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계약 위반2021.08.22.
그 이후 만찬은 평범하게 진행되었다. 식사를 하며 몇몇 귀족들의 보고나 아부를 듣고, 적당히 한두 마디씩 던져주자 시간이 흘렀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잔잔하게 깔려 있던 음악의 박자가 바뀌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저마다 냅킨으로 입술을 찍으며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식사 다 했나?”
“아까 끝냈어요.”
리시스는 식사를 빨리 하는 편이었다. 전쟁터에서 우아하게 한 입씩 먹고 있을 시간은 없다. 입에 감자 하나를 욱여넣고 화살비를 뚫고 뛰며 식사를 할 때도 간혹 있었다. 오늘은 빵을 깨처럼 쪼개 먹는 수준으로 느릿느릿 먹었다. 그래도 남들보다 빨라서 물만 홀짝이며 기다린 시간이 길었다.
“그럼 한 곡 추겠나, 황후?”
“……춤이요?”
“그래, 쉬란은 어디서든 춤을 추지.”
그것 참 특이한 문화였다. 무도회라면 모를까 만찬에서도 춤을 출 줄은 몰랐다. 리시스는 얼떨떨하게 키에르트가 내민 손을 바라보았다. 그냥 장단에 맞추어 신나게 흔들자는 말은 아닐 테다. 무도회 하면 딱 떠오르는, 남녀가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도는 그 춤 말이겠지. 리시스는 한 번도 귀족들의 무도회를 경험해보지 못했다. 왕비가 리시스를 세상에 보이고 싶어 하지 않아 사교계 데뷔조차 못 했다. 궁에서 무도회가 열릴 때 몰래 난간 뒤에 숨어서 몇 번 구경했던 것이 끝이었다. 그러다가 한 번은 숨어보던 것을 들켰다. 그 이후로 무도회가 있는 날은 아예 방에 가둬졌다. 늘 호기심과 동경으로만 끝났던 무도회에서의 춤이다. 리시스는 조심스럽게 키에르트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키에르트가 손에 힘을 주어 리시스의 손을 완전히 감쌌다. 커다란 손에 감싸이니 어째서일까, 입술이 간지러웠다. 리시스는 입술을 앙 모으고 키에르트가 이끄는 대로 만찬장 한쪽의 홀로 나아갔다. 만찬장의 바깥쪽에는 넓은 홀이 마련되어 있었다. 거대한 샹들리에 아래에 화려한 보석 타일로 꽃모양의 원을 만들어놓았다. 샹들리에의 불빛에 바닥의 타일이 반짝반짝 빛났다. 첫 춤은 황제 부부의 것인지 사람들이 빙 둘러섰다. 악단이 노래 연주를 시작했다. 사람들의 기대어린 시선이 쏟아졌다. 잘 출 수 있을까? 리시스는 두근거리며 키에르트를 올려다보았다. 키에르트가 리시스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
반사적으로 놀라 얼굴이 굳었다. 춤을 출 때 남자가 허리에 손을 감는 건 알고 있다. 그런데 막상 키에르트의 손이 허리에 닿자 익숙하지 않은 감각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아침에도 이미 한 번 잡혀봤던 허리인데, 그래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이제까지 살면서 남자가 리시스의 허리에 손을 댈 일은 거의 없었다. 있어봤자 대련 중 상대를 잡아 넘기기 위해 대는 것 정도? 그건 이거랑 달랐다. 손이 닿은 등이 간질간질해서 눈동자가 방황했다. 키에르트의 얼굴을 마주 볼 수도 없었다.
“나를 쳐다봐야지.”
“예에, 에.”
키에르트가 리시스를 붙잡은 채로 재촉했다. 하지만 도저히 눈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눈을 마주칠 때마다 등 뒤에 감긴 손바닥의 체온이 더 의식되었다. 결국 눈을 마주치는 건 포기하고 적당히 턱과 목 사이 언저리를 애매하게 바라보았다. 대충 되었다 싶었는지 키에르트가 크게 한 발을 옮겨 춤을 시작했다. 리시스는 허둥지둥 걸음을 따라갔다.
“……?”
몇 번 스텝을 밟은 키에르트의 얼굴에 경악 섞인 의아함이 떠올랐다.
“……황후?”
“예?”
“혹시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건 아니, 윽.”
