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다 가져2021.09.12.
“예?”
제롬은 귀가 밝았다. 말귀도 척척 알아들었다. 그런 제롬이 요새 되묻는 일이 부쩍 늘었다. 요새 왜 그래? 하는 키에르트의 눈빛에 제롬은 황급히 대답했다.
“폐하께서는 입으시나 벗으시나 앞에서 보나 뒤에서 보나 훌륭한 남성이십니다!”
“…….”
“남성으로서도 손색없는 복장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 알겠어.”
제롬도 남자라서 의견이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뒤늦게 신경이 쓰여도 어쩔 수 없다. 갈아입고 가기엔 시간이 너무 늦었다. 마차 창문에 비친 모습을 살피다 보니 박물관 앞에 도착했다. 박물관 진입로에 발을 들이던 키에르트는 문득 화단 앞에 멈춰 섰다. 저번에 길가에서 리시스가 내내 시선을 줬던 꽃과 같은 종류의 꽃이었다. 평소에는 거기 있는지조차 모르던 꽃. 박물관 앞에 핀 꽃은 그 꽃보다 더 크게 피었다. 키에르트는 뚝 꽃가지를 꺾었다.
“폐하! 오늘도 먼저 오셨네요?”
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왔는데 리시스도 마침 도착했다. 멀리서 키에르트를 발견한 리시스가 깡총깡총 달려왔다. 저번에 소나기 때도 잘 뛰더니, 평소에도 잘 뛰었다. 저렇게 드레스를 입고 잘 뛰는 존재를 본 적이 없어서 볼수록 신기했다.
“시간 딱 맞게 마주쳐서 잘됐어요!”
다가온 리시스는 해맑게 웃으며 키에르트에게 인사를 올렸다. 화장기 없는 얼굴, 대충 질끈 묶은 머리, 더욱 단출해진 드레스. 데이트는 키에르트 혼자만의 헛물이었다. 리시스는 정말 박물관에 무슨 용건이 있어 찾은 것이었다. 그래도 그 용건은 얼마든지 변경할 수 있다. 키에르트는 꺾어들고 있던 꽃을 리시스에게 내밀었다.
“이건 무슨 꽃이에요?”
“그냥 꽃.”
생각이 나서, 라고 말하려 했다. 그런데 그 말이 뭐라고 목구멍에서 깔깔하게 걸려버렸다. 기침을 토하듯 목을 고르고 다시 입을 여니 전혀 딴판인 말이 튀어나왔다.
“어머. 꽃 받기 연습인가요?”
키에르트의 빈궁한 설명에도 리시스는 두 손을 모으며 활짝 웃었다. 그건 아닌데, 리시스가 그렇게 받아들이니 그냥 그렇다 치고 다시 꽃을 내밀었다. 리시스는 이번엔 달달 떨지도 않고 수줍게 두 손으로 꽃을 받아들었다.
“감사해요.”
리시스는 수줍은 듯 미소 지으며 꽃향기를 맡았다.
갑자기 꽃이 초라해 보였다. 다발도 아니고, 꽃 한 송이를 포장도 없이 덜렁. 다음번엔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꽃을 줘야지 안 되겠다.
“……폐하께서 직접 안내를 해 주실 줄은 몰랐어요. 많이 바쁘신 줄 알았는데.”
“아무리 바빠도 황후를 혼자 보낼 수 있나.”
데이트인 줄 알았다, 네가 도둑질할까 봐 감시하러 왔다. 둘 다 마음에 드는 답이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또 거짓말을 하게 됐다. 리시스는 모르는, 키에르트만의 거짓말이 늘었다. 리시스는 아무것도 모른 채 키에르트의 에스코트를 받아 박물관 안으로 들어갔다. 박물관은 아예 하나의 거대한 궁이었다. 그만큼 쉬란의 역사가 길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와…….”
리시스는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박물관 내부를 쭉 돌아보았다. 넓은 홀로 이루어진 박물관 내부에는 유리관 안에 들어간 전시품들이 빼곡했다.
“생각보다 크고 많아요. 뭐부터 봐야 하지.”
“편하게 봐.”
키에르트는 여기저기 쫄랑쫄랑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리시스의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리시스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박물관 안을 누볐다.
“의외로 무기류가 많네요?”
“아무래도 전쟁이 잦았으니까. 무기는 본인 체형에 맞게 써야 하니 물려주기도 그렇고 해서 다 여기에 보관하게 되었지.”
