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거지꼴도 예쁠 예정2021.08.15.
“아, 예, 예……, 목욕을 마치시면 불러주소서.”
사람들은 키에르트의 서슬 퍼런 명령에 사사삭 물러났다. 사람들이 사라지고 다시 둘만 남은 조용한 침실.
“……스스로, 목욕. 할 수 있지?”
“물론요. 충분히, 당연히.”
두 사람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각각 침대의 반대 방향으로 내려왔다. 귀족들이 인사를 올리는 동안 시종들이 침대 옆에 두 사람을 위한 목욕물을 준비해 놓았다. 원래는 침대 커튼을 가림막 삼아 목욕을 하면서도 담소를 나눌 수 있게 만든 구조였지만 두 사람은 대화 대신 전투적으로 푹팍푹팍 목욕을 했다. 삶은 전쟁터였다. *** 목욕을 마친 뒤 순서는 착착 진행되었다. 머리에 향유를 바르고, 손발에 크림을 바르고, 이 닦고 머리 빗고, 옷 입고. 스스로 챙기는 데 능숙한 리시스는 남이 해 주는 아침 단장이 영 어색했다. 오히려 혼자 하는 것보다 시간이 몇 배는 걸렸다. 반대로 키에르트는 리시스보다 훨씬 빨리 아침 단장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오늘의 일정은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오늘은 만찬이 있는 날. 본격적으로 각자의 궁으로 헤어져 만찬을 위한 준비를 해야 했다.
“그럼, 이따 저녁 만찬에서 보지.”
키에르트는 싱긋 웃으며 리시스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리시스는 깜짝 놀라 손을 뺄 뻔했으나 키에르트가 꽉 잡아 그러지 않을 수 있었다. 덕분에 정신이 들었다.
“네, 이따 봐요.”
미소를 지으며 답을 하는 데 성공한 리시스는 키에르트가 돌아간 뒤 가슴을 쓸어내렸다. 자신은 도저히 적응이 안 되는데 키에르트는 무슨 수로 저렇게 능숙한지 모르겠다.
“저, 그럼……, 만찬 준비를…….”
키에르트가 황제궁으로 돌아가자 귀족 여성들과 리시스만 남았다. 원래는 결혼식과 초야를 치른 피로를 하루 종일 풀고 느긋하게 만찬장에 가는 일정이었다. 그런데 하루의 시작이 너무 늦어버렸다. 바로 준비를 해도 시간이 간당간당했다.
“응, 부탁하지.”
“예에, 황후 폐하.”
그런데 사람들이 쭈뼛대며 서로 앞으로 나서려 들지를 않았다. 결혼식 준비를 할 때 거의 하루의 반을 잡아먹었던 걸 생각하면 당장 와르르 달려들어 서둘러도 시간이 모자랐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이지? 사람들을 돌아보자 찔끔거리며 시선을 피한다. 키에르트가 사라지자마자 갑자기 태도가 변했다.
‘아하?’
리시스는 눈치가 빨랐다. 본인이 원해서 눈치가 빨라진 건 아니고, 그럴 수밖에 없는 성장 배경이 있었다. 사실 리시스는 에드린 왕의 혼외자였다. 에드린 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하룻밤을 보낸 시골 처녀가 리시스의 엄마였다. 어릴 때는 사냥꾼인 엄마와 시골에서 살았지만 엄마가 전염병으로 죽게 되자 궁으로 불려갔다. 공주가 없어서였다. 리시스의 나이 열 살 때였다. 에드린 왕은 무관심했고, 왕비는 리시스의 존재를 거슬려 했다. 아무도 보호해주지 않는 어린아이는 궁 안의 귀족들은 물론 시종, 하녀들에게조차 무시를 당했다. 왕비가 거슬림을 참다못해 전선에 보내기 전까지 식사를 거를 때가 태반이었다. 하녀들이 무시를 하며 식사를 안 줘도 일러바칠 사람이 없었다. 공주였지만 하녀보다 못한 대접이었다. 어쩔 수 없이 뭐라도 얻어먹으려면 자신에게 조금이나마 호감 있는 사람을 알아보아야 했다. 그렇게 눈치가 빨라졌다. 지금, 또 그렇게 고립되려 하고 있었다. 혈혈단신으로 적국에 시집온 공주. 쉬란에 배후세력 없음, 황제의 총애를 얻긴 한 것 같은데 지속될지는 확인 불가, 에드린과의 관계가 지속될지의 여부도 확인 불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굴러가고 있는 복잡한 계산이 훤히 보였다. 리시스는 턱을 치켜들었다. 자신은 예전의 어린 공주가 아니다. 키에르트와 표면적으로라도 잘 지내기로 협정을 한 상태이니 우선은 황제라는 든든한 우군을 등에 두었다. 그리고 자신의 시녀가 되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을까 봐 울먹이는 연약한 공주님도 아니었다.
