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무감정한 남자의 웃음2021.09.02.
“폐하는 감정이 없어요?”
감정이 없지 않고서야 저럴 수는 없다. 세니아와 결혼 약속만 하고 얼굴도 안 본 남남으로 지낸 것도 아니고, 공적인 업무까지 분담해 하고 있던 사람인데도 저렇게 선을 긋다니. 나누는 말 한마디 없이 오며가며 얼굴만 익힌 병사도 부상 당했다는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이 사람이다. 하물며 태어난 순간부터 결혼하기로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조금 더 각별한 감정이 있어야 정상 아닐까?
“갑자기?”
“머리로만 생각하고 사시는 게 신기해서 그래요.”
“나쁜 건가?”
그렇게 물어보면 또 말문이 막힌다.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상하기는 했다.
“그럼 폐하는 남들보다 감정이 덜 격렬하신 걸까요?”
“글쎄, 특별히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음, 그럼 최근에 느꼈던 가장 강렬한 감정은 뭐였어요?”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질문에 눈썹을 모았다. 별것 아닌 질문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또 대답하려니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음…….”
그렇게 오래 고민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없다는 소리다. 이 몇 달간,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나. 박 터지게 전투를 벌인 적도 있고, 둘 중 하나가 전쟁에서 진짜로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 로구안의 위협에 극적으로 협상을 타결하고,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결혼식을 진행했다. 그리고 험난했던 첫날밤까지. 리시스에겐 아직까지도 정신이 얼얼할 정도로 휘몰아쳤던 나날이었다. 무슨 사건이 한 번씩 터질 때마다 심장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력질주를 했다. 그런데 그것들을 같이 겪었으면서 기억에 남을 만한 감정이 없다고? 그때 키에르트가 겨우 하나를 떠올렸다.
“아, 데미스 전투에서 그대의 작전에 넘어가 등에 활을 맞을 뻔했을 때, 황당하면서 스스로에게 열이 받았던 기억이 나는군. 그땐 정말 어떻게든 해 버리고 싶을 만큼 화가 났어.”
“…….”
대체 얼마나 옛날까지 거슬러 올라간 거야. 데미스 전투면 두 사람이 전쟁터에서 처음 만났던 때였다. 벌써 몇 년이나 된 일인데, 그걸 떠올리다니.
“그것보다 최근을 생각하면, 그대가 춤을 못 추는 것이 충격적이어서 놀랐던 것?”
“됐어요.”
리시스는 더 캐묻는 대신 그냥 결론을 내려버렸다. 키에르트는 만사를 이성적으로 판단한다. 리시스의 입장에서는 잘된 일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리시스와의 합의를 우선시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행동할 테니, 자신의 위치도 안정적이게 될 것이다. 황제를 무슨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는 아군으로 두게 되는 것이니까. 세니아를 마주쳐 흔들렸던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서 한결 가볍게 본론을 꺼낼 수 있었다.
“여름축제 말인데요. 시녀에게 얘기를 들었는데, 여름축제는 대대로 황후가 주관해 왔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이제 제가 맡는 게 맞죠?”
아까 세니아와 담판을 짓기는 했지만 키에르트와도 확실히 해 두어야 했다.
“응. 어차피 오늘 세니아에게도 그 얘기를 할 예정이었고.”
“제가 만약에 안 한다고 했으면 계속 세니아 양이 맡게 됐을까요?”
“아마 그렇지 않을까. 황후 자리의 공석을 줄곧 채우고 있었으니, 가장 적임자지.”
하루 이틀 맡은 일이 아니란 소리였다. 그 말에 문득 궁금해졌다. 보통은 황위에 오르면 바로 결혼을 해서 후계자부터 만드는 게 일반적이었다. 전쟁터를 오가던 키에르트라면 더욱 서둘러야 옳았다.
“그런데 왜 황제로 즉위를 한 뒤에 바로 결혼을 안 하셨어요?”
“이래저래 조건이 안 맞기도 하고……. 굳이 급한가 싶더군.”
“태어나기 전부터 내정되어 있었다면서요?”
“그래도 현실적으로 조율하다 보면 다른 부분이 걸리기 마련이니.”
어떤 조율을 몇 년이나 질질 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걸 보면 인연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 모양이다.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끝날 줄 알았던 키에르트와 리시스의 관계가 결혼으로 이어진 걸 보면 말이다.
“그런데……, 여름축제에 대한 권한은 전적으로 황후 거 맞나요?”
