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협상과 이혼2021.08.29.
“계산해 볼까요?”
“해 봐. 대충이라도.”
“그럼……, 해보겠습니다.”
앨린은 본격적으로 종이와 펜을 가져와 계산을 시작했다.
“찻잎과 음식 비용은 기본으로 잡고, 테이블과 의자에 두를 직물 디자이너의 인건비, 재료비, 꽃 비용, 꽃 배송료, 꽃 디자인 비용에, 당일 와서 꽃을 세팅할 디자이너 인건비…….”
“잠깐, 잠깐. 그걸 원래 다 그렇게 따로 계산해? 왜 그렇게 많아?”
리시스는 평생 들어보지도 못한 항목들이다. 물론 전쟁터에서 티파티를 하고 앉았을 수 없으니 티파티 자체도 처음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항목이 너무 많았다. 꽃은 그냥 꽃 담당하는 사람이 알아서 사다 꽂으면 그만 아닌가? 디자인 비용은 왜 따로 들여야 하는 건데? 리시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이제 시작인데요.”
“……일단 끝까지 들어는 볼게.”
“네, 도자기의 경우는…….”
끝까지 듣고 난 뒤의 결론은 하나였다. 돈이 엄청나게 들었다.
“이 정도면 엄청난 것까진 아닌데요…….”
쉬란의 귀족들의 기준으로는 엄청나지 않고, 리시스의 기준으로는 엄청났다. 티파티 한 번에 들어가는 비용이 무려 병사 천 명의 한 달 식비에 육박했다. 고작 차 한 잔 마시고 과자 부스러기 조금 주워 먹으며 수다 떠는 데 이만한 비용은 사치였다. 그렇다고 돈을 안 들일 수도 없었다. 앨린이 내 준 계산이 평균이라 치면 황후가 여는 첫 티파티를 그것보다 소박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럴거면 안 하느니만 못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으니……. 리시스는 돈이 없었다. 전쟁도 예산이 제일 문제였는데 파티도 다를 바가 없었다. 에드린 왕은 짠돌이였다. 본인에게 들이는 돈은 얼마가 됐든 펑펑 써대면서 다른 곳에는, 그것이 설령 나라를 위한 일이어도 아까워했다. 그런 사람이니 국혼에도 최대한 돈을 아끼려 들었다. 결과적으로 리시스의 손에 들린 여유 자금은 한 푼도 없었다. 국혼에 드는 비용은 쉬란이 부담했다. 공주를 쉬란이 가져가는 것으로 쳤기 때문이다. 생활비도 황후 앞으로 나오는 쉬란의 예산이다. 식비나 생활 유지비용이 여기에 포함되었다. 하지만 리시스가 개인으로 사용할 수 있는 용돈은 없었다. 보통 황후는 명문가의 영애가 된다. 용돈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또는 만에 하나 가난한 가문의 황후가 나왔다 하더라도 황제가 선물로 이것저것 하사해 주어 문제가 없었다. 리시스는 현금화 할 수 있는 선물을 받지 않았다. 이것도 결혼 전 협의된 부분이었다. 물론 그 협의에 리시스는 끼지도 못했다.
“이것도 비용 처리 될까?”
리시스는 고민 끝에 물었다. 그러나 앨린도 궁내 사정에는 어두웠다.
“확인해 보시면 어떨까요?”
물어보는 건 돈이 안 든다. 밑져야 본전이다. 어차피 키에르트와 곧 약속이 있으니 따로 찾아가는 수고를 할 필요도 없다. 마침 시종이 와서 시간을 알렸다.
“황후 폐하, 수국 정원으로 출발하실 시각입니다.”
*** 수국 정원은 한참을 가야 했다. 황후궁에서부터 마차를 타고 이동하고 길이 좁아지자 직접 걸어야 했다. 걸어서도 한참이었다. 지난 밤, 키에르트가 왜 당장 가자고 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될 만한 거리였다. 정원으로 가는 길에도 꽃들이 만발했다. 가는 길목이 지루하지는 않았다. 꽃은 봐도 봐도 좋았다. 리시스는 중간중간 멈춰서서 꽃향기를 맡고, 구경하며 천천히 걸었다.
“이쪽입니다, 폐하.”
그러나 앞서 길 안내를 하는 시종과 뒤따르는 호위들은 마음이 급한 모양이었다. 몇 번의 재촉을 들은 리시스는 급기야 신경질이 나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약속장소까지는 먼가?”
