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꽃으로 때려도 죽을까2021.08.26.
리시스는 내밀어진 꽃이 칼이라도 되는 양 긴장했다.
“사, 살면서 처음 받아보는 꽃이라…….”
“……꽃을 왜 처음 받아?”
“그야……, 주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정말 희한한 공주였다. 어떻게 공주로 태어나서 춤도 못 춰, 꽃도 못 받아봐. 문화 차이로 이해해 보려 해도 도저히 머릿속에서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받으면 안 되는 건가?”
“아뇨, 그건 아닌데. ……어떻게 받죠?”
리시스는 거절하는 것도 아니고, 진짜로 몰라서 물었다. 받는 것도 해 본 사람이 잘한다더니. 꽃 한 번 받아보고 싶다, 라고 생각만 하고 살았다. 실제로 그 일이 느닷없이 눈앞에서 벌어져 버리니 감동을 느낄 새도 없었다. 얼떨떨하고 멍했다.
“그냥 손을 내밀어서 받아들면 되잖아.”
“소, 손. 한 손으로 받아요? 두 손으로 받아야 하나?”
“그냥, 자.”
리시스가 유난을 떠니 키에르트도 덩달아 어색해져 버렸다. 키에르트는 툭, 리시스의 손에 꽃을 쥐여 줘 버렸다.
“……어?”
리시스는 멍한 눈으로 자신의 손에 들린 꽃을 바라보았다.
눈을 깜빡거리던 리시스는 곧 울먹울먹, 울상이 되었다.
“이럼 어떡해요!”
“왜, 왜?”
“꽃, 꽃은……, 멋있는 사람이 한쪽 무릎을 꿇고 주고, 저는 두 손으로 받은 뒤에 꽃을 준 사람을 안았어야 하는데, 이게 아닌데……!”
리시스의 세상에는 다 꿈결 같은 계획이 있었다. 인생에서 꿈꾸는 순간이란 누구에게나 있다. 멋진 사람에게 꽃을 받는 것은 리시스의 작고 소중한 꿈이었다. 그 꿈을 키에르트가 와장창 망쳐버렸다. 이런 식으로, 대충 짐짝 넘기듯 건네는 꽃을 첫 번째로 받는 것은 안 된다!
“……꼭 그래야 해? 아니, 잠깐. 그 이전에 왜 나는 멋진 사람이 아니지?”
“폐하는 그냥 남편이잖아요. 아직 어디가 멋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어디가 안 멋있는지 얘기해 봐.”
울컥한 키에르트가 따졌다. 리시스는 엉겁결에 눈동자를 굴리며 짧게 고민했다.
“어, 그냥. 이렇게 꽃을 막 주시는 거?”
“꽃 한 송이도 그럼 심사숙고를 하고 줘야 하나?”
“에드린에선 그래요. 다른 사람에게 뭔가를 막 주지 않아요.”
키에르트는 말문이 막혀 리시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공주가 아니라 웬 길거리의 고아를 주워 온 것 같다. 세상이 퍼주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모자라다 떼를 쓰는 것이 공주가 아닌가? 멋있지 않다는 말에 자존심이 상한 것도 잠깐, 짠한 마음이 더 커져버렸다.
“이제는 막 받아. 그대는 이제 에드린의 공주가 아니라 쉬란의 황후니까.”
“어떻게…….”
“그냥 당당하게. 갖고 싶으면 달라고 하고, 안 주면 뺏어.”
“진짜요? 그래도 돼요?”
“황후가 그러겠다는데, 누가 감히 뭐라 하지?”
그제야 리시스는 힛, 하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울상보다는 그쪽이 훨씬 보기에 좋았다.
“이번 여름축제 때 수백 명에게 꽃을 받을 테니까, 미리 받는 연습도 해 두고.”
“……여름축제요? 그건 뭐예요?”
“여름의 초입에 하는 축제인데 쉬란에서 가장 큰 축제야. 대대로 황후가 주관해 왔지.”
“……?”
리시스는 혼자 출전한 전쟁에 백만 대군이 몰려왔다는 해괴한 소식을 들은 것처럼 돌아보았다.
“잠시만요. 주관? 제가 주관을 하는 행사라고요?”
“응.”
“그거 말고 제가 주관해야 하는 행사가 또 몇 개나 있는데요?”
‘주관’이라는 단어에 반응한 건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사람의 직감 같은 것이었다. 결혼식 한 지 얼마 안 됐으니 만찬까지야 참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후로는 대충 각자의 생활을 하면 될 거라 생각했는데, 직접 주관해야 하는 행사라니. 마른하늘에 벼락이 쳤다. 키에르트도 정확하게 세 보지는 않았는지 한참을 곰곰이 떠올려 보았다.
