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죽어주세요2021.08.19.
그래도 앨린은 자기 선에서는 최선을 다했다. 드레스를 이렇게도 꾸며봤다가, 저렇게도 꾸며봤다. 드레스를 가지고 별 짓을 다 했다. 그러나 애초부터 장인이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든 드레스가 아닌지라 노력을 해도 그게 그거였다. 결국 정말 리시스가 처음에 말했던 대로 ‘대충 아무렇게나’ 꾸민 결과물이 나왔다. 리시스의 기준에는 ‘적당한’이었지만, 앨린의 눈에는 ‘참담한’이었던 모양이다.
“아아아! 제가 부족해서!”
만찬장으로 이동하는 내내 앨린은 침통하게 울먹였다.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리시스가 거울을 보면서 몇 번을 말해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사실 이 정도의 차림도 결혼식 복장을 제외하고 리시스의 인생에서 가장 화려했다. 이 이상 번쩍거리면 그건 인간이 아니라 보석뭉치가 걸어 다니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만찬장에 도착함과 동시에 바뀌었다. 해가 졌음에도 온 사방에 작은 태양들이 번쩍번쩍거리고 있었다.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매끄르르한 옷감에 가득가득 자수를 채워 넣었다. 거기에 온몸을 휘감은 장신구들까지. 남자들은 타이핀, 시계, 배지, 커프스, 부토니에르까지 보석이었고 여자들은 목걸이, 귀걸이, 팔찌, 반지, 부채에 머리 장식까지 주렁주렁 보석을 달고 있었다.
“!”
그리고 그들은 리시스를 돌아보며 색다른 충격에 빠졌다. 저렇게까지 수수한 황후의 복장을, 그들은 태어나서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수수한 복장을 잊게 할 만큼 리시스의 앙증맞음이 머리를 강타했다. 작고, 뽀얗고, 동그랗다……! 하지만 초라하다……! 그들의 세상에서는 동시에 받아들이기 어려운 개념이 상충했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사람들은 혼란스러운 가운데 반사적으로 예를 갖췄다. 고개를 숙이자 머리에 장식한 번쩍거리는 빛무리들이 더욱 빛났다. 안구 보호를 위해 눈을 찡그려야 할 정도였다. 그 빛무리를 가르고 한 사람이 다가왔다.
“왔나.”
번쩍번쩍한 후광을 배경으로 등장해도 이곳에서 가장 반짝이는 키에르트였다. 리시스는 잠시 키에르트의 반짝임에 놀라 눈만 깜빡였다. 멍한 그 얼굴을 내려다본 키에르트는 바싹 다가가 뺨에 키스하듯 귓가에 속삭였다.
“왜 그래?”
“어, 아, 아뇨……. 폐하가 너무 반짝거리셔서.”
“뭐?”
리시스의 솔직한 칭찬에 키에르트도 잠시 멍해졌다. 하지만 곧 픽 웃으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리시스도 황급히 무릎을 굽혔다. 인사를 끝낸 키에르트는 리시스에게 자연스럽게 팔을 내밀었다. 마중을 나왔으니 자리까지 에스코트를 하는 것도 남편의 몫이었다. 리시스는 키에르트가 내민 팔을 바라보며 작게 한 번 숨을 몰아쉬고 살짝 손을 올렸다. 에스코트를 받는 것도, 남자의 팔에 손을 올리는 것도 리시스에게는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 그러나 키에르트가 도장을 눌러찍듯 리시스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꽉 겹쳤다. 손을 꼼질거려도 빠져나갈 수 없었다.
“손끝 하나 안 대신다더니…….”
“사람들 앞에선 예외지.”
두 사람은 자신들에게만 들리게 소근거리며 자리로 나아갔다. 리시스는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의 번쩍거림에 눈이 시려 고개를 돌렸다. 솔직히 조금 주눅이 들기도 했다.
“밥이나 한 끼 먹는 자리라고 해서 그냥 편하게 입었는데, 다들 번쩍번쩍해요.”
“그대에게 잘 보이기 위해 다들 한껏 차리고 나온 모양이지.”
“저도 좀 더 잘 꾸밀 걸 그랬나 봐요.”