‘다 필요 없어!’
도도하게 모두 내쫓아버리려는데, 한 아가씨가 눈에 들어왔다. 다들 눈을 피하는 와중 혼자서만 반짝반짝 빛나는 눈빛을 쏘고 있었다.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건 맨 뒤쪽,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서 있었고 혼자만 차림새가 남루한 탓이었다. 리시스가 눈길을 주자 입까지 뻐끔거리며 강하게 무언가를 표현하려 했다.
‘저요! 저요! 저요!’
하필 옷도 병아리 같이 노란색 드레스였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리시스의 눈에 띄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리시스는 잠시 고민하다가 선택했다.
“거기, 노란 드레스 아가씨.”
“네? 저요? 저요? 저요?!”
자신이 찍힐 거라 예상조차 하지 못했는지 노란 드레스 아가씨는 화들짝 놀라며 앞으로 달려 나왔다. 그러다 드레스자락을 밟고 엎어질 뻔한 것을, 리시스가 얼른 팔을 뻗어 잡아주었다.
“화, 황송, 황공…….”
“괜찮아, 괜찮아. 이름이?”
“바, 반데스 남작 가문의 앨린이라 합니다, 황후 폐하.”
남작 가문이라. 가문의 급이 낮기는 하지만 별 상관없다. 남의 세력에 기대는 건 키에르트만으로 충분했다. 시녀는 자신을 위한 충성심만 있으면 됐다.
“응, 앨린 양. 오늘 내 단장을 도와줄 수 있을까?”
“예?! 저요? 제가요? 진짜 저요?!”
“싫어?”
“아니요! 아니요! 감사합니다!”
남작 가문 영애로서는 파격적인 인사였다. 사람들은 뜻밖의 간택에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자신들이 나서지 않았으면서 남작 가문의 영애가 뽑히는 꼴은 또 못 보겠나 보다.
“황후 폐하, 신하로서 감히 한 마디 올리자면…….”
“응, 묻지도 않았는데 감히 올리지 마.”
괜히 나서려는 것을, 리시스가 웃으며 막아버렸다. 들어봤자 뻔한 얘기였다. 처음부터 시녀로 나서지도 않은 사람이 갑자기 충신이 될 리는 없다. 황후에게 따끔한 한마디 했다는 자부심이나 느끼겠지.
“그, 그것이 아니옵고…….”
당황하는 사람들을 향해 리시스는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신경도, 눈치도 볼 필요 없는 사람들이다.
“자, 준비를 시작해야 하니 나머지는 나가 줘.”
리시스의 단호한 축객령에 사람들은 찍소리도 못 하고 물러갔다. 다만 혼자 남은 앨린만 눈을 반짝이던 패기를 잃고 호달달달 떨었다.
“화, 화화화 황후 폐하, 저저저 저기엔 렌데일 공작부인도 있고, 모드린 후작부인도 있는데, 사사사 사교계의 최고 유력인사들인데에…….”
“그래서 뭐. 황후인 나보다 신분이 높나?”
리시스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사람 마음이나 사교계의 권력이 꼭 신분 순으로 가는 것이 아닌 건 알지만, 싸워보기도 전에 백기를 흔들 필요도 없다.
“그, 그렇긴 하지만요…….”
“날 보고 그렇게 눈빛을 빛내던 사람이 할 소린 아닌 것 같은데.”
“……아! 맞습니다. 황후 폐하의 위엄, 권력과, 미모면 텃세고 뭐고 한 방에 사교계를 평정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건 너무 갔고.”
앨린은 흥분한 탓인지 이쪽저쪽 급발진을 하며 박아댔다. 악의는 없어 보였지만 의도도 보이지 않았다. 리시스는 턱을 괴고 앨린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럼, 앨린 양. 앨린 양 말대로 나는 쉬란에 연줄도 없고 배후도 없는 이름뿐인 황후인데. 내게 뭘 원해서 그렇게 눈을 빛냈지?”
“워, 원하다니요!”
“원하는 게 없어? 웬만하면 들어 주려고 했는데…….”
“있어요!”
투명한 반응에 리시스는 헛웃음을 흘렸다. 저런 사람은 음모를 꾸며도 금방 들키고 만다. 그런데 대체 무슨 꿍꿍이로 자신에게 잘 보이려 했던 건지 궁금했다. 리시스는 얘기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을 받은 앨린은 발표를 하는 사람처럼 심호흡을 하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저는! 황후 폐하의 파티를 돕고 싶습니다!”
