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남자로서는?2021.09.09.
앨린은 심각한 얼굴로 황후궁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녔다. 티파티를 연다는 것은 단순히 정원에 테이블 의자만 가져다 놓고 차를 홀짝이는 것이 아니었다. 티파티를 여는 사람의 취향, 재력, 미적 감각을 모두 자랑하는 동시에 평가받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황후궁의 인테리어, 정원의 조경, 가구, 찻잎의 종류, 다구, 코스터 레이스까지. 모든 것을 신경 써야 했다.
“어때? 견적이 나와?”
“……황후 폐하.”
이전에 견적을 냈던 것은 딱 ‘티파티’에 드는 것들만이었다. 하지만 이제 돈 걱정 할 필요가 없게 되었으니 본격적으로 해 보자며 나섰는데……, 그제야 큰 문제를 발견했다.
“인테리어, 조경, 가구, 그릇, 모두 훌륭한데요……, 이거 다 못 쓰는 것들이에요.”
“뭐? 왜?”
리시스는 쉬란에 맨몸으로 왔다. 가지고 있던 물건들은 황후가 쓰기에는 너무 자질구레해서 모두 버려야 했다. 에드린 왕실에서 따로 챙겨 보낸 것도 없었으니 그냥 몸만 들어와 살아야 했다. 리시스가 들어왔을 때 황후궁엔 이미 모든 것이 갖춰져 있었다. 선대 황후가 승하한 후 황후궁은 줄곧 주인이 없었다. 그래서 새로운 주인을 맞아 단장을 해 놓은 것인 줄로만 알았다.
“이거 보세요.”
앨린이 태피스트리의 뒷면 구석에 새겨진 문양을 보여주었다.
“이게 뭔데?”
“렌데일 공작가의 문양요.”
앨린은 한숨을 내쉬며 다른 물건들에서도 렌데일 공작가의 문양을 찾아냈다. 양탄자에도, 소파에도, 컵 하나까지도 렌데일 공작가의 문양이 없는 곳이 없었다. 이제 보니 황후궁 전체가 렌데일 공작가의 문양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리시스는 세니아의 다소곳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이렇게나 황후가 될 준비를 하고 있던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태도였다.
“차라리 선대 황후께서 사용하시던 물건들이면 승계한다는 의미라도 둘 수 있는데, 이건…….”
티파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리시스도 이건 아니라는 건 알겠다. 알고 쓰면 보잘것없는 황후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고, 모르고 쓰면 이런 걸 알아보지도 못하는 멍청이 황후가 되어버린다.
“이제부터라도 새로 준비를 시작하면?”
“……그러려면 티파티는 내년에 하셔야 할 걸요.”
“그렇게 오래 걸려?”
“그릇 한두 개 사는 것이 아니니까요…….”
앨린은 우는 소리를 하며 고개를 축 늘어뜨렸다.
“좋은 물건은 예약해서 사거나 따로 주문을 넣어야 하는데, 지금 주문을 넣는다 하더라도 한참 기다려야 할 거예요. 더구나 품목이 많으니 하나하나 주문 넣는다 하더라도 제작기간이 있을 테고요.”
“으으음…….”
시작부터 난항이었다. 대충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고.
“일단 금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들부터 짜 보자.”
“폐하, 혹시…… 그 ‘금전’의 범위가 어느 정도일지 알 수 있을까요?”
앨린이 문득 떠오른 것이 있는지 물어왔다.
“그건 모르겠는데.”
키에르트는 지원을 약속했지 지원의 한도까지는 정해주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적당히 알아서 해야 하겠지만, 경험이 없으니 그 적당선도 모른다.
“일단 적어 내면 되는 만큼 주지 않을까?”
“그으래요오……?”
앨린이 갑자기 눈을 빛냈다.
“왜, 왜?”
“돈만 되면 웬만한 건 해결할 수 있을 수도 있어요.”
“……정말이야?”
“저도 안 해봐서 확신은 할 수 없지만요.”
그러나 앨린은 이미 확신에 차 있었다. 확실히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건 거의 없다. 무기도 돈 들이면 더 좋고 빠르게 만들어 낼 수 있다. 장인이 만든다는 공통점이 있으니 그릇도 마찬가지겠지.