“아아…….”
리시스의 걸음이 한 물건 앞에 오래 멈췄다. 뭔가 하고 봤더니 검이었다. 아무래도 관심 있는 것에 더 시선이 갈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제니아드 3세 황제 폐하께서 사용하셨던 검이야.”
키에르트가 다가가 설명해 주었다.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박물관이 아니니 설명서가 따로 붙어 있지는 않았다.
“지금 써도 될 만큼 훌륭한 검이네요.”
“이 검으로 전쟁에서 많이 이기셨지.”
쉬란 사람이라면 감동으로 웅장한 기분에 휩싸일 순간이지만 그 전쟁의 상대 나라에서 온 리시스는 할 말이 없었다.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리시스의 싱거운 반응에 키에르트가 불쑥 물었다.
“거북하지 않나? 그대의 나라와 싸웠던 흔적들인데.”
“그래도 검은 정말 훌륭해요.”
리시스는 검에 빨려 들어갈 것처럼 유리에 바싹 붙었다. 검의 내력과 별개로 검 자체가 훌륭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건 줄 수가 없는데.”
“달라고 할 생각 없어요.”
“만약에 줘도, 그걸로 목 따서 도망치진 말고.”
“안 그래요. ……당장은. 여름 축제는 해야죠.”
두 사람은 동시에 픽 웃었다. 농담이되 농담이 아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웃을 수 있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으면서도 웃겼다.
“아, 그러고 보니 칼 보려고 온 게 아니었는데.”
축제 얘기를 하니 이제야 드레스며 보석 같은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 칼 옆에 화려한 드레스가 전시되어 있었다. 무슨 예식 같은 때에 입었을 법한 크고 화려한 드레스였다.
“가니시아 선황 폐하께서 즉위식 때 입으셨던 드레스군.”
“아, 즉위식 때. 그래서 이렇게 화려한 거구나. 평소엔 이렇게 안 입으셨겠죠?”
“비슷하지 않았을까?”
“…….”
쉬란은 화려한 부분에서 무서운 나라였다. 전쟁터에 익숙해서 화려함에 면역이 덜 하기도 했지만, 에드린 왕실과 비교해도 쉬란은 모든 것이 번쩍번쩍했다.
“쉬란은 진짜 화려한 걸 좋아하는 나라인가 봐요.”
“그대는 싫은가?”
“싫은 것까진 아니지만……. 익숙하지 않아서 신기해요.”
화려함과 아름다움이 싫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검을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건 줄 수 있어.”
“예?!”
넋을 놓고 바라보던 리시스는 키에르트가 불쑥 던진 말에 놀라 홱 돌아보았다.
“어차피 지금 입는 사람도 없는 옷인데 황후인 그대에게 못 줄 것도 없지.”
“저, 정말요?”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농담인지 구분이 되지를 않았다. 키에르트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런 걸로 뭘 거짓말을 하냐는 투였다. 진짜로 줄 생각인 것이다. 키에르트의 진심을 알아차린 리시스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아뇨, 갖고 싶어서 쳐다본 건 아니었는데……. 아, 그럼 다른 걸 혹시 빌릴 수 있을까요?”
“빌린다고?”
“네! 사실 오늘 박물관에 온 이유가……, 티파티때 쓸 물건들을 빌릴 수 있을까 해서였거든요.”
키에르트는 고개를 기울였다.
“예산안 올린 건?”
“그게……, 제가 생각해도 좀 말이 안 되는 액수인 것 같아서…….”
내 돈 아니라고 신나서 쓰긴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수였다. 그래서 고민 끝에 박물관을 떠올렸다. 선대 황후들이 쓰던 물건을 이어받아 쓰는 것 정도는 의미부여를 할 수 있다 했으니까.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말을 듣고 생각에 잠겼는지 대답이 없었다. 더욱 눈치를 보게 된 리시스는 주절주절 혼자 변명을 이었다.
“선대의 물건을 빌려 쓰면 쉬란의 정신을 잇는다는 의미도 될 수 있다고 하고요, 이게 급하게 준비해서 더 비싸게 드는 거라 폐하께서 곤란하실 수도 있고…….”
“안 곤란해.”
“진짜요?”
“전혀. 티파티 필요비용 정도는 우습지. 두 배로 써도 돼.”