“원예, 방직, 자수, 꽃꽂이, 새장관리, 보육원 환경정리 정도가 황후의 공식 행사였던가? 모후 폐하가 주관하는 걸 본 지도 꽤 오래돼서 가물가물하군. 더 있긴 했는데.”
“‘황후’의 공식 행사면 ‘황제와 황후의’ 공식 행사는 따로 있다는 건가요?”
“그렇지, 여름축제 같은 것도 있고. 사냥제, 가면무도회, 신년제, 송년제, 가을축제……, 축제는 분기마다 있지만 가장 큰 건 여름축제지.”
“……잠깐만요. 그걸 제가 다 해야 한다고요?”
리시스는 현기증을 느꼈다. 행사라고 해봐야 일 년에 두세 번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두세 번이 아니라 열 손가락으로도 모자랄 만큼 쌓여 있다? 황후 폐하 우쭈쭈 하며 떠받들어 주는 분위기도 좋을까 말까 한데 불편한 대우 속에 황후로서 자리매김까지 해야 한다. 매 행사가 오늘 같은 전쟁일 텐데 달가울 리 없다. 한두 번이야 참을 수 있지만 그게 열 번, 스무 번이 될 때까지 참을 자신은 없었다. 갑자기 차라리 전쟁터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리시스는 손에 든 꽃을 노려보았다. 꽃줄기도 두툼하고 꽃송이도 큼지막한데, 이걸로 때리거나 찌르면 어떻게 죽일 수 있지 않을까?
“그거에 맞아선 안 죽어.”
키에르트가 선수를 쳤다. 리시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그거 다 못 해요.”
“하나씩 걸고 내기할까?”
파랗게 질린 리시스를 향해, 키에르트가 웃으며 물었다. 그는 평생 배워 온 황제의 의무니 숨 쉬듯 익숙했지만 모든 것이 처음인 리시스에게는 생소하고 어려울 것이다.
“장기든, 칼싸움이든, 씨름이든, 뭐든 할게요!”
“……흠.”
또 장기를 뒀다가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적당히 내기가 될 만하면서 적당히 재미있을만한 것. 고민하던 키에르트는 딱 적당한 것을 떠올렸다. *** 팍! 리시스가 던진 꽃이 꽃병에 부딪쳐 떨어졌다.
“음……, 쉽지 않네.”
리시스는 고개를 흔들며 꽃병을 노려보았다. 꽃병 옆에는 꽃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꽃병 안에도 몇 가지의 꽃이 들어가 있긴 하지만 많지는 않았다. 앨린이 방에 들어오자마자 그걸 발견하고 반가운 기색이 되었다.
“아, 꽃활 연습하세요?”
“꽃활? 이걸 꽃활이라고 해?”
“네, 축제 때마다 하는 놀이예요. 의외로 쉽지 않죠?”
키에르트가 건 내기 종목이었다. 리시스는 처음 들어보는 것이라 본인에게 유리한 걸 선택했나 툴툴댔는데, 축제 때마다 하는 일반적인 놀이였다니. 나쁜 놈이라고 욕했던 것 반은 취소.
“근데 굳이 연습 안 하셔도 될 텐데……. 꽃마다 모양도 다르고 힘이 들어가는 게 아니라서 연습으로 되는 게 아니래요. 그냥 운이라고.”
“……그래?”
하지만 그저 운에 자신의 평온한 삶을 맡길 수는 없었다. 리시스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꽃송이를 고쳐잡았다.
“그러고 보니 슬슬 여름축제 준비에 들어갈 때네요. 황후 폐하께서도 바빠지시겠어요.”
“여름축제는 뭘 하는 축제야?”
“아, 맞다. 황후 폐하께선 모르시겠네요. 되게 오래된 축제인데, 쉬란에서 열리는 축제 중에 가장 커요. 예전에 에드린……. ……앗.”
축제에 처음 참가하는 어린아이에게 설명해주듯 신이 나서 떠벌리던 앨린이 말하다 말고 사색이 되었다.
“에드린이 뭐?”
“아, 아, 아니, 그게요……. 에드린이……. ……이걸 황후 폐하께서 준비하시는 게 맞……는 일인지 모르겠어요.”
“뭔데?”
“그게…….”