“멀진 않습니다만 길이 복잡합니다.”
“이 안은 위험해?”
“경비병이 늘 주변을 둘러싸고 있어 위험하지는 않습니다.”
“그럼 나 혼자 찾아가 볼게.”
“하지만 폐하께서…….”
리시스는 자신 있게 흐흥, 웃었다.
“폐하는 내가 늦는 거로 뭐라고 안 하실 거야.”
이것이 바로 총애에서 오는 권력인가. 꽤나 달콤했다. 사랑이 아니라 계약이지만 내막을 모르는 다른 사람들 눈엔 총애를 받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리시스의 자신감 넘치는 확신에 시종은 고분고분 절을 올리고 돌아섰다. 리시스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꽃 구경을 하며 발 가는 대로 걸었다.
“어라? 뭔가 잘못 온 것 같은데…….”
너무 내키는 대로 막 걸은 탓일까. 정원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연결된 다른 정원으로 넘어와 버린 것 같았다. 잔잔한 수국 대신 화려한 장미로 이루어진 정원이었다. 더 헤매다 보면 뭐든 나오겠지, 중요한 군사 회의도 아니다. 리시스는 느긋하게 산책하듯 정원을 헤매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저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혹시 키에르트일까 가까이 다가가 보는데, 그쪽에서 먼저 물어왔다.
“폐하?”
“어?”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리시스의 놀란 목소리에 그쪽도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다가왔다. 왜. 하필. 꼭. 달갑지 않은 사람은 우연히 만날 확률이 높을까. 리시스는 맞은편에 선 세니아를 마주 보며 보이지 않는 한숨을 내쉬었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우연히 이런 곳에서 만날 수도 있네요.”
“그러게 말이야. 여기는……, 황제 폐하의 전용 공간이라 들었는데.”
“저는 사정이 있어 특별히 허가를 받았습니다. 황제 폐하와 약속도 있고요.”
리시스는 눈썹을 모았다. 자신도 키에르트와 약속이 있어 나왔는데, 왜 세니아도 약속이 있단 말인가. 그때 리시스의 등 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동시에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뒤이어 나타난 것은 키에르트였다.
“……두 사람이 함께 있었군.”
“우연히 만났어요. 헤매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세니아와 둘이 있는 상황도 어색한데 키에르트까지 나타나버렸다. 현 황후와 황후가 될 뻔했던 여자. 그리고 황제. 세 사람이 한자리에 있게 되었다. 시종도, 호위도 없이 단 세 사람뿐.
키에르트는 어떻게 행동할까, 은근한 긴장감이 배어 올라왔다.
“기다리고 있는데 영 안 오길래 찾아왔어. 우리 약속 장소는 여기가 아니었을 텐데?”
키에르트의 선택은 단호했다. 세니아를 향해서는 고개만 까딱하고, 바로 리시스를 향해 고개를 돌려버렸다.
“꽃 구경하다 헤맸어요.”
“아, 그랬군.”
“그런데 지금은 저랑만 약속을 한 게 아니었어요? 세니아 양도 약속이 있다던데요. 폐하랑.”
그제야 키에르트는 세니아를 돌아보았다.
“다음 약속이었지. 벌써 와 있었나?”
“조금 일찍 왔습니다.”
세니아는 이 상황에서도 얼어붙지 않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당연히 뒷전에 놓여도 되는 사람인 것처럼. 너무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이상했다. 그러나 키에르트는 당연한 듯 세니아에게서 관심을 거두고 리시스를 향해 팔을 내밀었다.
“황후와의 선약이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니 편히 기다리도록.”
“그러겠습니다.”
키에르트는 완벽하게 순서정리를 했다. 소름 돋게 깔끔한 정리였다. 황후가 될 수도 있었던 사람인데 이렇게까지 냉정할 수 있는가 무섭기까지 했다. 리시스는 키에르트가 내민 팔을 바라보다가 문득 궁금해져서 세니아에게 물었다.
“그런데 무슨 약속?”
세니아는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침착하게 대답했다.
“여름 축제 관련하여 황제 폐하와 상의할 것이 있습니다.”
“여름 축제?”
“예, 쉬란엔 매해 여름 축제가 크게 열립니다. 지금까지 제가 담당해 왔던 지라, 슬슬 준비를 시작해야 해서…….”