“좋아, 최대한 비싸게 잡아보자.”
글씨 쓰는 데 들어가는 돈은 없다. 까이면 까이는 대로 다시 쓰면 되지. 리시스의 허락이 떨어지자 앨린은 신이 나서 펜을 굴리기 시작했다.
“그럼, 우선 꽃은 로렐리안에 연락해보고, 커튼 매듭은 소류엘, 리스는…….”
앨린은 그동안 마음속으로만 그려 보았던 꿈의 리스트를 현실에서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걸 어느 정도 현실적으로 자제시켜줄 사람이 필요했지만 리시스는 그럴 수가 없었다. 뭘 알아야 자제를 시키든 말든 하지. 다만 곁에서 입을 벌리며 놀라는 건 했다.
“와……, 내가 살면서 처음 본 단위 수야.”
“저도 평생 처음 써 본 단위 수예요, 황후 폐하.”
“……0 하나 빼도 될까?”
“그럼 전혀 다른 예산안이 되는데요.”
자신의 티파티를 여는데 황제에게 돈을 받는 것부터가 양심 없는 짓이었다. 이제 와서 굳이 양심을 챙길 필요가 있을까? 그래도 사람이 적당선이라는 게 있어야지! 두 마음이 정신없이 싸워댔다.
“아!”
그때 리시스가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
“어느 쪽이지.”
“둘 다였습니다. 로구안, 에드린. 양쪽의 첩자가 모두 잠입을 시도했습니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바다. 키에르트는 차게 웃었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로구안은 정략결혼으로 만들어 낸 평화를 의심하며 궁내 사정을 염탐하려 했다. 에드린 역시 쉬란을 완전한 우방으로 생각하지 않고 첩자를 보냈다. 언제나 첩자는 기어들어왔다. 리시스와의 결혼 이후로도 바뀌지 않았다. 키에르트는 손가락 끝으로 테이블을 톡톡 건드렸다. 생각보다 위태로운 결혼이 되어버렸다. 국혼 여부와 관계없이 물밑전쟁을 계속하는 에드린. 그리고 황후로서 열심히 해 보겠다고 의지를 불태우는 리시스. 어느 쪽에 더 집중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황후 폐하께서 보내셨습니다.”
“황후가?”
키에르트는 제롬이 내민 봉투를 받아들었다. 봉투 속에 담긴 두툼한 서류의 첫 장은 깨알 같은 숫자였다. 숫자의 내역을 읽는 순간 키에르트는 아, 하고 기억해냈다. 티파티에 필요한 경비 내역서였다. 이쪽은 이쪽대로 참 열심이다. 아직 의도를 전부 믿을 수는 없지만 리시스가 황후로서 잘 지내준다면야 키에르트로서는 고마운 일이었다. 어차피 필요 비용을 대주기로 약속했다. 내역을 세세히 읽을 필요도 없어 맨 뒷장으로 넘겨 총 액수만 대충 확인했다. 그래봤자 파티 한 번 하는 액수다. 전쟁 비용에 비하면 턱도 없이 적을…….
“……혹시 에드린은 우리와 다른 숫자를 쓰나?”
키에르트는 굉장한 단위 수의 숫자에 눈을 의심하며 글자를 다시 읽었다. 두 번, 세 번 다시 봐도 숫자는 그대로였다.
“아니요, 같은 숫자를 쓰고, 같은 십진법도 쓴다고 들었습니다.”
제롬이 의아해하면서도 대답했다. 키에르트도 몰라서 물어본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본 숫자가 믿기지 않아서 확인 한번 했을 뿐이다. 혹시 전쟁 관련 서류와 바뀐 것 아닌가 싶어 내역까지 읽었다. 티파티에 필요한 비용 청구 서류가 맞았다. 키에르트도 귀부인의 티파티에 눈이 어둡긴 마찬가지였다. 봐도 이게 뭔지, 뭐에 필요한 건지, 왜 이만큼 비싼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쉬란을 파산시키려는 작전인가?’
에드린이 보내온 첩자의 동향까지 겹치니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역사상 사치로 나라를 휘청하게 한 황후가 없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키에르트가 파산을 하기는 어려웠다. 놀라운 액수이긴 했지만, 그는 그보다 더 놀라운 부자였다. 어디, 해 볼 테면 해 보고. 약간의 승부욕마저 생겼다. 키에르트는 과감하게 결재란에 서명을 했다.