앨린은 자신이 전쟁이라도 일으킨 것처럼 식은땀을 흘리며 여름축제를 설명했다. 여름 축제는 500년 전, 에드린의 침략을 무찌르고 쉬란을 제국으로 키워낸 대제(大帝) 헤스테의 승리를 기념하는 축제였다. 그 승리의 결정적인 원인은 쉬란의 뜨거운 여름. 쉬란보다 추운 곳에 사는 에드린 침략자들은 더위에 무력해졌고, 대패하여 물러갔다. 그 후로 여름을 축복하고 기리는, 가장 크고 성대한 축제로 자리 잡게 되었다.
“…….”
“자, 잘못했어요…….”
앨린은 흉흉한 리시스의 표정에 쫄아 일단 사죄했다. 앨린이 잘못한 것은 없다. 오백 년 전통의 축제를 앨린이 만든 것도 아니다. 리시스는 괜한 화풀이를 하지 않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이거는 역사적인 배경이고요, 실제로는 그냥 먹고 마시고 이런저런 경기하며 노는 축제예요.”
리시스는 콧잔등을 문질렀다. 축제니 흥겨운 건 맞겠지만 앨린의 말마따나 에드린 출신인 자신이 준비를 하는 것이 맞을까.
“혹시 지난 축제 자료, 남아 있는 것 있을까?”
어떤 작전도 우선은 자료조사부터다. 리시스는 전투에 임하는 태세로 조사부터 시작했다. 다행히 여름 축제는 쉬란에서 정말 크고 중요한 행사라 자료는 풍부했다. 시종에게 말을 하자 바로 준비해 주었다. 양이 방대해서 대충 한 번 훑어볼 생각이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해가 저물 때까지 집중해서 읽었다.
“이게 뭐야!”
그 결과, 리시스는 분노했다. 그해의 축제는 최근에 있었던 전투에서 참고해 온 것들이 많았다. 예를 들어, 꽃동산의 조경은 에드린을 이겼던(다고 주장하는) 산맥을 흉내 내어 만든다든지, 리시스가 모델일 것이 분명한, 마녀 같은 여자 인형을 걸어둔다든지 하는 것이었다. 이제까지는 그러든가 말든가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리시스가 이 행사를 주최하는 황후가 되었다. 귀찮다고 지금까지 하던 대로 알아서 하라고 맡겼으면 대참사가 일어날 뻔했다.
“지금까지 축제 준비는 누가 맡아서 해 왔지?”
키에르트가 미혼이니 선대 황후의 승하 이후 다른 누군가가 해 왔을 일이다. 그 사람에게 일단 인수인계를 받아야 했다.
“그게……, 세니아 양이…….”
앨린이 다시 자기가 잘못한 것처럼 주저주저하며 털어놓았다. 하지만 놀라울 건 없었다. 황후 후보였으니 당연히 황후의 업무를 대리로 처리했을 수도 있다. 문제는 세니아가 과연 협조적으로 일을 도울까? 였다.
“갑자기 불러다가 인수인계하라고 하면 얌전히 할 것 같지 않고…….”
“축제 주관은 황후의 고유 권한이니까요……, 축제에서 일을 할 사람들도 직접 고를 수 있고요.”
“아, 사람도 필요하구나.”
인맥도 문제였다. 누가 누군지 얼굴을 알아보는 것도 어려운데 누구한테 어떤 일을 맡길지를 어떻게 정할까. 어제 만찬의 분위기를 생각했을 때 부른다고 몇이나 나올까 싶기도 했다. 전투에 나가려 해도 병사를 모아 장비를 맞추고, 개개인의 체력훈련을 하고, 그다음에 전열을 가다듬는 훈련에 들어간다. 축제 준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적절한 단계가 필요했다.
“역시 티파티든 뭐든 해야 하려나…….”
“하시게요?!”
앨린이 대번에 반색했다. 드디어! 황후의 곁에 붙은 보람을 느낄 때가 왔다!
“티파티는 보통 어떻게 진행하지?”
“크게 정해진 형식은 없어요! 파티 주인의 성향이나 취향을 드러내기 위한 자리이기도 하니까 편하게 하시면 돼요. 하지만 아무래도 처음이시니 화려하게 하는 게 좋겠죠……?”
마지막은 앨린의 욕심이었다. 하지만 리시스도 그 생각에는 동의했다. 기왕 하는 거, 가장 멋있고 가장 크게! 가장 화려하게!
“……그래서, 보통 예산은 어느 정도 들어?”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건 돈이었다. 리시스를 통해 대리만족을 하려던 앨린도 진지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