정강이 두 번, 발등 한 번을 가격당한 키에르트가 리시스 테러설을 제기했다. 울컥한 리시스가 처음으로 눈을 마주쳤다. 남들 보는 눈이 있으니 입꼬리는 웃고 있지만 눈에는 날이 섰다.
“제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대한 감상이 겨우 그건가요, 폐하?”
“……최선이었어……?”
키에르트는 자신의 발에 걸려 휘청하는 리시스의 몸을 팔로 지탱하며 멍하니 되물었다. 하긴, 이렇게 자신의 몸을 날려가면서까지 공격할 필요는 없다. 진짜 춤을 핑계 대고 때리려면 남에게 보이지 않는 수많은 방법이 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지 않았다.
“어떻게 공주가 춤을 이렇게 못 출 수 있지?”
리시스의 춤은 완벽한 개판이었다. 스텝을 대충 아는 것 같기는 한데 기본이 되어 있지를 않고, 리딩에 따라 움직이는 법도 몰랐다. 같이 춤을 추는 게 아니라 키에르트가 리시스를 끌고 다니는 모양이 되어버렸다.
“배운 적이 없어서요? 저 못 추나요? 대충 본 대로 따라해 봤는데.”
“……배운 적이 없어?”
“어쩌다 보니 기회가 안 생겨서요.”
“……안 배운 것 치곤 굉장히 잘하고 있어.”
키에르트는 이를 악물었다. 이미 시작해버린 춤이니 중간에 그만둘 수도 없다. 하지만 더 이상 다리를 내어 줄 수도 없었다.
“잠시만 실례해도 될까?”
“아뇨.”
“그럼 내 다리를 좀 살려줄 수 있겠, 윽.”
“……실례하세요.”
키에르트의 실례라는 게 뭔가 더한 신체접촉일 것 같아 일단 거절했지만, 본의 아니게 폭행을 지속할 수도 없어 결국 허락하고 말았다. 리시스의 허락을 받은 키에르트는 허리를 안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꺅!”
키에르트는 빙글 돌며 리시스의 허리를 한 팔로 안아 번쩍 들었다. 그 바람에 가슴과 배가 키에르트의 몸에 꽉 붙었다.
리시스는 화들짝 놀라 어깨를 밀었지만 키에르트의 팔은 그보다 더 단단했다. 두 발이 공중에 붕 떴다. 긴장한 리시스의 얼굴이 비장하게 굳었다. 키에르트는 자연스럽게 춤추는 척 빙글빙글 돌면서 리시스에게 주문했다.
“표정, 표정.”
“하. 하. 하.”
웃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
“전 이해가 안 돼요. 왜 식사를 하다 춤을 춰요?”
만찬은 좋은 분위기 속에 잘 마무리되었지만 리시스의 정신은 너덜너덜해졌다. 춤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어려웠다. 배우지 않고 대충 감으로 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춤이 어렵다는 사실에 충격 한 번, 황제 부부의 춤이 끝난 뒤 모든 귀족들이 다 춤을 잘 춘다는 것에 충격 두 번을 연타로 받았다.
“나도 공주가 춤을 못 추는 게 이해가 안 돼.”
키에르트의 종아리와 발등도 마찬가지로 너덜너덜했다. 쉬란과 에드린의 문화가 다른 점은 알고 있었지만 리시스는 공주님이라기에 충격적인 면모가 많았다. 애초에 공주를 전쟁터에 내보낸 것부터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었다.
“문화 차이예요.”
“그래도 춤은 기본이 아닌가?”
“……사람 따라 다르죠.”
리시스는 저도 모르게 출생의 비밀을 털어놓을 뻔했다. 꼭 리시스 같은 경우가 아니어도 에드린이 전반적으로 육아에 무신경한 나라인 것도 맞았다. 왕비의 소생인 왕자들도 리시스와 크게 다르지 않게 자랐다. 예의 모르고, 학식 없고, 교양도 없다. 소위 망나니였다. 하지만 리시스는 스스로가 망나니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기분 나쁘다고 지나가는 사람을 때리고, 상 엎고, 물건 부수는 짓은 안 하니까.
“춤 좀 못 춘다고 큰일나진 않잖아요? 에드린에선 필수 교양이 아닐 뿐이에요.”
“……국가 간 문화 차이를 생각하지 못한 내 불찰이군.”