“음?”
펜이 떨어진 곳 바로 옆에 작은 한 줄 메모가 있었다. 숫자를 쓴 것과는 다른, 귀엽고 동글동글한 필체였다. 『청이 하나 더 있는데요……, 황실 박물관 구경해도 될까요?』
“박물관……?”
키에르트는 전혀 생각지 못한 문구에 고개를 기울였다. 터무니없는 비용 청구보다 이쪽이 더 이상했다. 황실 박물관이 있기는 했다. 정확히는 박물관이라기보다 보관 창고 같은 곳이었다. 선대가 쓰던 물건을 버리거나 팔 수는 없으니 한데 모아 놓고 박물관이라고 이름을 붙였을 뿐이다. 키에르트도 아주 어렸을 때, 후계 교육을 위해 몇 번 구경을 했을 뿐 평소에는 발길조차 돌릴 일 없는 곳이었다. 리시스가 황실 박물관은 어떻게 알았고, 또 왜 가려 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도통 이유가 연결되지 않았다.
“박물관을 왜 가려고 하지?”
“보통 학구적 의도든가, 데이트 아닙니까?”
키에르트의 혼잣말을 질문으로 잘못 들은 제롬이 성실하게 답변했다.
“……데이, 트?”
문화재 절도인가, 단순 호기심인가를 고민하던 중이었다. 데이트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예,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단골 데이트 코스 아닙니까. 같이 감상하니 할 얘기도 생기고 시끄럽지 않으니 대화 나누기도 좋고. ……그런데 황후 폐하께서 박물관 얘기를 꺼내셨습니까?”
“구경해도 되냐고 묻는군.”
“……보물 빼돌려다 파시려는 것 아닙니까?”
역시 사람 생각은 다 비슷했다. 하지만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해도 시종장인 제롬은 하면 안 되었다. 리시스는 이제 쉬란의 황후다. 까도 황제인 자신만 깔 수 있었다.
“무엄하다.”
“실언이었습니다. ……송구하옵니다.”
제롬이 얼른 눈치 빠르게 사죄했다. 하지만 머릿속에 담긴 생각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리시스의 몸에 에드린의 피가 흐르는 이상. 제롬의 설레발에 키에르트의 머릿속도 정리가 되었다. 리시스가 쉬란 출신이었다면 이런 고민을 하지도 않았겠지. 박물관 하나 보는 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쉬란의 황후라는 걸 머리로는 생각했지만 역시 자신도 아직 리시스를 에드린의 공주로 보고 있었다. 이런 자신의 답답한 사고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키에르트는 거칠게 답장을 적었다. *** 황실 박물관 관람 승인은 쉬웠다. 그냥 허락 한 마디면 됐다. 어차피 아무도 쓰지 않고 관심도 없는 오래된 물건들이다. 황실의 물건이니 사실 훔쳐봤자 갖다 팔지도 못한다. 문화재 약탈의 느낌으로 가져간다 하더라도 쉬란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어쩔 것인가. 그걸 리시스가 모를 리도 없다. 그럼 왜 박물관을 보겠다는 것이지? 혼자 고민해 보았자 질문은 도돌이표를 찍을 뿐이었다. 결국 키에르트는 호기심 반, 리시스의 조금 더 분명한 입장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 반으로 직접 안내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황실 박물관은 키에르트도 오랜만이었다. 평소에 다니지 않던 길로 걸으니 기분도 새로웠다. 평소보다 조금 들뜨는 느낌이랄까. 꼭 데이트에 나서는 것 같았다.
‘……데이트……?’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여겨 듣고도 그냥 지나갔던 제롬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그래,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둘이 잘 지내는 모습을 보여주기로 했지 않은가. 리시스가 먼저 핑계 삼아 제안한 것일 수도 있다.
“제롬. 오늘 내 복장 어떤가.”
“완벽하십니다. 황제 폐하로서의 위엄과 자애로움, 자유로움과 고전적 엄숙함이 모두 느껴지옵니다.”
제롬의 칭찬은 언제나처럼 구체적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부족했다.
“남자로서는?”
“예?”
“남자로서는 괜찮아 보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