“그렇지.”
“그럼 축제내용을 제가 임의대로 조정해도 돼요?”
“황후의 재량에 맡기지.”
키에르트는 정말 하나도 간섭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 사람이 그런다면 정말 그럴 것이다.
“그러다 사실 에드린이 다 이긴 거고 쉬란은 망했다, 이렇게 만들면 어쩌시려고…….”
“그럴 건가?”
“아뇨. 지금은 쉬란의 황후인데 제가 왜 손해 보는 짓을 해요.”
에드린의 병사들과 함께 싸웠고, 쉬란이 적이었던 것은 맞지만 이젠 쉬란의 황후가 되었다. 쉬란에 살면서 굳이 쉬란을 헐뜯는 짓을 할 필요는 없다. 게다가 축제는 즐거워지려고 하는 것 아닌가. 즐거움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살짝만 손댈 생각이다. 살짝만.
“……가능하면 중간중간 얘기를 해 주면 고맙겠군.”
키에르트가 슬쩍 말을 추가했다. 그의 철저한 이성으로 판단하건대, 리시스에게 몽땅 맡겨버리면 또 상상초월의 무언가가 튀어나올 수가 있었다. 이건 괜한 노파심이 아니었다.
“가능하면요. 아, 그래서 하나 더 말씀드릴 게 있는데……. 생각보다 축제를 위한 사전 준비가 많이 필요하더라고요.”
“음.”
“그거 다 경비처리 되는 것 맞죠?”
“축제 준비를 위한 것이면 물론이지.”
“듣고 보니까 축제 준비에는 인맥도 필요하고, 그 인맥을 위해서는 폐하가 말씀하셨던 이런저런 모임들을 해야겠더라고요.”
사실 티파티든 뭐든 귀찮아서 안 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축제의 내용을 뒤집어 놓고, 황후로서 제대로 주관하기 위해서는 거쳐 가야 하는 과정이었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기초 체력 훈련부터 탄탄히 해야 했다. 귀찮고 피하고 싶은 고단한 일이지만 패배보다는 나았다.
“그것들도 다 경비처리 되는 것 맞죠?”
“내기로 결정하려 했던 일을 알아서 해 준다는데 당연히 그리해야지.”
키에르트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세세한 속사정 이야기가 오가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면 부드럽게 결론이 도출되었다. 그러는 동안 두 사람의 걸음은 정원 깊숙한 곳까지 이동해 있었다.
“결론이 났으니 굳이 꽃활 내기는 안 해도 되겠네요.”
“그렇군.”
리시스가 알아서 맡아주기로 했으니 키에르트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꽃활도 순전히 운에 맡겨야 하는 놀이라 리시스를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 고민 중이었는데 이렇게 알아서 태세를 바꾸어 줘서 다행이었다.
“그런데 왜 생각이 바뀌었지?”
하기 싫어서 사색이 될 정도였으면서. 여름축제는 물론 시키지도 않은 티파티까지 하겠다고 나서는 것이 의아했다.
“폐하, 의외시겠지만 저는 전쟁을 싫어해요.”
정말 의외이긴 했다. 키에르트는 눈썹을 들어 올려 놀라움을 표시했다.
“하지만 가만히 당하고 사는 건 더 싫어요. 그래서 싸우기로 마음먹었어요.”
리시스의 눈이 패배를 모르는 듯 맑게 빛났다.
“그대의 승리를 응원하지.”
살아생전 리시스의 승리를 응원하는 날이 오게 될 줄은 몰랐다.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응원에 더할 나위 없이 든든한 아군을 얻은 듯 활짝 웃었다.
“그럼 전 이만 황후궁으로 돌아가 볼게요.”
용건을 마친 리시스는 깔끔하게 작별을 고했다. 키에르트가 더 잡을 이유도, 방법도 없었다.
“꽃활…….”
꽃활 내기를 하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쉬웠다. 멀어가는 리시스의 뒷모습을, 키에르트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차피 오늘 일정은 꽤 한참 비워 놓았다. 모처럼 비는 시간이 생겼다. 혼자서라도 꽃활 놀이를 할까, 그쪽으로 발을 돌리던 키에르트는 다급히 돌아오는 리시스의 발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길 좀 알려주세요.”
의기양양하게 혼자 가버리더니. 웃음이 나왔지만 겉으로 터져 나오지는 않았다.