“……? 왜?”
“왜냐하면 저는 파티를 좋아하는데 저희 가문은 돈도 없고 지위도 낮아서 파티를 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음. 그러니까 황궁의 파티를 앨린 양이 함께 만들고 싶다?”
“네!”
아주 간단명료하고 분명한 이유였다. 이런 사람은 적어도 배신은 안 한다. 합격이었다. 다만 리시스가 파티에 별 뜻이 없는 것은 당분간 비밀이다.
“그럼 오늘의 만찬 준비부터 시작해 볼까?”
“맡겨주세요!”
앨린은 의욕적으로 드레스룸을 찾았다.
“드레스는 어떤 걸로 하시겠어요, 폐하?”
“대충 아무거나.”
“메인 컬러를 어떤 색으로 할지만이라도 말씀해 주시면…….”
“맡길게.”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드레스를 보고……!”
패기 넘치게 드레스룸의 문을 열어젖힌 앨린은 그 자세 그대로 굳었다. 문을 연 채 한참 깜빡이며 안을 들여다보더니, 조심스럽게 다가가 드레스를 한 벌, 한 벌 세어 본다. 그리고 황후의 드레스가 채 열 벌이 되지 않는다는 것에 일차로 기절할 것 같은 얼굴이 되었고, 이차로 그 드레스들이 자신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로 허름하다는 것에 죽어버리고 싶은 얼굴이 되었다.
“폐하, 짐을 아직 덜 푸신 건가요?”
“그게 다인데?”
“……왜요?”
“왜라니? 난 그동안 계속 전쟁터에 있었잖아. 전쟁터에서 어떻게 드레스를 입어.”
그마저도 결혼한다고 급히 구색을 맞춘 것이다. 에드린 왕비는 리시스의 입에 들어가는 빵 한 조각도 아까워했다. 결혼식 예복은 왕국의 위신이 걸려 있으니 화려하게 마련했지만 그 외의 것에서는 인색하게 굴었다. 리시스가 가난한 황후라고 무시를 당하든 말든 알 바 아닌 것이다. 그 결과가 저 궁색한 드레스들이었다.
“아, 안 돼요! 다른 날은 몰라도 오늘 만찬만큼은!”
앨린은 머리를 움켜쥐고 비명을 질렀다. 모시는 황후가 초라해 보이면 본인도 자존심이 상할 수는 있다. 하지만 앨린의 좌절은 그 이상이었다.
“왜?”
“오늘 만찬에는 세니아 양도 올 테니까요…….”
“그게 누군데?”
“원래 황후 후보였던 렌데일 영애요.”
앨린은 거의 울먹이며 대답했다. 리시스는 전혀 예상치 못한 단어를 듣고 눈을 깜빡였다.
“황후 후보?”
“네에. 렌데일 공작가의 영애인데요, 태어나기 전부터 황후감으로 내정되어 평생 황후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으며 자라났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일이 뒤틀렸으니 분명히 황후 자리를 뺏겼다 생각해서 폐하를 공격해 올 거예요! 그런데 드레스부터 밀리면…….”
키에르트는 황제니 황후 후보도 있을 수 있겠다. 세니아라는 아가씨에게는 개인적으로 안 된 일이다. 평생의 목표가 외부적인 이유로 어이없이 무너지게 된 것이니까. 엉뚱한 곳에 화풀이를 하는 것이라도 리시스가 미울 수도 있다. 하지만 화풀이 정도야 무시하면 그만이다.
“드레스에서 밀려도 내가 황후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데 굳이 세니아 양을 신경 써야 하나?”
“쓰셔야 해요!”
앨린은 두 주먹을 꼭 쥐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폐하께서 파티를 개최하시려면 우선 사람을 모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지금 사교계는 세니아 양을 중심으로 뭉쳐 있어요. 만약에 황후 폐하께서 세니아 양에게 밀리는가 싶으면, 황후 폐하의 파티에 아무도 안 올 수도 있다고요!”
“음……, 사교계도 꽤나 살벌하구나.”
전쟁터에서 진영 위치를 잘못 선택하면 몰살당하는 거나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실제 사람 목숨이 걸린 전쟁에서도 과감한 전략을 구사했던 리시스에게 이 정도는 위협이 되지 못했다.
“그래도 오늘 만찬은 굳이 힘줄 것 없어.”
“왜……요? 어떻게요……?”
리시스는 자신감 넘치는 확신을 했다.
“거지꼴을 하고 나가도 황제 폐하는 무조건 내가 제일 예쁘다고 하실 거거든.”