아무리 리시스가 물정을 몰라도 허세 섞인 말이라는 건 알겠다. 하지만 키에르트가 모처럼 해 준 배려를 매몰차게 반박할 필요도 없었다. 리시스는 친절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생긋 웃었다.
“말씀만이라도 감사해요. 그런데, 저도 새 걸 부랴부랴 준비하는 것보다는 있는 걸 쓰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여기 있는 물건들 다 훌륭해 보이기도 하고.”
“그럼 골라봐.”
“네!”
키에르트의 허락도 떨어졌겠다, 리시스는 본격적으로 박물관의 물건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박물관의 방대한 소장품 중에는 리시스의 눈에 쏙 들어오는 것들도 많았다.
“이 찻잔 예쁘네요.”
“이벨라스 선황후께서 사용하시던 것이지.”
“이 카펫도 너무 예뻐요.”
“그건 벨린다 선황후께서 부부침실에 놓으셨던 거지. 이건 유명해. 역사상 아주 드물게 부부가 한 침실을 사용하셨었거든.”
“와……, 그럼 이건 꼭 빌려야겠네요. 폐하랑 제가 사이좋다는 걸 알릴 겸?”
그런 용도가 있다면 더욱 후하게 베풀 수 있다.
“아예 가져.”
키에르트의 배포에 리시스는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폐하 지금 기세로는 제가 여기 있는 거 다 달래도 주실 것 같아요.”
“어차피 처박아 놓는 물건인데 못 줄 것 없지. 기왕 고르는 거, 그대가 입을 드레스나 장신구도 골라 봐. 그것들도 급하게 마련하기엔 시간이 부족할 것 아닌가.”
새 드레스도 물론 맞춰야겠지만 당장 가까워지는 다른 행사들에 입을 것도 필요할 것이다. 오늘 입은 것 같은 드레스를 매번 입고 등장하는 것은 황실의 위신 문제다. 리시스는 스스로의 소박한 차림에 별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저번 만찬 때 사람들의 차림을 보니 개선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네, 그럼 골라볼게요.”
리시스는 드레스와 장신구들 사이를 누비며 살폈다. 하지만 평소에 드레스를 입던 사람이 아니라 선뜻 고르기가 어려웠다.
“이건 저한테 어울릴까요?”
“괜찮지 않을까?”
키에르트도 여자 드레스 보는 눈이 없는 건 마찬가지. 눈대중으로 드레스를 고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건 제가 입기엔 너무 색이 강하겠죠?”
“그대는 얼굴이 하얘서 무슨 색이든 다 잘 어울릴 것 같긴 한데…….”
아무래도 상상만으로는 결정하기가 어려웠다. 키에르트는 용단을 내렸다.
“일단 다 가져가 봐.”
“……예?”
“일단 황후궁에 다 옮겨다 놓고 하나씩 입어보고 괜찮은 것만 골라 놓으면 되지 않나.”
리시스는 키에르트가 가진 사고방식의 광대함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이거 하나만 내다 팔아도 기사단 하나가 한 달은 먹고 살 수 있을 것처럼 비싸 보이는데, 이걸 다 황후궁에 반출하라고? 하라고 해도 심장이 떨려서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이게 다 황후궁 옷장에 들어갈까요?”
황후궁은 지금 텅텅 비어 있지만 박물관의 물건은 그 황후궁을 채우고도 모자랄 만큼 많아 보였다. 괜한 걱정이라는 걸 알아도, 자신이 이걸 다 빌려가는 것은 부담스럽다는 표현을 에둘러 말한 것이었는데……. 키에르트는 그런 걱정 따위는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럼 옷장도 가져가. 새로 사든지.”
아, 그렇지. 옷장이 부족하면 옷장을 장만하면 되지. 너무 상식적인 대답에 리시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키에르트다운 정석의 답변 그대로였다. 괜히 저 정석이 어디까지 유지될까 궁금해졌다. 전쟁 중에도 키에르트의 저 성격은 그대로 드러났다. 리시스가 예측불허의 변칙으로 가득한 작전으로 찔러 들어간다면, 키에르트는 너무 정석적이라 방어할 방법을 떠올릴 수도 없는 작전을 종종 썼다.
“황후궁에 옷장을 넣을 방이 부족해지면 어떡해요?”
리시스의 장난기어린 도전에 키에르트는…….
“황후궁을 증축하면 되지.”
어김없이 정공법으로 답했다. 방어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 정공법인 것은 여전했다. 리시스는 더 이상 장난을 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