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키 큰 남편 덕2021.09.16.
이튿날. 황후궁으로 박물관의 물건이 줄줄이 들어왔다. 처음에 그릇 몇 개, 테이블 몇 개가 들어올 때만 해도 앨린은 뿌듯하게 지켜보았다. 그러나 드레스의 행렬부터 표정이 차츰 창백해지기 시작하더니, 이어 옷장까지 들어오기 시작하자 덜 익은 사과처럼 파리해졌다.
“화, 황후 폐하, 제 기분 탓이 아니라면 박물관이 황후관으로 이전하는 중인 것 같은데요?”
“이전은 아니고 대여야.”
리시스는 앨린에게 사실 그대로 말해주었다. 하지만 스스로도 이전을 하는 기분이기는 했다. 그냥 그렇게 농담으로 지나갈 줄 알았는데 키에르트는 자신의 말을 그 자리에서 실천했다.
‘시간이 빠듯할 테니 지금부터 옮기지.’
문 앞의 시종에게 내리는 명을 들은 리시스는 기겁했다.
‘옮겨서 고르는 것도 번거로우니 지금 적당히 추려볼게요!’
필요 없다고 하자니 필요는 했다. 그러나 다 받자니 부담스러웠다. 적당히 받자. 스스로 세운 타협선이 그것이었다. 키에르트는 그 의견이 합당하다 여겼는지 허락했다. 리시스는 그날 밤이 새도록 드레스를 골라야 했다. 보이지 않게 속속들이 박혀 있는 드레스가 어찌나 많았는지, 돌아오는 길에는 나뭇잎조차 레이스로 보였다.
“그래도 당분간 입을 것 걱정은 덜 해도 돼서 한시름 놓았어. 이 정도로 예쁘면 유행이랑 상관없이 입을 수 있겠지?”
드레스 보는 눈 없는 리시스가 봐도 예쁜 것들로만 골랐다. 사람 눈 다 비슷하다. 유행이 아니어도 예쁘면 그만일 것이다.
“유, 유, 유행이 문제가 아닐 것 같아요, 황후 폐하…….”
“그럼 뭐가 문제야?”
“마, 마마, 만약에 레이스 한 조각이라도 흠집 나면 국가 보물 손괴죄에 황실 모독죄에…….”
“에이, 설마. 옷 하나 가지고.”
의미 있고 오래된, 진귀한 드레스라 하더라도 옷은 옷이다. 입으라고 만들어진 것이니 입다가 다소 흠이 생겨도 자연스러운 것 아닌가. 그러나 앨린은 리시스의 말에 기절하려 했다.
“이, 이것들은 그냥 드레스가 아니라 국보예요. 진짜 나라의 보물이란 말이에요, 폐하!”
“……진짜 보물이라고?”
그제야 리시스가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르는 시종들이 지극정성으로, 아기 보살피듯 섬세하게 다룬다 싶기는 했다. 하지만 드레스가 국보라니. ……진짜? 정말로? 아직 완전히 믿기지는 않아 눈빛이 미심쩍었다. 그 눈빛에 앨린이 펄펄 뛰었다.
“예! 하나하나 역사가 깊은 물건들이잖아요! 이건 기초 역사서에도 실리는 드레스들이라고요!”
쉬란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드레스였다. 앨린도 쉬란의 기초 교과서로 공부를 하고 자랐으니 당연히 보는 순간 알아볼 수 있었다. 실물을 볼일도 없는 것들인데 그것들이 황후의 일상복으로 쓰일 예정이라니. 감동할 일이었지만 양이 너무 많았다. 황후궁으로 몰려 들어오는 국보의 행렬은 가히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그걸 지켜보는 앨린은 기절 직전이었다. 앨린의 성화에 리시스는 드레스를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그 말을 들으니 괜히 더 번쩍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드레스만 보았을 때는 예쁘네, 화려하네, 정도로만 감상했다. 그런데 ‘국보’를 걸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려니 영 떠오르지를 않았다. 이거, 정말 괜찮은 거 맞나……? 하지만 이미 드레스들은 황후궁의 문을 넘어서고 있었다. 이제 와서 돌려보내는 것도 일이었다. 리시스는 에라 모르겠다 싶어 배를 째기로 했다.
“애초에 폐하가 빌려주신다 먼저 말했으니 그렇게 치사하게 따지시진 않을 거야. ……않겠지?”
……쨌던 배가 막 들어가는 드레스를 보고 다시 붙었다. 보석의 산처럼 보이는 드레스였다. 국보라는 것을 알게 되니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적어도 의미나 유래 정도는 알고 입어야 할 것 같았다. 앨린이 말한 기초 역사서라는 것부터 우선 봐야겠다.