“그대는 꾸미지 않아도 스스로 빛나는 사람이지 않은가. 뭐하러 굳이.”
키에르트는 쉴 새 없이 리시스를 칭찬했다. 리시스는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저 사람들과 비교하면 리시스의 차림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칭찬할 수 있는 곳이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데도 키에르트는 아주 술술 칭찬을 쏟아냈다.
“폐하는 왜 그렇게 칭찬을 잘하세요?”
리시스의 물음에 키에르트는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칭찬을 했나?”
“칭찬하셨잖아요. 제가 스스로 빛난다고.”
“사실 그대로를 말한 것도 칭찬인가?”
본인은 칭찬이 아니라는데 리시스는 입꼬리가 근지러워 입술을 사리물어야 했다. 태어나서 이런 말을 해 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조금 더 나아가 사람들의 시선 앞에 본격적으로 놓이게 되자 리시스의 웃음은 자연히 사그라들게 되었다. 차례로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올리는 눈빛에서 대놓고 적의와 살기가 느껴졌다. 리시스의 외모에 놀라 술렁였던 것은 잠깐이었다. 본질적으로는 갑자기 등장한 적국의 공주, 자격 없이 올라간 황후였다. 겉으로는 모두들 화사하게 웃고 있다. 하지만 꿀 속에 모래가 섞인 듯 따가운 시선이 숨어 있었다. 이곳 또한 또 다른 전쟁터였다. 적국의 한복판이라는 실감이 비로소 났다. 리시스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무리 무서운 전쟁터여도 초야보다는 덜 무서웠다. 아직은 여유가 있었다. 만찬 테이블은 상석에 테이블이 하나 놓여 있었고, 그 밑으로 두 테이블이 마주 보게 귀족들의 자리가 마련되었다. 두 테이블 사이에는 두 사람이 나란히 걸을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 있었다. 만찬 전에 새로운 황후에게 인사를 올리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누구부터 나오는지는 듣지 못했다. 그래서 걸어 나온 여성이 자신의 이름을 밝혔을 때 놀라고 말았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세니아 렌데일입니다. 아침에는 몸이 좋지 않아 문안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불충을 부디 용서하소서.”
“!”
앨린이 경계하던 바로 그 사람. 리시스 때문에 황후 자리에서 밀려난, 복수에 불타고 있을 거란 주요 경계인물. 세니아 렌데일.
앨린의 경고와 다르게 세니아는 차분하고 온화했다. 걷는 동안 찔러 들어오던 사람들의 눈빛이 오히려 더 사납고 날카로웠다. 세니아는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에 여름 숲 같은 녹색의 눈동자를 가진, 그림 같은 미인이었다. 풍기는 분위기와 몸가짐, 표정까지도 우아했다. 리시스와 나란히 서 있었다면 누구든 세니아 쪽이 황후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몸이 안 좋았던 것을 어떻게 탓하겠나. 만찬에라도 와 준 것이 고맙지.”
“드넓으신 마음에 감사드립니다.”
리시스의 형식적인 응대에도 세니아는 곱게 절하며 진심으로 기쁜 듯 미소 지었다. 그게 더 이상했다. 차라리 자신을 경멸하거나 냉대해야 했다. 그랬다면 응, 그래 하고 신경 쓰지 않고 넘겼을 것이다. 그런데 저 밝은 모습은 이상했다. 속에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사람 특유의 인위적인 밝음이었다. 그저 세상 물정 모르는 아가씨의 철없는 심술 정도라면 웃어 넘기겠지만, 세니아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 마냥 방심할 수 없다. 경계해야 한다. 전쟁터에서 숱하게 죽을 고비를 넘긴 리시스의 직감이었다.
“그럼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보지.”
“다음이면 티파티가 있겠군요. 아, 물론 초대해 주신다면 말입니다.”
“티파티?”
“예, 쉬란에서는 티파티를 종종 엽니다. 새로 이사를 왔거나……, 사교계에 데뷔를 했거나……, 결혼을 하면 보통 티파티로 사교생활을 시작합니다.”
세니아가 아니었으면 그런 것이 있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자신이 이방인임을 다시 한번 느꼈다.
