그렇네요, 아. 이건가? 어?”
해가 질 무렵이었다. 머리에서 김이 풀풀 날 정도로 집중한 끝이었다. 조금만 더 했다가는 머리가 터지겠다 싶을 무렵, 리시스가 힘들어서 저절로 굽던 허리를 곧추세웠다. 슬슬 저녁 석찬회의 핑계라도 대고 일어서려던 키에르트도 눈을 번쩍 떴다.
“이거 답 아니에요? 어? 맞죠?”
“엇……. 맞는 것 같은데. 잠깐.”
키에르트가 펜을 들고 리시스가 만든 숫자의 탑을 따라갔다. 방금 전 숫자와 공식을 막 배운 리시스의 공식은 깔끔하지는 않았다. 어린아이가 문제를 풀 듯 원시적으로 숫자를 누덕누덕 기웠다. 꼭 리시스가 짰던 전략 같았다. 키에르트 문제의 답을 찾다가 괜히 짠한 느낌에 휩싸였다. 어떻게든 답을 찾아보려고 발버둥 친 이 흔적이 전략을 세우는 데에서도 같았더라면.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쳤던 흔적이었던 건 아닐까.
“폐하?”
“아, 아아. 잠깐 생각 좀 하느라.”
“얼른 확인해 봐주세요.”
문제를 풀다 말고 리시스를 바라보는 데 정신을 팔았다. 자신이 찾은 답이 맞는지 빨리 확인하고 싶은 리시스가 동동거리며 재촉했다. 키에르트는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다시 문제를 들여다보았다. 체력과 집중력이 다 바닥이 나서 문제가 잘 보이지도 않았다. 형식적으로 숫자만 뜯어 맞추는 중, 손이 멈칫했다.
“……맞는데?”
“!”
정답이었다. 어떻게 숫자를 대입해도 동일한 답이 나왔다. 키에르트는 문제가 풀린 순간의 소름 돋는 감각에 리시스를 돌아보았다. 이 문제를 진짜 풀다니.
“꺄악!”
“오!”
숫자놀이, 그거 별것 아닌 줄 알았는데 전쟁에서 이긴 것만큼이나 신이 났다. 두 사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서로를 얼싸안고 뛰었다.
“풀었어요! 풀었어!”
“풀었어!”
“아무리 황제 폐하 내외분이셔도 도서관에서는 정숙을……, 푸셨습니까?”
소란스러운 두 사람 때문에 한 번 더 걸음 한 허멀 후작이 덩달아 놀랐다. 키에르트가 우리 애 1등 성적표 자랑하듯 문제 풀이를 한 종이를 내밀었다. 허멀 후작도 믿기지 않는 눈으로 답을 따라가더니 눈을 휘둥그레 떴다.
“푸셨네요? 누가 푸신 겁니까?”
“황후…….”
“둘이 같이!”
리시스가 풀어냈으니 리시스의 공이다. 그런데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공을 나누어 주었다. 키에르트가 리시스를 돌아보았다. 아직 서로를 품에 안은 채라 동글동글한 정수리가 내려다보였다. 금발이 유난히 반짝반짝 빛났다.
“둘이 같이 푼 것 맞잖아요. 그쵸?”
키에르트는 눈이 부셔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