“혹시 그 기초 역사서라는 거, 구할 수 있을까?”
“집에 아직 있을지 모르겠는데 찾아볼게요. 아! 황실 도서관에도 아마 있을 거예요.”
“황실 도서관?”
황궁에 익숙해지려면 아직 멀었다. 길을 잘못 잃으면 백골 사체로 발견될 수도 있을 만큼 드넓다 하니 천천히 하나하나 돌아다녀 보는 수밖에.
“네, 황실 도서관은 누구나 이용하실 수 있으니 한 번 가 보시면 어떨까요?”
“나도 들어갈 수 있어?”
“물론이죠. 사전 신청만 하면 된다고 들었어요.”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다. 책은 비싸고 귀한 물건이었다. 에드린에도 도서관은 있지만 극소수의 허가 받은 사람에게만 출입권이 주어졌다. 리시스에게는 당연히 출입권이 없었다. 그런데 그 귀한 책을 아무나 볼 수 있게 개방해 둔 도서관이라니. 쉬란의 황실은 인심이 후했다. 책은 없어서 못 읽었다. 어쩌다 누군가에게 빌리게 되면 마르고 닳도록 읽어 전부 외워버릴 정도였다. 리시스는 벌써부터 기대로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지금 당장 가도 될까?”
“어……, 저는 아주 어릴 때 한 번 가 보고 안 가봐서……. 시종에게 물어볼게요.”
“그래.”
리시스는 앨린이 물어보러 나간 사이 두 주먹으로 부푼 가슴을 눌렀다. 앨린은 금방 돌아왔다.
“황후 폐하시니 별도의 허가 없이 바로 이용 가능하시대요!”
“갈게! 뒷일을 부탁해!”
“앗. 저 혼자서요?”
리시스는 앨린에게 드레스 정리를 맡겨버리고 황후궁을 나섰다. 어차피 봐도 잘 모르는 드레스다. 자신은 그럴 시간에 기초부터 탄탄히, 책을 보며 공부라도 하는 쪽이 나았다. 룰루랄라 신이 나서 멀어지는 리시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그림자가 여럿이었다. 그들은 리시스의 모습이 황후궁에서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한참을 지켜보다 각자의 위치로 흩어졌다. ***
“황후 폐하께서 도서관으로 향하셨습니다.”
리시스의 행동이 즉시 보고된 곳 중 하나는 키에르트였다. 키에르트는 보고를 전해 온 밀정을 턱짓으로 내보냈다. 밀정은 들어올 때처럼 소리 없이 사라졌다. 키에르트는 들고 있던 펜 끝으로 책상을 톡 톡 건드렸다. 도서관은 문제 될 일 없는 곳이다. 황궁에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곳이니 황후 역시 이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행보가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다. 키에르트는 잠시 고민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적국의 공주, 감시대상이어도 쉬란의 황후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이 마음 편했다.
***
“와…….”
무의식적으로 감탄하던 리시스는 한 박자 늦게 합, 입을 다물었다. 요새 황궁 어딜 가든 와, 를 너무 남발하고 있던 것 같아서였다. 그래도 황후로서의 위엄이 있는데. 너무 놀라고 다니는 모양새는 좋지 않았다.
‘이제 놀라지 않을 거야!’
라고 각오한 것도 잠시. 겉으로 봐도 거대한 도서관은 안으로 들어서니 더욱 거대했다. 중앙 로비는 총 3층으로 이루어진 도서관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원형 돔이었다. 그 돔의 천장에는 색색의 유리가 기하학적 무늬를 이루어 햇빛을 이용한 천연 조명이 되었다. 그리고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긴 서가. 천장과 바닥을 제외한 모든 부분이 서가였다. 그 서가에는 온갖 책이 빽빽이 꽂혀 있었다. 책 특유의 쿰쿰하며 묵직한 냄새에 취할 지경이었다. 리시스는 다시 한번 멍하니 입을 벌리고 로비에서 사방을 돌아보았다.
“와…….”
놀라지 않겠다는 각오는 문을 넘어서면서 바로 까먹었다. 감탄하며 두리번거리는 리시스에게 사서로 보이는 한 여인이 다가왔다.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일단 그냥 한 번 둘러본 다음에 도움을 받고 싶은데. 그래도 되나?”
사서는 리시스를 알아보지 못하고 눈썹을 들어 올렸다.
“초면에 다짜고짜 반말부터 할 만큼 배울 걸 못 배운 아가씨께서 글은 읽을 줄 아십니까?”
단정하고 조용한 사람 같았는데 곧장 치고 들어온다. 리시스는 뜻밖의 공격에도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되물었다.