“여기서 왼쪽 길을 따라 백 보 정도 가다가, 갈림길에서 오른쪽. 두 번째 갈림길에서 왼쪽, 그다음에서 가운데. 노란 꽃이 잔뜩 핀 건물을 끼고 반 바퀴 돌아 큰 길이 나오면 거기서 직진하다가…….”
“두 번째 갈림길부터 뭐라고요?”
1+1을 물어봤더니 우주의 진리가 답으로 돌아왔다는 표정이다.
“왼쪽, 그다음에서 가운데. 노란 꽃이 잔뜩 핀 건물을 끼고 반 바퀴 돌아 큰 길이 나오면 거기서 직진하다가.”
“……일부러 이러시는 거죠?”
“내가 뭐 하러.”
흔들림 없는 키에르트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리시스는 추궁을 포기했다. 여기서는 키에르트에게 매달려 갈 수밖에 없었다.
“입구까지 데려다줄게. 가는 길에 꽃활 한 번 하고 가도 좋고.”
“길만 알려주시면 혼자 가도 되는데…….”
“복잡해.”
키에르트는 단호하게 말하며 다시 한번 팔을 디밀었다. 리시스는 어쩔 수 없이 그 팔에 손을 올려야 했다.
“왜 시종과 호위를 물린 거야.”
“귀찮아서요. 여긴 어차피 안전하다고도 했고.”
“그래도 길을 모르면 위험할 수 있어.”
“어차피 궁 안이니 헤매봤자 궁 안이겠죠.”
“그렇게 객기 부리다 백골 사체로 발견되지.”
“설마요.”
웬일로 키에르트가 농담을 다 했다. 리시스는 까르륵 웃었다.
“…….”
그러나 키에르트는 웃음기 없는 눈으로 돌아보았다. 리시스의 웃음기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궁의 어마어마한 크기를 생각해 보니 전혀 불가능할 것 같은 일도 아니었다.
“……진짜요?”
“그래서 길을 잘 아는 시종들을 제외하고 웬만하면 근무지를 지키게 하고 있지.”
하긴, 황후궁에서 여기까지도 마차로 이동했다. 에드린의 궁들은 성의 형태가 많았다. 산악지대가 많은 탓도 있지만 잦은 내란과 전쟁 때문에 좁고 높게 솟았다. 그래서 길을 잃어봤자 건물 안이었다. 쉬란의 황궁은 정반대였다. 건물 높이가 낮은 대신 건물 사이가 띄엄띄엄했다. 건물에서 건물까지의 거리도 상당했고, 궁벽은 보이지도 않았다. 전체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왜 이렇게 궁이 큰 거예요?”
“역사가 오래돼서. 증축을 하다 보니 그리된 것도 있고……, 보안을 위해서 그런 것도 있지.”
“보안요?”
“음, 하도 암살 시도가 잦아서. 황족의 위치를 알기 어렵게 하려고 일부러 넓게 지은 것도 있지.”
리시스는 눈썹을 들어올렸다. 역시 황제 암살은 쉬운 일이 아니구나. 기회가 있을 때 했어야 했나……. 그때 예끼, 야단을 치듯 하늘이 쿠르릉 낮게 울었다.
“어, 비가 오려나 봐요!”
“소나기 같은데. 일단 피했다 가지.”
마침 가까운 곳에 작은 건물이 있었다. 건물로 발길을 돌리는데 꽈르릉, 하늘이 소리를 질렀다. 동시에 굵은 빗줄기가 내리꽂혔다.
“꺅!”
순식간에 온몸이 젖을 정도로 거센 빗줄기였다. 리시스는 드레스를 움켜쥐고 뛰었다. 어찌나 빠른지 키에르트가 경악하며 돌아볼 정도였다. 그러나 뛴 것이 무색하게, 건물 안에 들어갔을 때 이미 두 사람은 쫄딱 젖어버렸다.
“으으.”
몇 벌 되지도 않는 드레스가 그 짧은 사이에 넝마가 됐다. 다시 입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머리도 장마철 이끼처럼 이마에 철퍽 달라붙었다. 리시스는 우선 머리카락과 드레스를 비틀어 짜 물기를 털었다. 하지만 흠뻑 젖은 몸이 그런다고 마르지는 않았다. 키에르트도 젖은 외투를 벗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외투 덕분인지 키에르트의 셔츠는 깃과 앞섶이 조금만 젖었다.
“꽤 한참 내릴 것 같은데.”
키에르트가 창문 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쫄딱 젖어버린 두 사람은 당황한 눈빛을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