“그렇군. 알다시피 나는 에드린 사람이라 쉬란의 문화는 낯설어서. 잘 알아보도록 하지. 알려줘서 고마워.”
“황후 폐하께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세니아는 다시 한번 아무렇지 않게 ‘황후 폐하’라는 호칭을 입에 담았다. 고개를 숙이는 것도 꺼려하지 않았다. 정말 황후 자리에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리시스는 영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직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적국의 황후로 팔려가며 웬만한 기대는 다 내려놓았다. 죽지만 않아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세니아처럼 속에 뭔가를 숨긴 사람을 그냥 두다가는 진짜 죽을 수도 있는 일로 연결될 수 있었다. 굳이 끼고 싶지 않던 전쟁에 또 끌려 나가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 이후로 이어진 귀족들의 인사는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귀족들이 너무 많아서 이름과 얼굴을 다 기억할 수도 없었다. 성의 없이 고개만 끄덕이다 보니 드디어 인사가 끝나고 식사가 시작되었다. 인사만 듣는 것도 중노동이었다. 허기가 졌다. 그런데 음식이 눈앞에 놓였는데도 키에르트는 식사를 시작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먹으면 안 돼요?”
리시스는 기다리다 못해 물었다.
“잠시만. 만찬에서는 모두가 음식을 받으면 그때 접시를 바꿔.”
“왜요?”
“평소 식사는 황궁 요리사가 맡아서 안전한 편이지만 만찬은 대규모라 투입되는 인원이 많거든. 그중 누가 독을 탔을지 알 수가 없어서.”
리시스는 놀라서 눈썹을 들어올렸다. 이런 체계가 만들어질 정도로 숱한 암살시도가 있었다니. 키에르트가 신방에서 리시스의 암살시도를 의심한 것이 이해가 되려 했다.
“그래, 황후는 누구와 바꾸겠나?”
키에르트가 선심 쓰듯 먼저 물었다.
“음…….”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돼. 이 관행이 생긴 이후 만찬에서 독살 시도는 한 번도 없었으니까. 반쯤 재미야.”
리시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의 얼굴을 쭉 훑었다. 하지만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굴 찍어도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냥 안 바꿔 먹을래요.”
“왜?”
“만약에 제 식사에 독이 들었다면……, 그걸 누가 바꿔 먹어서 죽는 걸 보는 게 싫어요.”
어차피 재미로 하는 관행, 대충 넘어가려 하는데 키에르트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되겠는데. 바꿔먹는 사람이 소원을 빌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거든.”
“소원요?”
“목숨을 대신 걸어줬는데 상은 내려야지.”
“아.”
무작정 너 먹어, 하고 명령하는 것보다 좋게 보일 수 있는 방법이었다. 먹은 사람은 충성심을 인정받은 것뿐만 아니라 상도 받으니 일석이조일 테고. 어차피 식사에 독이 들어가지 않은 지 오래라면 깜짝 선물을 주는 복권 발표 시간 같은 것이었다. 리시스는 이제야 분위기를 파악했다.
“음……, 그럼……. 세니아 양?”
의심스러운 것은 그냥 덮고 넘어가는 것보다 한 번 찔러보는 것이 낫다. 리시스의 지목에 세니아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내내 웃는 얼굴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영광입니다.”
시종이 두 사람의 접시를 바꾸어 놓았다. 세니아는 먼저 한 입을 먹었다. 당연하지만 바꾼 음식을 먹어도 아무 이상은 없었다.
“충심을 증명했으니 이제 소원을 빌어도 되겠습니까?”
“무엇을 해주면 될까?”
“나중에 황후 폐하의 티파티가 열리면 꼭 초대해 주십시오.”
세니아는 기다렸다는 듯 소원을 말했다. 어떻게든 리시스에게 접근하려는 의도가 보였다. 하지만 접근해서 뭘 하려고 그러는 걸까. 어떻게든 망신을 주려고? 아니면 좀 더 과격하게, 티파티에서 사고인 척 죽이려고?
“하게 된다면.”
“기다리겠습니다.”
세니아는 생긋 웃었다. 봄볕처럼 살가운 웃음에서 전쟁터의 바람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