“황후는 황제 폐하를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하대를 하는 게 맞지 않나? 내가 배운 건 그랬는데.”
“……황후 폐하십니까?”
리시스의 되물음에 사서는 화들짝 놀랐다. 리시스의 정체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인지, 진심으로 놀라며 허둥지둥 예를 갖췄다.
“불충을 용서하소서. 늘 도서관에 처박혀 살다 보니 황후 폐하의 존안도 알아보지 못했나이다.”
“그럴 수도 있지. 일어나시게.”
리시스는 이 화려한 황궁에서 자신이 어찌 보이는지 잘 알았다. 옷차림도 수수하고, 시종과 호위도 입구에서 대기를 시키고 혼자 들어왔으니 황후로는 보이지 않았을 테다. 사실 황후의 행차라고 거하게 소문내고 다니는 것도 부담스러워 조용히 책만 보고 가려 했다.
“황후 폐하께서 어떻게 도서관까지 오셨습니까.”
“왜? 황후는 도서관에 안 와?”
“제국 역사상 도서관 건립 기념 행사 이래 처음으로 걸음하신 황후 폐하십니다.”
“왜? 선황후 폐하들은 책을 안 읽었어?”
“왜가 참 많으시군요. 이유를 찾는 것은 좋은 삶의 방식이지요.”
사서는 리시스의 질문 세례가 마음에 들었는지 잔잔한 미소로 차근차근 답해주었다.
“보통 평소에 읽는 책은 직접 구하시는 경우가 많지요. 그 외에 도서관에서 구해드릴 책이 있으면 황후궁으로 보내드리는 식으로 해 왔습니다. 직접 도서관에 귀한 걸음을 하시는 경우는 없었지요.”
“직접 오면 안 되는 건 아니지?”
“그럴 리가요. 황제 폐하께서도 종종 찾으십니다.”
“책 많이 읽으시는구나…….”
뜻밖의 사실까지 알아버렸다. 오늘 알고 싶던 정보는 아니라서 리시스는 그냥 그렇구나, 고개만 끄덕였다.
“나는 책 자체가 좋아. 그냥 구경하다가 구하려는 책을 못 찾겠으면 도움을 받아도 될까? 이름이…….”
“허멀 후작입니다.”
“허멀…… 후작? 후작 부인이 아니고?”
“쉬란은 여성도 작위를 이을 수 있습니다.”
에드린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커다란 꽃송이, 거대한 도서관, 그리고 작위 체계까지. 쉬란은 여러모로 놀라운 점이 많은 나라였다.
“그렇구나. 허멀 후작. 그럼 지금부터 좀 돌아볼게.”
“편히 둘러보십시오.”
허먼 후작은 배려하듯 책장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혼자 남은 리시스는 덕분에 천천히 마음껏 책을 구경할 수 있었다. 서가는 책을 분야별로 구분해서 설명도 달아놓았다. 굳이 허멀 후작을 부르지 않아도 혼자 알아서 찾을 수 있을 법했다.
“별 책이 다 있네…….”
황실 도서관이니 역사서나 황제들의 업적을 기록해 놓은 책만 가득할 줄 알았다. 그런데 온 세상의 책을 일단 다 모아놓았는지 생각지도 못한 책도 보였다. 예를 들어 ‘레이스 만들기’, ‘10가닥 머리 땋기 완전 공략!’ 같은 소소한 취미생활서부터 ‘이것만 알면 당신도 상단주!’, ‘성공하려면 상단 투자부터’ 같은 실용서까지. ‘쉬란의 지리적 특성’, ‘쉬란 100대 명문 모음’, ‘천문학의 이해’ 같은 학문서적도 제대로 갖춰져 있었다. 갑자기 어마어마하게 많은 책들을 접하니 오히려 고르기가 어려웠다. 원래 보려던 책이 뭐였는지조차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책을 만나는 것은 운명과 비슷하다 했다. 저 높은 곳, 손이 닿지 않는 책장에 꽂힌 책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원예학: 세상에서 가장 큰 꽃 피우기’
리시스는 낑낑 손을 뻗었다. 그러나 아무리 손을 뻗어도 책을 꺼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주변에 밟고 올라갈 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다리라도 빌려올까 했지만 그건 너무 번거로웠다. 리시스는 다시 한번 손을 뻗어 낑낑대 보았다.
“이건가?”
그런데 그때 뒤에서 뻗어 온 긴 팔이 리시스가 원하던 책을 우아하게 슥, 뽑았다. 리시스는 홀린 듯 뒤를 돌아보았다. 책을 든 키에르트가 리시스의 등 뒤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