황후란 자고로 모든 부분에서 완벽하게 황제와 합이 맞아야 한다는 키에르트의 개념이 무너져 내렸다. 그의 부모가 그랬다.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를 지지하고, 각자의 위치에서 본분에 충실했다. 그러면서 사생활도 가볍게 즐기며 살았다. 그게 당연하고 맞는 것인 줄 알았다. 키에르트도 황제로서 완벽하게 키워졌다. 태어나기 이전, 황후의 배 속에 있을 때부터 교육이 시작되었다. 황제로서 필요한 덕목, 지식, 체력까지. 모든 것이 짜여 있었고 그 순서대로 자랐다. 모든 변수를 예측하지는 못했지만 대부분은 계획대로 흘러갔다. 키에르트는 그것을 안정적이라 생각했다. 간혹 이렇게 짜인 대로 흘러가는 삶의 의미에 대한 고민이 들 때도 있었지만 길지 않았다. 모두가 태어난 대로 그렇게 살지 않는가. 자신은 황제로 태어났고, 황제로 살아가는 것이 당연했다. 키에르트의 인생에서 가장 큰 변수는 리시스와의 만남이었다. 전쟁터에서 겪은 상상도 못할 파격적인 작전에 받았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데 황후가 된 리시스도 매 순간 새로운 충격을 주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춤 연습을 좀 했으면 좋겠군.”
“……그럴게요.”
사적인 자리에서라면 모를까, 공적인 자리에서 늘 이렇게 춤을 춘다면 배우지 않을 수 없었다. 리시스는 어깨를 늘어뜨리며 키에르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는 할 말이 없어 타박타박 걸음만 내디뎠다. 그러던 중 화단의 꽃에 눈길이 닿았다.
“어, 와. 꽃이 엄청 커요.”
키에르트의 눈에는 평범한 꽃이었다. 특이한 품종도 아니고 유난히 크지도 않았다.
“에드린은 꽃이 작나?”
“꽃 자체가 많지 않아요. 추운 편이라.”
리시스는 내내 꽃밭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걸었다. 꽃이야 사방에 있는 것이고 늘 보는 것이다. 키에르트에게는 대단할 것도 없었다. 오히려 꽃을 바라보며 반짝반짝 빛나는 리시스의 눈빛이 더 신기했다. 키에르트는 꽃을 구경하는 그 리시스를 구경했다.
“와, 어떻게 꽃이 사람 얼굴만 할 수가 있지?”
“다른 정원에는 더 큰 꽃도 있어.”
“진짜요?”
“사람 머리만 한 수국도 있고.”
“우와아…….”
리시스의 눈이 더 커졌다. 너무 반짝거려서 눈에서 별이 떨어질 것 같았다. 키에르트는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이럴 때는 전쟁터의 악당이 아니라 곱게 자란 공주님 같다.
“다음에 한번 가 보지.”
“다음에……? 지금 가면 안 돼요?”
“거기가 꽤 멀어. 그리고 내가 다음 일정이 있군.”
“……같이 가실 필요 없이 그냥 위치를 알려주시면 안 돼요?”
만찬이 늦게 끝난 것도 아니고, 지금 당장 가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키에르트가 바빠서 동행하지 못한다면 혼자서 가도 된다.
“그 정원은 황제의 전용 정원인데, 거길 혼자 보내는 것도 그림이 좀 이상하지 않겠나?”
그러나 키에르트의 말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남들이 보는 눈도 있다는 걸 잊을 뻔했다. 산책 잘 하다가 갑자기 난 혼자 수국정원에 갈래! 하고 황후 혼자 쭐레쭐레 가 버리는 건 괜한 불화설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치만 꽃은 영원히 피어 있는 게 아닌데……. 내일 당장 모든 꽃들이 져 버리진 않겠지……. 순간적으로 한껏 부풀어 올랐던 기대감이 푸시식 꺼져 내리며 리시스의 어깨도 내려앉았다.
“자. 오늘은 이걸로 넘어가지.”
안 그래도 작은 몸이 축 처지니 더 작아 보였다. 키에르트는 꽃 한 송이를 뚝 꺾어 내밀었다.
“어……?”
리시스는 자신의 눈앞에 불쑥 내밀어진 꽃을 내려다보며 입을 벌렸다. 꽃 한 번 봤다가, 키에르트의 얼굴을 한 번 봤다가.
“어어…….”
키에르트는 고장 난 인형처럼 삐걱거리는 리시스 때문에 자신이 꺾은 꽃에 벌레라도 있나 들여다보아야 했다.
“왜……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