“아니, 그 말이 아니라. 여름 축제는 황후인 나랑 얘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 왜 그 얘기를 황제 폐하와 해?”
“……아.”
리시스의 지적에 세니아는 이제야 깨달은 듯 놀란 기색을 보였다.
“실례했습니다. 이제껏 제가 당연히 그래왔던지라……. 아직 황후 폐하께서 쉬란에 익숙하시지 않아 쭉 이렇게 진행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는 몰랐지만 앞으로도 계속 모를 수는 없잖아.”
“예, 그럼 저는 이만 손을 떼고 물러나겠습니다.”
세니아도 키에르트만큼이나 감정적으로 깔끔했다. 수년간 황후 대리로 일을 맡아왔으면 일 자체에 대한 애착이라도 있을 법한데, 바로 손을 떼겠다 미련 없이 말했다. 황후 대리라는 위치까지 생각한다면 무서울 정도로 깔끔한 포기였다.
“그래, 지금까지 고생 많았어.”
“별말씀을요. 황실을 향한 충성일 뿐입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키에르트가 불쑥 끼어들었다.
“황후가 일을 전담하게 되면 이야기는 길게 나눌 필요가 없겠군. 오늘은 돌아가도록.”
“그러겠습니다.”
세니아는 빈틈 하나 없는 깔끔한 절을 올리고 물러났다. 리시스는 세니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키에르트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있으니 따뜻한 쉬란의 봄 공기가 추웠다.
“내내 생각하던 것이긴 한데 폐하께 여쭤볼 것이 있어요.”
“뭐지?”
“우리의 결혼이 끝까지 갈까요?”
리시스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전쟁의 판도가 순식간에 뒤집어지듯 국가 간 정세도 예측할 수 없다. 만약 에드린과 쉬란이 다시 전쟁을 하게 된다면 자신은 어떻게 될까. 세니아를 대하는 키에르트를 보니 문득 그것이 궁금해졌다. 두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사이로 돌아갔지만 리시스는 다시 적이 되는 것이다. 리시스의 물음에 키에르트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세니아를 향한 태도보다는 결정하는 데 훨씬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었다. 한참의 침묵 끝에 키에르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쉬란과 에드린의 협상은 언제고 깨질 수 있겠지.”
어차피 로구안을 막기 위한 임시방편으로써의 협약이었다. 로구안의 위협을 제거하거나 다른 해결방법이 생긴다면 언제까지고 협약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결혼 자체는 둘 중 한 사람이 이혼을 요구하지 않는 이상 지속될 거야.”
“에드린과 쉬란이 예전처럼 다시 전쟁을 하게 된다 하더라도요?”
“국가관계와 별개로 부부로서의 맹약은 유효하니까. 그대는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할 건데?”
리시스가 원한다면 황후로 계속 지낼 수 있게 해 줄 생각은 있다. 황후로서 입지가 좁아지기는 하겠지만, 본인이 원한다면. 아무리 계약으로 묶인 부부관계라 하지만 부부가 아닌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되면 폐하 목 따서 도망가는 게 상책일 것 같은데요.”
“…….”
리시스의 냉정한 판단에 키에르트는 말을 잃었다. 괜히 인도적으로 고민했다. 손해 본 기분에 미간을 찌푸리자 리시스가 킥킥 웃었다.
“황후 후보였던 사람한테 남처럼 차갑게 굴길래 그냥 그대로 우리 사이는 끝이라 할 줄 알았어요.”
“황후 후보는 남이 맞지.”
“……? 결혼할 뻔한 사람이잖아요.”
“? 결혼할 뻔했지 결혼을 한 건 아니잖아.”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멍하니 물음표만 띄웠다. 뭔가 기본적인 생각부터 어긋났다.
“그래도 결혼을 할 뻔한 정도였으면 뭔가가 있지 않았어요?”
“아, 렌데일 공작가에 심심한 위로를 전하기는 했지. 아무래도 오랜 시간 준비를 해 온 것이 무산이 되었으니. 앞으로 몇몇 사업에 우선권을 줘야 할 테고.”
“……그 소리가 아닌데……. 남녀로서의 무언가요.”
“없는데?”
키에르트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리시스를 바라보았다. 지어낸 반응이 저럴 수는 없다. 리시스는 덩달아 멍해졌다. 태어나기 전부터 정해졌던 결혼 상대에 대한 감정이 저것밖에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